Ⅳ. 라쿠고


라쿠고落語란 근세에 성립되어 현재까지 전승되어오는 전통
 
적인 만담 예능. 의상이나 도구, 음악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고, 몸동작이나 말로만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는 독자적인 예능이며, 고도한 기술을 요하는 전통예능이다. 

요세寄席 등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만담을 하는 사람을 라쿠고카落語家라 하며, 패전 전에는 그들의 대부분이 흥행수입의 보합제로 생활을 보장받았지만, 지금은 연예프로덕션과의 계약에 의해 생활하는 사람이 많다.

동경 라쿠고落語와 관서 라쿠고落語는 소도구나 관습의 차이가 있다.


1. 라쿠고의 역사


■ 소로리신자에몽曽呂利新左衛門
 

재미있는 이야기의 원류로서는 『타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 『콘쟈쿠모노가타리今昔物語』나 『우지슈우이슈宇治拾遺集』에 수록되어있는 설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스개 이야기를 모은 책의 원조로서는, 안라쿠안 사쿠덴安楽庵策伝이 이타쿠라 시게무네板倉重宗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1628년의 『세이스이쇼오醒睡笑』를 들 수가 있다. 이 책을 바탕으로 『코호메子ほめ』『우시호메牛ほめ』『카보챠야かぼちゃ屋』 등, 현재에도 상연되고 있는 이야기들이 탄생하였다. 

한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사람들 중, 소로리신자에몽曽呂利新左衛門이 라쿠고카落語家의 원조라고 하는 설이 있는데, 가공의 인물이란 설도 있어 확실하지가 않다.


 
■ 요네자와히코하치米沢彦八

17세기 후반, 에도江戸에서는 오오사까大坂 출신의 시카노부자에몽鹿野武左衛門이 연극소극장이나 목욕탕에서 「자시키시카타바나시座敷仕方咄」를 개연하였다. 동 시기에 쿄오토京都에서는 츠유노고로베에露の五郎兵衛가 시죠오카와라四条河原를 무대로 활약을 하였으며, 고미즈오後水尾 천황의 공주 앞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오오사까大坂에서는 요네자와 히코하치米沢彦八가 인기를 끌고, 나고야名古屋에서도 공연을 하였다. 『쥬게무寿限無』의 바탕이 되는 이야기를 만든 사람이 초대 히코하치彦八라고 한다. 카미카타라쿠고上方落語 협회에서는 히코하치를 기리기 위해 이쿠쿠니타마진자生国魂神社(大阪市天王寺区에서 「히코하치마츠리彦八まつり」를 개최하기도 한다.

 

■ 산쇼오테이카라쿠三笑亭可楽

18세기 후반에는 카미카타上方에서는 잣파이雑俳나 카나조오시仮名草子에 관련된 사람들이 이야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이 하쿠리칸보우운白鯉館卯雲이란 사람에 의해 에도江戸에 전해져 에도코바나시江戸小咄가 탄생하였다. 카미카타에서는 1770년대에, 에도에서는 1786년에 우테이엔바烏亭焉馬에 의해 「하나시노 카이咄の会」가 시작되었다. 이윽고, 1798년에 오카모토 반사쿠岡本万作와 초대 산쇼테이 카라쿠三笑亭可楽에 의해 각각 2개의 요세를 열자, 그 후 요세의 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 산유우테이엔쵸오三遊亭圓朝

에도江戸말기에서 메이지에 걸쳐 활약했던 산유우테이 엔쵸오三遊亭圓朝는, 역사적인 명인
 
으로, 엔쵸오圓朝의 라쿠고를 기록한 속기록은 당시의 문학, 특히 언문일치의 문장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자신의 문체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던 일본 초기 근대문학에 한 획을 그었던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는 엔쵸오圓朝의 라쿠고에서 해답을 
얻었다고 한다.

1905년, 라쿠고의 발전을 위해 초대 산유테이 엔사三遊亭圓左, 4대 타치바나야 엔코오橘家圓喬, 초대 산유테이 엔우三遊亭圓右, 3대 야나기야 코상柳家小さん, 4대 타치바나야 엔조오橘家圓蔵 등이 라쿠고 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대학에도 파급되어, 대학의 동아리로서 라쿠고 연구회가 1940년대에 동경대학과 와세다대학 등에서 설립되었다. 현재 학생 라쿠고의 전국대회가, 라쿠고의 원조라고 불려지는 안라쿠안 사쿠덴安楽庵策伝의 이름을 따서, 「전일본 학생 라쿠고 선수권 사쿠덴 대상」이 년 1회, 기후岐阜시에서 개최되고 있다.


2. 엔모쿠演目의 종류


쿠고 엔모쿠의 분류에는 몇 가지의 방법이 있는데, 방법에 따라 종류나 구분도 달라진다.



■ 성립시기에 따른 분류


‣ 고전라쿠고 에도시대부터 메이지시대까지 원형이 성립되고, 패전 전까지 연출이 확립된 엔모쿠演目를 말한다. 

‣ 신작라쿠고 흔히, 작자 또는 초연자 이외의 라쿠고카落語家가 제재로 사용하는 일이 드물고, 사회의 동향에 기민하게 반응한 시사적인 작품이나 풍자성이 강한 작품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 연출의 방법구성에 따른 분류


‣ 오토시바나시落とし噺 마지막을 샤레洒落로 마무리하는 짧은 이야기. 이 이야기를  발전시키면 라쿠고가 된다.

‣ 닌죠오바나시人情噺 웃음보다는 세상 이야기, 특히 인정담에 관한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는 라쿠고. 주로 장편이 많다. 예전에는 신우찌真打의 라쿠고카落語家는 반드시 상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에는 「시오바라다스케이지다이키塩原多助一代記」「분시치모토유이文七元結 등이 있다.

‣ 시바이바나시芝居噺 연극처럼 무대배경・음악을 이용하거나, 어떤 경우는 직접 일어서서 연극과 같은 동작을 하기도 하는 엔모쿠演目를 말한다. 처음에는 닌죠오바나시人情噺(세상 이야기)의 스타일로 진행하다,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대북 등의 음악적 요소를 사용하거나 목소리도 연극풍으로 바뀌고, 경극에서 보듯, 의상도 순간변환을 하고, 결투 장면도 있는 등 연극적 요소가 많은 라쿠고이다. 


■ 난이도에 따른 분류


‣ 젠자바나시前座噺 반복연습이나 숙달을 위해 단순하고 짧은, 하지만 기초적인 기술을 양성하기에 적합한 내용의 라쿠고.

‣ 오오네타大ネタ 대작이라 불리는 내용이나 닌죠오바나시人情噺 중에서도 특히 난이도가 높은 작품을 속칭으로 오오네타라 부른다.


■ 결말의 종류에 따른 분류


‣ 니와카오찌にわか落ち 언어유희(동음이의어 등)로 끝나는 결말.

‣ 효오시오찌拍子落ち몇 번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끝나는 것

‣ 사까사오찌逆さ落ち  입장이 바뀌는 결말.

‣ 칸가에오찌考え落ち 금방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결말.

‣ 마와리오찌まわり落ち 결말이 처음으로 돌아오는 것.

‣ 미타테오찌見立て落ち 의표를 찌르는 결말로 끝나는 것.

‣ 마누케오찌間抜け落ち 멍청한 말을 하고 끝나는 것.

‣ 토탄오찌とたん落ち 정해진 대사로 끝나는 것.

‣ 시구사오찌しぐさ落ち 몸동작으로 나타내고 끝나는 것.

3. 표현의 양식


라쿠고에 있어서의 표현의 양식은 다음과 같다.


■ 말

음성으로 나오는 구어체 말.


■ 동작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있으며, 기본적으로 일어서서 걷지 않는다. 주요한 동작은 다음과 

같다.

‣ 표정 등장인물의 표정을 연기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일부러 과장되고 재미있는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 시선 몇손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말을 걸 경우에는 무대 아래쪽을 쳐다보고, 반대의 경우에는 위쪽을 쳐다본다. 이렇게 시선을 바꾸는 것에 의해 등장인물을 구분되는 효과를 준다.

‣ 먹는 동작  닫은 부채를 젓가락인 냥 사용하기도 하고, 또는 손으로 무엇을 집어먹는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 걷는 동작 정좌한 채, 혹은 가볍게 무릎을 세우는 정도로 일어나, 손을 흔들면서, 양쪽 무릎을 교대로 움직인다. 실지로 일어서서 걷는 일은 없다.

‣ 적는 동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손수건을 종이로, 부채를 연필로 사용하여 글을 적는다.

‣ 배를 젓는 동작 라쿠고에서는 자주 나오지 않는 동작이나, 부채를 노로 사용하여 연기한다. 힘이 드는 느낌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 자는 동작 실제로 누우면 안 되기에, 양손을 포개어 팔베개의 느낌을 연출한다. 

‣ 눈물을 흘리는 동작 주로 닌죠오바나시人情噺에서 많이 사용된다. 지참한 잔속의 물이나 녹차에 손가락을 담가, 그 손가락으로 눈 밑을 내려 긋는다.


■ 행동을 위한 소도구

센스扇子(부채), 테누구이手ぬぐい(수건), 켄다이見台(작은 책상), 효오시기拍子木(박자를 치는 나무), 하리센張扇(소리를 내는 부채)의 5종류만 사용된다.


 
 
 






 
 








■ 그 외 특수한 엔모쿠演目에 있어서의 부수적 요소

특수한 엔모쿠를 상연할 때의 무대 배경 그림.


■  라쿠고落語를 상연하는 데에는 직접 관계가 없으나, 라쿠고落語를 상연하는 무대를 구성하는 요소


‣ 데바야시出囃子 라쿠고카落語家가 코오자
 
高座
에 올라갈 때, 즉 등장할 때 나오는 음악. 

‣ 라쿠고카落語家의 의상 라쿠고카落語家는 단순한 문양의 옷이나 무지의 와후쿠和服(키모노)를 착용한다.

‣ 자부통座布団 방석

‣ 코오자高座 라쿠고落語를 하는 무대

‣ 메쿠리めくり 제목이나, 라쿠고카落語家 이름을 적은 종이.


Ⅴ. 우끼요에


우끼요에浮世絵란, 에도江戸시대에 성립된, 서민들의 일상생활이나 풍물 등을 그린 그림. 우끼요浮世란 말은 원래 현대풍을 의미하는 말이므로, 우끼요에浮世絵란 당시의 시대상이 담겨있는 풍속화라 할 수가 있다. 일반적으로 우끼요에라 하면 다색을 사용한 목판화(흔히 니시키에錦絵라고 한다)를 연상하는데, 肉筆画 등도 포함된다.


1. 우끼요에浮世絵의 역사

 

초기

메이레키노 타이카明暦の大火 무렵부터 호오레키宝暦(1751년에서 1763년)까지를 지칭한다. 초기의 우끼요에浮世絵는 육필화와 목판의 단색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17세기 중반 이후, 그림책에 삽화를 주로 그렸던 히시카와모로노부菱川師宣가 등장하여 우끼요에를 집대성했다. 그는 우끼요 조오시浮世草子라는 책에 삽화를 그려 대중의 인기를 얻자, 책에서 그림의 비중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나중에는 문장과 그림이 역전되어 그림을 해설하는 식으로 되었다. 종국에는 아예 문장 없이 그림만을 감상하는 우끼요에가 제작된다. 

한편, 사이카쿠西鶴의『코오쇼쿠이찌다이오토꼬好色一代男』(1682)에 부채에 우끼요에가 그려져 있다라는 묘사가 있는데, 이것이 우끼요에라는 말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토리이 키요노부鳥居清信(1664- 1729) 시대에는 단색의 판화에 붓으로 착색한 그림이 등장하게 된다. 


중기

니시키에錦絵가 탄생한 1765년부터 1806년까지를 지칭한다. 1765년 무렵에는 에도江戸의 하이닌俳人을 중심으로 그림 달력이 유행하고, 그림달력 교환회라는 일종의 사교모임이 
 
자주 행해졌다. 그림 달력의 수요가 급증하자,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에 의해 다색판화 기법으로 제작된 니시키에錦絵가 발명된다. 이는 우끼요에 문화가 본격적인 개화기를 맞이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다색판화 기법이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인쇄기법의 발달과 함께, 복수 인쇄에도 견딜 수 있는 질기고도 고품질의 종이가 보급된 점을 들 수가 있다. 또한 경제의 발전에 따른, 밑그림 담당자, 판화 조각 담당자, 인쇄 담당자 등, 복잡한 공정의 분업체제가 정비된 점도 간과할 수가 없다.
스즈키  하루노부鈴木春信의 사후, 우끼요에浮世絵의 기법은 점차 사실적으로 변화한다. 1770년대에는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가 등장하여 섬세하고도 우아한 터치로 미인화를 그려 인기를 끌었다. 1796년에는 샤락写楽이 등장하여 불과 10개월에 140여점의 그림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샤락写楽은 특유의 과장된 배우화에 의해 화제를 모았지만, 특징을 너무 과장해서 인기를 그다지 끌지 못했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우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国에 밀려 사라지고 만다. 우타가와歌川는 무대배우화(役者舞台姿絵)로 불과 26살의 나이로 일약 인기화가가 된다. 비록 현대에는 샤락写楽과 혹사이北斎에 밀려 존재감이 다소 떨어지지만 당시에는 최고의 인기 화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또한 다른 화가의 제자들이 거의 무명인 점에 반해 우타가와歌川의 계보는 메이지明治시대까지 이어진 점을 볼 때, 그는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뛰어났다고 할 수가 있다.
 

후기

1807년부터 1859년까지를 지칭한다. 키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麿의 사후, 미인화의 주류는 케이사이 에이센渓斎英泉의 그림처럼 관능적인 미인화로 이행한다. 한편 카츠시카 혹사이葛飾北斎는 당시의 여행 붐에 편승하여 후가쿠산쥬우록케이富嶽三十六景를, 또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는 도우카이도오고쥬우산쯔기東海道五十三次를 간행하였다. 이 두 사람에 의해 인물화 중심이었던 우끼요에浮世絵의 세계에 풍경화가 새롭게 발달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배우화 방면에서는 우타가와 쿠니사다歌川国貞가 스승인 우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国의 뒤를 이어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배우화를 그리는 한편, 독자적인 화풍으로 새로운 미인화의 세계를 개척하여, 세련되고 다소 마성을 띤 에도江戸 미인을 다수 그렸다. 또, 중국사서의 붐을 타고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는 무사화를 다수 그렸다. 그의 수호전 시리즈는 많은 인기를 얻고, 수호전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말기

1860년부터 1911년까지를 지칭한다. 메이지明治 維新에 의해 혼미한 국내 사정을 배경으로 카부키歌舞伎 등에서 그로테스크한 내용이나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 우타가와 쿠니요시歌川国芳의 제자 츠끼오까 요시토시月岡芳年와 오찌아이 요시이쿠落合芳幾에 의해 잔혹화(일본에서

는 무잔에無残絵라고 불린다)로 불리는 종류의 그림이 탄생하게 된다. 이 그림은 피투성이의 잔혹한 장면으로 가득 찬 화풍으로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 이 시기에는 정통파 화가의 대명사 격인 카노우하狩野派에서 카와나베 쿄오사이河鍋暁斎가 우끼요에를 그렸던 점은 이채롭다고 하겠다. 코바야시 키요찌카小林清親는 광선화라 불리는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풍경화를 시도하였다. 또 우타가와 요시후지歌川芳藤는 어린이들을 위한 장난감그림이라 불리는, 지금의 어린이 잡지 부록에 우끼요에를 그려 장난감그림 전용화가로 활약하여 장난감 후지요시おもちゃ芳藤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끼요에는 사진 기술의 발달로 점차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우끼요에 화가들은 사진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였지만 대부분이 실패하여 할 수 없이 전향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런 상황이었지만, 츠끼오까 요시토시月岡芳年는 서양풍의 화풍으로 니시키에錦絵 신문 등에, 역사화, 풍속화를 시도하여, ‘최후의 우끼요에 화가’라 불렸다. 또한 제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우끼요에 이외의 그림을 배우게 하여 카부라키 키요카타鏑木清方와 같이 일본화가로서 대성한 이도 있고, 그 외에도 삽화 작가 등으로 활약하거나, 그 외의 장르에서 우끼에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2. 우끼요에浮世絵의 특징


우끼요에는 판화이기에 다수 인쇄를 할 수가 있어, 그림책이나 신문 등의 삽화 역할도 할 수가 있었다. 에고요미絵暦라 불리는 달력 제작도 하여, 그림 속에 숫자를 감추는 방법을 고안하는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명확한 도안과 대담한 구도, 그림자 표현을 하지 않는 것 등이 표현상의 특징이다. 원근법도 도입하여, 혹사이北斎의 ‘낚시명인’과 같은 원경의 인물을 오히려 크게 그리는 확신범적인 원근법을 시도한 그림도 있다.

대중문화의 일부로, 현대의 미술전 등에서 보듯, 액자에 넣어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손에 직접 들고 감상을 하는 친숙한 그림이었다. 


3. 해외에 끼친 영향


1865년 프랑스의 화가 블랑몬이 도기의 포장지였던 『혹사이만가北斎漫画』를 친구들에게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프랑스의 인상파에게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고호가 ‘탕기영감의 초상’이란 작품의 배경에 우끼요에를 그린 것이라든지,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이 우끼요에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쟈포니즘의 영향과 일본미술을 취급하고 있던 사뮤엘 빙은 아르 누보에 우끼요에와 같은 평면적인 의장을 구사하였다. 또한, 드뷔시가 혹사이北斎의 『카나가와오끼나미우라神奈川沖波裏』에 자극받아, 교향곡 ‘바다’를 작곡하는 등 우끼요에의 영향은 클래식 음악에 까지 파급하였다고 한다.






 
 
 



4. 제재


풍경, 카부키歌舞伎배우, 스모선수 또는 유녀의 초
 
상화 등이 그려졌다. 또한 희화적인 요소를 가진 현대의 만화에 해당하는 그림도 상당수 있었다. 

한편, 색정적인 요소를 주제로 한 슌가春画(춘화)도, 대부분의 저명한 우끼요에 작가가 그렸다고 한다. 춘화는 세트로 판매되는 일이 많았는데, 판매가격이 고가였기 때문에 제작비를 많이 들여 고급제품을 만들었다. 현실상의 성 풍속을 패러디한 요소가 있고, 모두가 선정적인 작품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등을 감안할 때, 단순히 포르노로서 파악할 수은 없다는 지적이 있다.








Ⅵ. 게이샤                        



1. 게이샤의 정의


명칭

이샤芸者란, 무용이나 음악, 악기 등으로 연회의 흥을 돋우고, 손님을 접대하는 여성. 술자리에서 각종 예능을 피로하고, 좌석을 이끌어가는 여성을 말하는데, 에도江戸시대 중기 무렵부터 성행하였다. 게이샤芸者란 명칭 이외에도 게이기芸妓, 게이코芸子 등으로도 불리며, 수행이 끝난 게이샤와 수행중인 게이샤는 구별되어 불리며, 지역에 따라 그 명칭이 다르다. 토오쿄오東京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에서는, 수행이 끝난 이는 게이샤芸者, 견습중인 이를 한교쿠半玉, 오샤쿠雛妓 등으로 부른다. 현재는 이 호칭이 널리 표준어로서 정착되고 있다. 쿄오토京都・오오사까大阪 등의 관서지방에서는 수행이 끝난 이를 게이코芸子, 견습중인 이를 마이코舞妓라 부른다. 야마가타山形, 니이가타新潟, 이사카와石川 등에서도 이 명칭을 사용한다.


복장

수행과정을 끝낸게이샤의 경우 주로 시마다마게島田髷로 머리를 장식하고 하얀 분을 바른 화장법이 일반적이다. 한교쿠半玉, 마이코舞妓 등의 젊은 게이샤의 경우는 모모와레桃割れ의 머리형을 하고 후리소데振袖를 입는다. 토오쿄오東京의 후카가와深川의 타츠미게이샤辰巳芸者들은 버선을 신지 않고, 하오리羽織를 입는다. 그래서 그들을 하오리게이샤羽織芸者, 줄여서 하오리羽織라고도 부른다.

게이샤는 왼손으로 키모노의 옷자락을 잡으므로, 히다리쯔마左褄(왼쪽아내)라 불린 적도 있었다. 이것은 ‘芸는 팔아도 몸은 팔지 않는다'라는 게이샤의 신조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2. 게이샤의 기원과 역사


일본 사회에 게이샤가 공식적으로 선을 보인 것은 오랜 전란이 끝나고 평화 시대로 접어든 
 
 
에도江戸시대부터였다. 1750년 전후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게이샤가 무가의 연회나 유곽의 술자리에 드나들었다. 원래 게이샤는 12세기 말 시라뵤오시白拍子라는 무용수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라뵤오시白拍子는 잔칫집에 불려가 춤을 추면서 흥을 돋웠는데 어느 샌가 몸도 팔게 되어 매춘부의 다른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게이샤는 요시와라吉原와 같은 유곽에 전속되기도 하고 더러는 개별적으로 밤무대를 찾아다녔다. 개인적으로 뛰는 게이샤는 거의 공공연히 매춘업을 겸하였으나 요시와라吉原의 게이샤는 성을 전문적으로 파는 유녀와는 일선을 긋고 오로지 가무만으로 손님을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10년 간 제대로 수련을 쌓은 게이샤보다 돌팔이게이샤가 시정잡배들에게는 더 인기가 좋았다. 콧대 높은 게이샤는 손 한번 잡아보기도 어려웠지만 독립 채산형의 게이샤는 언제나 흔쾌히 옷을 벗었다. 
수입 면에서 이들이 정통파를 압도하게 되자 정통 게이샤들은 매춘부나 다름없는 게이샤 단속을 당국에 호소하였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다. 요시와라吉原에서는 게이샤와 유녀의 영역이 분명하여 상호의 역할분담이 철칙으로 되어있었다. 전통파 게이샤들은 손님의 육체적 요구에 절대 응하지 않았다. 게이샤 자신도 예능인으로서의 긍지를 가졌고, 그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손님들도 이를 인정하였다. 유곽에서는 정통 게이샤들에 대해서는 명부를 별도로 만들어 특별 관리하였다. 만약 매춘행위를 하다가 발각되는 경우에는 발가벗긴 채로 내쫓겼다. 이와 같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가 인간 문화재적 게이샤를 배출하게 되었고, 요시와라의 명성을 존속시켰던 것이다. 요시와라와 필적하는 쿄오토京都의 유곽으로는 기온祇園이 있다. 

게이샤들은 돈 많은 한량의 목표물이었다. 시정의 부인네들보다 뛰어난 미모, 예와 교양을 갖춘 데다 더욱이 열 번 찍어도 꿈적도 않을 것 같은 그 오만스러운 자태에 도전 의욕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샤들은 격이 높을수록 엷은 화장을 했다. 

1940년대에는 게이샤 유흥점이 불법화되어 많은 게이샤들이 공장이나 사업근로자로 전직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는 그 숫자가 17,000명밖에 안 되었고 최근에는 더욱 줄어 1,000명 정도로 토오쿄오東京나 오오사까大阪, 쿄오토京都의 특정 장소에서만 겨우 볼 수 있을 정도이다. 현재 게이샤의 평균연령은 40세 이상이며 점점 게이샤들의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 게이샤는 살아있는 유적과 다름없다. 거리에서 게이샤를 보는 것은 매우 드물며, 사실 대부분의 일본인은 직접 게이샤를 접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3. 게이샤가 되는 과정


게이샤가 되려면 게이샤 학교에서 미야코 오도리都おどり와 같은 전통춤에서부터 노래, 샤미센三味線을 켜는 훈련 등, 최소한 5년은 배워야 한다. 이뿐 아니라 다도로부터 꽃꽂이, 일본 도자기, 심지어는 세계의 정치까지도 공부해야 하는 등 그 과정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쉽게 덤벼들지 못한다.

 
전통적인 게이샤의 교육은 만 6세 6개월 6일째 되는 날부터 시작해서 만 16세가 되어야 끝이 난다. 험난한 10년의 과정을 마쳐야만 드디어 게이샤, 즉 재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10년 동안, 그녀들은 은퇴한 게이샤가 운영하는 오키야置家에서 숙식을 한다. 그녀들은 오키야置家에서 은퇴한 게이샤를 어머니라 부르면서 교육을 받는다. 그 동안 텔레비전을 보아서도 안 되고, 친구를 불러서도 안 되며, 남자친구와는 만날 수 없고, 선배에게는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등 엄격한 규율 속에서 지내게 된다.

견습 게이샤가 15세 정도 되면 미즈아게水揚げ라는 의식을 치르게 된다. 일종의 성인식인 이 의식은 일종의 처녀를 떼는 것으로, 남성들이 그동안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게이샤의 처녀를 돈을 주고 사는 것이다. 일류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미즈아게의 가격이 굉장히 높아야 했고, 정말 매력 있는 견습 게이샤들의 미즈아게를 치루기 위해 남성들 사이에 가격 경쟁이 붙기도 했다고 한다. 미즈아게는 7일 동안 계속된다. 미즈아게를 치루고 나면, 그동안 견습생임을 표시하기 위해 달았던 붉은 깃을 떼고 진짜 게이샤가 되는 것이다.

일류 게이샤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오키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데, 이 독립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뒤 그 오키야의 어머니의 수양딸로 들어가 오키야를 이어나가는 방식도 있고, 자신이 다른 집을 차리는 방식도 있다.

만 20세가 되면 게이샤는 자신의 연인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단나상(남자주인)을 선택하는 것이다. 단나상은 대개 재벌이거나 정치가들이다. 그들은 따로 정실부인을 둔 채, 게이샤에게 매월 수 백 만원에서 수 천 만원에 이르는 경제적 지원을 해주며 관계를 유지한다. 아이가 생기면, 딸은 게이샤로 키우고 아들은 유곽에서 일꾼으로 살아가도록 한다. 단나상의 정실부인이 죽어도 그 자리를 욕심내어서는 안 된다. 반면, 단나상은 게이샤를 끝까지 재정적으로 뒷받침을 해주어야만 한다. 만약 그녀를 버리면, 따돌림을 받게 되어 기온 출입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1958년경 매춘 금지법이 생겨나면서 사실상 매춘에 가까운 단나상과 미즈아게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게이샤의 역할과 예술적 측면


본의 사회적 구조상 일본 부인들의 역할은 가정에 국한되어 있어 사업과 정치에는 거의 참여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이 직접 남편의 사업상 파트너들을 대접할 수 없기에 

게이샤가 사업상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연회 시설을 빌릴 수 있는 많은 료오칸旅館(여관), 차야茶屋(찻집) 등에서 게이샤들은 사업상 모임의 원만한 진행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게이샤들은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에서도 많은 예술적 부분들을 담당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고전 예능인 노오, 카부키歌舞伎, 분라쿠文樂 등에 게이샤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일본의 전통 예능은 게이샤와 함께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메이지明治시대 이후의 문학 작품 속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의 초창기에는 외부인과 접할 수 있는 여성이란 주로 유녀나 게이샤였기 때문에 게이샤라는 존재가 일본여성의 대표인 양 외국인들에게 비친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게이샤는 일본 전통 음악이나 고전 무용의 발전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연극의 소재로서도,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 문화사적 의미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 작품 『유끼구니雪國』에서도 히로인으로 등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게이샤이다.

현재에도 역시 게이샤들의 많은 예술적 참여가 이루어진다고 언급 하였는데, 대표적인 예가 마츠리이다. 게이샤들이 주로 참여하는 마츠리는 쿄오토京都에 집중되어 있는데, 아마도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는 고도(古都)인 이유도 있을뿐더러 게이샤들이 주로 활동했던 기온祇園이라는 거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이 참가하는 마츠리는 다음과 같다.


게이샤들이 참가하는 대표적인 마츠리

토오카에비스(十日惠比須)

1월 8일~11일

토오카에비스 신사에서 행해지는 축제로 축제 기간 동안 길가엔 노점들이 들어서고 하카타(博多) 게이샤들의

행렬도 볼 수 있다

미야코 오도리(都おどり)

4월 1일~30일

기온 카부렌죠오(祇園歌舞練場)에서 화려한 옷차림의 게이샤들이 벚꽃 춤을 추는 축제

카모가와 오도리(鴨川おどり)

5월 1일~24일

산죠오오하시(三城大橋) 근처의

본토쵸 가부렌조(先斗町歌舞練場)에서 게이샤들이

전통 일본 춤을 춘다

돈쑤구 축제

6월 2일~3일

히가시 이즈마치(東伊豆町). 남성의 심벌을 본뜬 신체를 마을의 게이샤들이 지고 거리 행진하는 유머러스한 축제로서 부부화합, 자손번영을 기원해

200년 전부터 행해지고 있다


또한 게이샤가 일본 문화 상징어의 하나가 된 데에는 19세기 말 서양 미술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제패니즘(Japanism)물결을 빼놓을 수가 없다.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를 중심
 
으로 하여 다양한 일본미술이 유럽 등지에 유입되면서 유럽의 세기말 미술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그려진 유녀(遊女)나 게이샤의 아름다운 모습에 서양화가들은 높은 관심을 보이게 되고, 그들의 손에 의해 게이샤를 모티브로 한 각종 미술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실제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게이샤를 접해본 외국인들은 자기가 체험한 게이샤의 인상을 직접 글로 남기기도 해, 서양인들은 서양과는 다른 동양의 여성상으로서 게이샤를 떠올린다. 일본의 보수적 여성학자들은 게이샤가 일본의 문화유산쯤으로 취급되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지만 게이샤가 일본 문화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 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5. 게이샤의 외관


게이샤들의 화장법은 아주 복잡하다. 우선 기모노 밖으로 
 
드러나는 모든 부분을 늑골에서 등까지 하얗게 분칠을 한다. 얼굴 화장은 특별한 도료를 사용하여 새하얗게 칠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은 자기의 개성을 죽이고 철저하게 손님들의 요구에 의해 존재하는 게이샤들의 성격을 이야기해준다.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게이샤의 화장은 특별한 상품이 되기 위한 특별한 포장인 것이다. 그러나 게이샤들은 격이 높을수록 엷은 화장을 했다. 짙은 화장은 남성들에게 매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며 싸구려 매춘부일수록 화장이 진했다. 그리고 자를 이용하여 이마, 눈썹 간격을 세심하게 신경 쓰며 화장을 점검한다. 이런 화장법을 오시로이白粉라 하는데 사라져가는 일본의 전통 문화로서 현재는 게이샤들이나 가부키 연극배우들만이 이런 화장법을 한다.

옛날에는 직접 머리를 만들어 꾸몄지만 현대에는 가발을 사용한다. 고가의 인모로 제작된 이 가발은 경력 있는 게이샤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머리 장식은 게이샤들에게 가장 중요시 생각되었던 것으로 과거 어린 게이샤들은 정수리가 벗겨지는 고통도 감수했다고 

한다.

게이샤들의 기모노는 입기가 까다로워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게이샤들은 가격도 매우 비싸며 길이가 길고 화려하고 손이 많이 가는 섬세한 기모노를 입는다. 전통적으로 기모노를 입을 때는 몸매가 드러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게이샤들이 입는 기모노는 일반 여자들이 입는 것보다 더 헐렁하게 입는다. 기모노 자체가 몸에 걸쳐 있도록 하는 것이다. 먼저 기모노를 두른 뒤 주름과 장식 띠로 몸을 가린다. 이 과정에서 매듭이나 주름하나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또한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가장 매혹적이라고 생각하는 목덜미는 살짝 드러내줘야 한다. 마지막으로 오비라는 넓은 장식 띠를 바닥까지 늘어뜨리고 리본처럼 묶는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게이샤가 입는 기모노나 보통 여성이 입는 기모노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화려하고 옷자락이 끌리며 옷깃이 짙은 검정색 예복이 게이샤의 공식적인 의복이며 자주 입는 옷이기도 하다. 게이샤의 평상복은 7부 소매에 발목 길이의 비단 기모노로 일반인들이 입는 것보다 차분한 색깔의 가벼운 옷이다. 소매나 색상, 오비의 묶는 방법에서 보이는 사소한 차이가 게이샤임을 나타내 주지만 그 차이가 분명한 것은 아니며 일본인들도 그 차이를 뚜렷하게 알고 있지 않다. 그러나 보통 여성들과는 다르게 기모노를 무릎 위까지 끌어올려서 속에 입은 붉은 속옷을 내보이고 다닌다는 특징이 있다.


6. 대표적인 게이샤

 

■ 이와사키 미네코岩崎峰子

이와사키 미네코岩崎峰子는 몰락한 유서 깊은 귀족의 딸이었는데, 유명한 게이샤 가문의 사람이 미네코의 완벽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가문에 들어오기를 바랐고, 그녀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유명한 게이샤 가문의 후계자겸 상속자로 입양되어 자랐다.

5살 때 게이샤 가문에 입양되어 16살에 마이코舞妓가 되었고, 21살에 게이샤가 되기까지 많은 수업을 받아야했다. 일본의 전통 춤과 전통 음악, 예절, 서예, 다도, 꽃꽂이 등 게이샤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일본 최고의 예술가들이었다.

그녀는 게이샤가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29살에 은퇴를 할 때까지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새벽 3시에 자는 하루 수면 시간 3시간이라는 굉장히 타이트한 생활을 하는 등 많은 

노력으로 최고가 되었다. 이와사키 미네코가 모신 손님들은 모두들 국제적인 귀빈들이었고, 그녀의 수입은 그 당시의 총리와도 맞먹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은퇴한 후 결혼을 하고, 『게이샤, A Life』라는 책을 집필해 게이샤로서의 삶을 대중들에게 소개했다. 게이샤들은 자신의 사연을 알리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데, 그 규칙에 따라 지난 300년 동안 자신의 사연을 대중에게 털어놓은 게이샤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와사키의 자서전은 게이샤로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밝힌 최초의 책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입을 통해 그리고 미국 여성작가의 손을 통해 게이샤들의 삶과 의식들을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게이샤들에 대한 오래된 오해를 풀기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7. 현대의 게이샤


게이샤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무척이나 힘들고 결과적으로는 유부남의 첩으로 일생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게이샤로서의 인생이 결코 행복한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게이샤를 동경한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이야기일 때이고, 당연히 자신의 딸이 게이샤가 되려고 하면 극구 반대한다. 그러니 게이샤의 수가 나날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 일본의 밀실 정치 관행이 사라지면서 밤에 요정에서 은밀히 만나 정치를 했던 일들이 줄어들고, 요정보다는 돈도 적게 들이면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클럽이나 술집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고 있다.  한 때 남성의 신분의 상징이기도 했던 게이샤가 이제는 스포츠카와 골프 회원권에 그 자리를 물려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게이샤들의 수도 현저히 줄어들고 있다. 있다고 해도 과거의 엄격했던 게이샤 과정보다 간략한 과정을 밟게 되었고, 결국 줄고 줄어 한 세기 전에 80만 명에 달하던 게이샤는 오늘날 7백 명에 불과하다.

시대의 흐름 속에 전문 게이샤들은 사라지고 소수 남아있는 게이샤들은 마이꼬를 자청하
 
는 젊은이들 한명이 아쉬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샤미센을 켜며 노래와 춤을 즐겼던 일본의 예능인 게이샤들의 문화는 이렇게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는 게이샤들은 항상 자신의 전통 무용이나 전통 악기를 연마하여 연회장 이외에도 극장이나 TV 등에서 모습을 많이 비추고 있다. 나이가 많은 게이샤는 게이샤 집을 직접 운영하며 춤과 음악을 지도하고 시(市)에서 실시하는 연례 공연에 참석하기도 한다. 그들은 80세가 넘는 고령에도 두꺼운 옷을 입고 무거운 가발을 쓴 채 뜨거운 조명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전통 예능을 공연한다. 또한 게이샤 학원이 생길 만큼 게이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게이샤를 주인공을 한 소설이나 TV 드라마는 지금도 계속 발표되고 있으며, 유명 여배우가 게이샤 역할을 맡은 영화나 연극 등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항상 관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화려한 기모노와 그로테스크한 화장을 한, 남자를 즐겁게 해 주는 것이 직업인 게이샤는 한 때 일본 여성에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과는 달리 대부분의 게이샤는 슬픈 운명을 타고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 진정한 예술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언제나 이룰 수 없는 꿈이지만 완벽을 추구하였다. 

게이샤들은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에서도 많은 예술적 부분들을 담당하고 있다. 일본의 전통 예능은 게이샤와 함께 발전해왔다고 볼 수 있으며, 게이샤는 일본 전통음악이나 고전 무용의 반전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문학이나 연극의 소재로서도, 더 나아가 일본 문화사적 의미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현재 우리나라는 기생이라는 의미가 완전히 퇴색되어 윤락녀의 의미 이외에는 없는 반면 일본에서는 게이샤를 유형물로 보존하려 하고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그 뜻을 배우려고 하는 모습에서 우리나라의 기생 문화를 보존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E. 일본의 문화  171

E. 일본의 문화


Ⅰ. 마츠리

 

마츠리는 神社나 절을 주체 또는 무대로, 신령 등에 봉납하며 기원하는 의식, 제례를 말한다. 풍요와 대어, 상업 번성, 병마 퇴치, 무병 등을 기원 또는 성취에 대한 감사를 위해 행하는 것, 또 연중행사가 발전된 것, 위인들의 혼령을 달래기 위해 행해지는 것 등, 행사의 목적에 따라 시기나 내용이 다양하다. 또한 같은 목적・대상이라고 해도, 제례의 양식이나 취지나 전통이 지역에 따라 다르다.


1. 마츠리의 개요


■ 마츠리의 기원


‣ 마츠리의 어원

마츠리란 말은 일본어 동사 마츠루祀る의 명사형으로, 본래는 신을 숭상하는 일, 또는 그 의식을 지칭하는 말로, 그런 의미의 「祭」는 현재도 地鎮祭, 祈雨祭 등의 형태로 남아 있다. 초기의 마츠리는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행해졌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마츠리는 일본신화에 나오는 아마노이와토天岩戸 앞에서 거행된 의식이라고 한다.



E. 일본의 문화  172

‣ 마츠리의 기원

마츠리의 기원은 인간의 집단생활과 함께 시작되었다. 집단은 혈족, 종족이 중심이 되지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공동행동(수렵, 경작, 종족유지 등)이 불가결한 것이었다. 공동의 행동을 하기 전에 최고의 결과를 얻기 위하여, 상징적인 숭배물(처음에는 자연이었고, 세월이 경과되면서 초자연적 존재로서의 신으로 진화해 간다)에 기원하고, 또 끝나면 집단이 모여 그 결과를 보고하면서 감사를 드리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그런 과정들이 이윽고 한 지역에 있어서의 마츠리로 정착되는 것이다.


‣ 마츠리의 정의 

 마츠리를 정의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문제인데, 민속학자나 문화인류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 확실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츠리라고 하면 다음의 4가지 요소는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1. 성스러움

2. 일상에서의 탈출

3. 주기적인 행사

4. 집단적 성향


성스러움이란, 마츠리에서는 신상이나 불상, 또는 마츠리의 주체가 되는 신 등, 여러 가지의 심벌을 숭상하고, 각각의 마츠리에 고유의 관습이나 룰을 참가자에게 부과하고, 목욕재계를 통하여 성스러운 시간이나 공간을 구축하는 일을 말한다. 이를 통해 신과의 교류를 함으로써, 구복을 성취한다고 믿었다. 이는 곧 일상에서의 탈출과도 연결되었다. 즉 마츠리 기간에는 일상적인 일이나 학업 등이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발성의 마츠리라는 것은 거의 있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마츠리라고 하면 일년에 한번, 아니면 몇 년에 한번과 
 
같은 식으로 주기적으로 행해지기 때문이다. 주기적이란 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공동으로 마츠리를 체험함으로써, 공동체 속의 자신이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고향이라든지, 동류의식이란 것이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다.

 

‣ 마츠리의 양면성

기본적으로 마츠리는 전반부의 신을 숭상하는 제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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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와 제사 의식이 끝나고, 참가 인원이 공물을 나눠먹으면서 다시 한번 공동체의식이나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난 뒤, 여흥을 즐기는 후반부의 축제적 요소로 나누어진다. 

제사적 요소는 신과의 교감을 통하여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이므로, 목욕재계를 요하는 등 일상보다도 더 엄격한 규율과 질서가 요구된다. 하지만 후반부의 축제적 요소는 일상에서는 허락되지 않았던 일탈행위(훈도시차림, 남성의 여장, 미성년의 음주 등)가 마츠리 기간 동안은 허락되어, 평소에 쌓였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커다란 의미가 있다.

 

2. 일본의 3대 마츠리


■ 쿄오토京都의 기온마츠리祇園祭

기온마츠리祇園祭는 야사카八坂 神社의 마츠리로, 천년이 넘는 긴 역사와, 또 화려하고 호화스러움, 또 행사기간이 1개월에 걸치는 대규모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869년, 역병의 창궐을 물리치기 위해, 당시 일본의 나라 수인 66개의 창을 만들어 기원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그 후 몇 차례 중단된 적이 있었지만,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7월 한 달 동안 긴 기간에 걸쳐 행해지며, 기온마츠리의 하이라이트 요이야마宵山에는 매년 40만 명 이상이 운집해 기온마츠리 최고의 성황을 이룬다. 또 호화찬란한 야마보코山鉾행진도 기온마츠리의 중요한 볼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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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오사까大阪의 텐진마츠리天神祭

텐진마츠리天神祭는 오오사카텐만구大阪天満宮가 설립된 2년 후인 95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7월 24일, 25일 양일간 펼쳐지는데, 최고의 볼거리는 25일 오오카와大川에서 펼쳐지는 소형선박 퍼레이드로, 밤에는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오오카와大川에 비치는 등빛과 불꽃의 화려한 모습에 의해 불과 물의 제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토오쿄오東京의 칸다마츠리神田祭

원래는 야마쿠루마山車 마츠리였지만, 노면전차가 개통되면서 야마쿠루마가 다니는데 어려움이 생겼고, 게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의 야마쿠루마가 소실된 후로 야마쿠루마 대신으로 오미코시御輿가 주류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칸다마츠리神田祭는 격년제로 신코오사이神幸祭, 오미코시미야이리御輿宮入 등의 행사가 열린다. 신코오사이神幸祭는 5월15일에 가까운 토요일에 행해지는 칸다메이진神田明神 神社의 행사이다. 이치노미야一の宮, 니노미야二の宮, 산노미야三の宮가 헤이안平安시대의 옛 복장을 한 사람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엄숙히 행진을 한다. 미츠코시三越본점에서부터, 오미코시, 야마쿠루마山車, 무사 행렬 등이 어울러져 행진이 이어지고 다시 神社로 돌아온다. 오미코시 미야이리御輿宮入는 신코오사이神幸祭 다음 날 행해지는 칸다神田 각 지역의 행사. 각 지역마다 오미코시 연합이 설립되어, 각 지구를 순회한 뒤, 시간 별로 神社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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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외 일본의 유명한 마츠리


■ 아오모리青森 네부타마츠리ねぶた祭

네부타ねぶた라 불리는 웅장하고 거대한 무사인형으로 꾸민 야마쿠루마山車가 시내 중심부를 행진하고, 독특한 의상의 하네토라 불리는 사람들이 ‘랏세라’란 구령과 함께 야마쿠루마를 끈다. 네부타 마츠리는 동북지방 3대 마츠리 중의 하나이며, 1980년에는 일본 중요무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매년 8월 2일부터 7일까지 개최되는데, 2일부터 6일까지는 야간 행진이며 7일은 주간 행진을 한 뒤, 밤에는 해상운행과 불꽃놀이가 개최된다.

네부타에 등장하는 제재로는 神仏, 일본이나 중국의 전설상의 인물, 역사적인 인물, 카부키에 등장하는 인물 등이 많으나, 최근에는 아오모리 지방의 전설이나 위인, TV프로 등을 제재로 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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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토오마츠리竿燈祭

칸토오마츠리竿燈祭는 매년 8월 3일부터 6일까지 아키타켄秋田県 아키타시秋田市에서 개최되는 행사이다. 특징은 등불을 벼 이삭처럼 길게 늘어뜨려, 이마・허리・어깨 등에 세워서 풍작을 기원하는 마츠리이다. 어른용 등불인 오오와카大若는 등이 46개, 무게가 약 50kg이라고 한다. 중요 무형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센다이仙台 타나바타마츠리七夕祭り
 
센다이仙台 타나바타 마츠리七夕祭り는 미야기켄宮城県 센다이시仙台市에서 매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개최되는 마츠리이다. 센다이의 藩祖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원조란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타나바타七夕 장식을 하는 마츠리 자체는 에도江戸시대 중기 무렵부터 전국 각지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센다이仙台가 원조
 
라고는 할 수가 없다.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오면서 양력의 채용 등으로 타나바타七夕 마츠리 자체가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27년에 몇몇 상인들에 의해 대규모적으로 타나바타 장식을 하게 되다가,  전쟁 때문에 다시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 1946년에 부활되어서 현재와 같은 형식으로 개최되게 되었다. 일본 전국의 타나바타 마츠리 대부분이 전후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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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목적으로 이 무렵에 시작되었고, 통산 개최 횟수가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한다.

사의 진행은, 8월 5일 밤이 전야제로 불꽃놀이가 개최된다. 8월 6일부터 8일까지가 본 마츠리로 3일 연속해 행해진다. 대규모의 장식이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고, 시 전체가 타나바타 일색의 기운으로 넘친다. 하지만 아키타의 칸토오竿燈나 아오모리의 네부타ねぶた와 같은 열기가 없고, 장식뿐인 마츠리로, 일부러 멀리서 찾아온 관광객들이 아쉬워하는 일면이 있다. 


■ 아와오도리阿波踊り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약 400년의 역사가 있고, 토쿠시마켄徳島県(구 아와노쿠니阿波国) 내의 각 지역에서 개최되는 본오도리盆踊り이다. 그 중에서도 토쿠시마시徳島市에서 개최하는 아와오도리阿波踊가 최대규모를 자랑한다.

아와오도리는 샤미센三味線, 타이코太鼓(큰북), 요코부에横笛(피리) 등의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춤추는 집단을 뜻하는 렌이 행진하면서 추는 춤을 말한다. 여성은 우아하게, 남성은 허리를 낮추어 호쾌하게 춤을 춘다.

‘에라이 얏챠, 에라이 얏챠, 요이요이요이요이, 오도루 아호니 미루 아호, 오나지 아호나라 오도라나 손’偉い奴ちゃ、偉い奴ちゃ、ヨイヨイヨイヨイ、踊る阿呆に見る阿呆、同じアホなら踊らな損이란 장단에 맞춰 경쾌하게 추는 춤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어깨를 들썩거리게 한다.

최근에는 토쿠시마徳島市 이외에서도 여름 이벤트로서 각지(특히 관동지방)에서 아와오도리가 개최되고 있고, 토쿠시마의 아와오도리의 렌(連)이 그 지도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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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카타博多 돈타쿠どんたく
카타 돈타쿠는 후쿠오카시福岡市에서 매년 5월 3,4일에 개최되는 마츠리이다. 돈타쿠라는 말은 일요일이란 뜻의 네덜란드어 Zondag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이 마츠리는 일본의 최대 연휴인 골덴위크에 개최되는 시기적인 이점도 있어, 일본의 마츠리 가운데 최고인 200만을 넘는 관중을 동원하는 유명한 마츠리로 정착하였다. 현재는 후쿠오카시・후쿠오카상공회의소・재단
 
법인 후쿠오카관광컨베이션뷰로가 주축인 ‘후쿠오카시민의 마츠리 진흥회’의 주최로 ‘후쿠오카시민의 마츠리 하카타돈타쿠 항구 마츠리’란 명칭으로 개최되고 있다.

이 마츠리는 주로 돈타쿠타이どんたく隊로 불리는 각종 그룹의 연무가 주축이 된다. 돈타쿠타이는 각종 단체나 기업, 학교, 타 도시의 관광PR 단체 등으로 구성된다. 기업의 돈타쿠타이는 단결력을 고양하는 등 신입사원 교육에 활용되고 있다.

5월 2일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후쿠오카 국제 센터에서 전야제가 개최되는데, 돈타쿠타이의 연무, 미스 후쿠오카의 선발, 게스트 가수의 콘서트 등이 행해진다. 5월 3일 오전 10시부터 베이사이드프레이스 하카타부두에서 개회 식전이 행해지고, 텐진天神지역과 하카타博多지역을 중심으로 시내 각 지역 약 30 곳에 설치된 연무대에서 각 돈타쿠타이에 의한 연무가 오후 9시까지 계속된다.


4. 일본의 이색적인 마츠리


■ 온바시라사이御柱祭

온바시라사이는 호랑이해와 원숭이해에 실시되는 7년 주기의 스와타이샤諏訪大社의 마츠리이다. 스와타이샤는 오곡풍요, 수렵・바람・물・농경의 신으로서 예부터 신앙되어져 왔고, 그것들을 기원하는 것이 온바시라사이御柱祭의 기원이 아닐까 하고 추측되어진다. 큰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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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바시라御柱)를 산 속에서 16개를 잘라내 나가노켄長野県 스와諏訪 지방의 4 지역(上社本宮・前宮, 下社秋宮・春宮)에 끌고 가, 각 社의 사방에 세워 神木으로 모시는 웅장한 마츠리이다. 특히 神木으로 모시고 난 뒤, 산위에서 온바시라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키오토시木落とし가 유명한데, 이 과정에서 많은 부상자가 속출한다.










■ 카나마라마츠리かなまら祭

 

카나카와켄神奈川県 카와사끼시川崎市에 있는 와카미야若宮 하치만구八幡宮 神社에서 매년 4월 첫째 일요일에 행하는 마츠리. 와카미야하치만구 경내에 있는 카나야마金山 神社는 남근을 상징하는 카나마라사마かなまら様를 모시는 신사로, 자손번영・부부화합・성병예방을 기원하는 신사로 유명하다.  카나마라마츠리는 에도江戸시대에 카와사키川崎의 기녀들이 성병예방을 위해 기원했던 것이 발단이 되어, 상업번성・자손번영・순산・부부화합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왔다. 에이즈가 만연하게 되자, 에이즈 예방 마츠리로 국제적으로도 알려져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또 여장한 남성이나 트렌스젠더(일본에서는 뉴하프라 칭한다)가 다수 참가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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