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뽀로札幌 유끼마츠리雪祭

삿뽀로 유끼마츠리는 매년 2월 초순에 삿뽀로札幌에서 개최되는 눈의 제전을 말한다. 눈으로 만든 크고 작은 조각들이 중심이었으나, 최근에는 얼음으로 만든 조각도 전시되고 있다. 일본 전국, 그리고 해외에서도 참가하는 팀이 많으며, 관광객도 거의 200만 명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유끼마츠리雪祭의 시작은 1950년에 삿뽀로 관광협회와 삿뽀로시의 주최로 개최된 것이 시초였다. 삿뽀로 시내의 중, 고교생을 중심으로 5, 6개의 눈 조각이 만들어진 단조로운 출발이었으나, 1954년부터 시민들이 참여하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삿뽀로 동계 올림픽이 개최된 1972년부터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해 1974년에는 해외에서도 참가하게 되었다. 그 후 외국 관광객도 점점 불어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삿뽀로 유끼마츠리에는 자위대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눈의 운반을 비롯하여, 눈 조각을 제작하는데 있어서도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형 눈 조각은 자위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해졌다. 하지만 시민단체 출신인 우에다 후미오上田文雄시장이 ‘시민 주체의 눈 축제’를 지향해 자위대의 협력을 극력 사양함으로써, 현재는 시청의 직원과 자원봉사대에 의해 유끼마츠리가 운영되고 있다.

 
 









■ 하다카마츠리裸祭り

하다카마츠리란 참가자가 훈도시 또는 훈도시와 한텐半纏 등 최소한의 의복을 입고(드물지만 전라도 있다) 참가하는 마츠리를 말한다.  

주로 한여름에 거의 벗은 모습으로 미코시御輿를 메는 타입과 한겨울에 물에 들어가 몸을 정결히 한 후, 실외에서 마츠리의 상징물을 쟁탈하는 타입의 두 종류가 있다. 참가자는 거의가 성인남자로, 훈도시를 입은 모습은 용맹스러움을 나타내나, 개중에는 소년 드물지만 소녀가 참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행사는 성인식이나 통과의례의 의미가 있다) 참고로, 마츠리에 있어서는 훈도시는 내의란 의식이 없고, 마츠리에서 입는 다른 의복과 같이 하나의 마츠리 의복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 켄카마츠리喧嘩祭り

내 중심가에서 미코시御輿나 단지리楽車가 격하게 부딪치는 켄카喧嘩(싸움)을 하는 마츠리를 말한다. 일본의 3대 켄카마츠리 중 하나인 이마리伊万里 톤텐톤마츠리トンテントン祭り는 사가켄佐賀県 이마리시伊万里市에서 매년 10월에 개최되는 마츠리로 단지리를 서로 부딪치는 모습이 장관이다. 또 에히메켄愛媛県 니이하마시新居浜市에서 실시되는 니이하마新居浜 타이코마츠리太鼓祭り도 역시 일본 3대 켄카마츠리의 하나인데, 매년 10월 16일부터 3일간 실시된다. 이 마츠리는 지역 경쟁의식을 바탕으로 각 지역이 수천만 엔이 드는 타이코다이太鼓台를 새로 건조한다고 한다. 마츠리의 클라이맥스는 역시 타이코다이太鼓台가 서로 부딪치는 켄카인데, 1960년대에는 매년 수명의 사망자가 날 정도로 격한 켄카가 속출하여, 시당국과 경찰이 켄카를 마츠리에서 배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록 비합법적인 것이나, 개최 당일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니이하마시의 전통이라고 한다. 폭 3.4m, 길이 11m, 무게가 2t이나 되는 타이코다이의 충돌은 한쪽의 타이코다이가 부서질 때까지 계속되는데, 한번 켄카가 시작되면 사람의 켄카로까지 발전하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5. 마츠리의 꽃, 불꽃놀이

 

■ 불꽃놀이의 기원

기원전 3세기의 중국에서 폭죽이 사용된 것이 기원이란 설도 있으나, 최초의 불꽃은 6세기 경 중국에서 화약이 발명된 시기와 거의 동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측되어진다. 그렇지만 초기의 불꽃은 적진에 쏘아 올려 화재를 일으키거나 적을 위협하는 등, 무기의 용도로 사용되어졌다고 한다. 

유럽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이후로, 초기의 것은 축포의 음을 크게 한다든지, 연기에 색을 내게 한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유럽의 주요 생산지는 이탈리아(당시는 동로마제국)로, 화약과 불꽃 제조가 활발하였다. 이 시대의 불꽃은 주로 왕족과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왕이 개최하는 행사에서 사용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 영국에서 불꽃의 기술이 대폭 진보된다. 1532년 찰스 5세는 왕실 군대의 불꽃 기사를 징용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재관식이나 왕실의 결혼식, 생일 등에 템즈강에서 수상 불꽃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17세기가 되면 폴란드나 스웨덴, 덴마크 등지에서 불꽃 학교가 설립되고, 체계적인 지식을 가진 전문적인 불꽃 기사가 집단이 형성되었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덴마크에서 기술자를 초대하여 딸인 엘리자베스의 결혼식 때 성대하게 불꽃놀이를 개최했다고 한다. 또 1672년에는 울리지 병기창에 불꽃 연구소가 설립되고, 1683년에는 불꽃에 관한 책이 간행되는 등 불꽃 기술은 점차 발전해 갔다.


■ 일본의 불꽃 역사

일본에서 불꽃이 제조된 것은 16세기 화약이 전해진 이후이다. 1741년에 만들어진『宮中秘策』에 의하면, 1613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江戸성에서 불꽃을 구경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불꽃이란 말이 나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다만 이보다 전인 1589년에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가 센다이仙台에서 불꽃을 즐겼다는 기록(『伊達家治家記録』)과 1582년 4월 14일 포르투칼 선교사가 불꽃을 쏘아 올렸다는 기록 등이 존재한다.

에도江戸 시대에 들어가자 세상이 평온해지고 전쟁이 없어지자, 그전에 화약을 제조하던 이들이 전업해 불꽃을 만들기 시작했다. 1648년에는 막부가 스미다隅田 강 이외에서는 불꽃을 금지한다는 방문을 붙였던 것으로 보아, 불꽃은 그 당시에도 인기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현존하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꽃 업자는 토오쿄오東京의 카기야鍵屋로 1659년에 초대 야헤에弥兵衛가 장난감 불꽃을 팔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대형불꽃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어 1717년에는 水神 마츠리에 불꽃을 쏘아 올리기도 했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들어와서는 서양에서 염산칼륨, 알루미늄 등의 새로운 약품이나 재료가 도입되어 그전에는 내지 못했던 색깔을 낼 수가 있었고, 밝기에서도 한층 더 진보된 불꽃을 제조할 수가 있었다.

순조롭게 발전하던 불꽃도 전쟁이 악화되자 정체기를 맞이하였다. 패전 후 1945년 9월에 나가노長野시의 스와諏訪 神社에서 불꽃을 쏘아 올렸으나, 다음달인 10월에 연합군 총사령부에 의해 화약제조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1946년 7월4일에는, 각지의 미군기지에서 일본 업자들이 미국독립기념일 축하 불꽃을 쏘아 올렸고, 전후 처음으로 불꽃놀이 대회로서는 1946년 9월 29일에 츠치우라土浦시에서 개최되었던 제 14회 전국불꽃놀이 경기대회가 시행되었다.


■ 일본의 유명한 불꽃놀이 대회


‣ 전국 불꽃놀이 경기대회

아키타켄秋田県 다이센시大仙市에서 8월 마지막 토요일에 개최. 약 15,000발을 쏘아 올리는 대형 대회로, 80회 이상의 역사가 있는 유명한 대회. 구경하는 인파는 약 70만으로 시내 중심부가 교통규제를 하고 신칸센을 증차시키는 등의 대응을 하나, 50km 떨어진 아키타秋田시까지 가는데 최대 5시간이 걸리는 등의 교통문제가 해결이 시급하다고 한다. TV에서는 NHK위성에서 생방송으로 방영되고 있다.

 
 











■ 츠치우라 전국 불꽃놀이 경기대회

이바라키겐茨城県 츠치우라시土浦市에서 매년 10월 첫째 주 토요일에 개최된다. 약 2만발을 쏘아 올리는 일본 최대 규모의 불꽃놀이 대회. 시즌이 끝을 맺고, 불꽃놀이 업자들의 내년 신 작품을 피로하는 경기대회인 만큼 관계자들의 관심도 집중하고, 더불어 약 100만 명의 관중이 운집해 성황을 이룬다. 

 
 





















6. 월별 일본 마츠리 편람


장소

마츠리이름/내용

연락처

1

静岡県引佐町

大分県豊後高田市

高知県夜須町‧夜須八幡宮

福島県会津坂下町

寺野ひよんどり

ホーランエンヤ

百手祭

大俵引き

053- 542- 1113

http://bungotakada.com/city/

0887- 54- 2121

http://www.town.aizubange.fukushima.jp/

2

島根県大社町

新潟県三条市

長崎市

大分県九重町

出雲大社福神祭

本成寺節分鬼踊り

長崎ランタンフェスティバル

九重氷の祭典

0853- 53- 3100

0256- 34- 5511

http://www.nagasaki- lantern.com/

http://www.coara.or.jp/~kokonoe/

3

青森県十和田湖町

群馬県伊香保温泉

福島県保原町

滋賀県近江八幡市

十和田湖冬物語

石段ひなまつり

つつこ引き祭り

左義長まつり

http://www.pref.aomori.jp/yuki/fuyu/index.html

http://www2.gunmanet.or.jp/ikaho/

024(576)4062

http://www5d.biglobe.ne.jp/~him8man/

4

宮城県白山神社

熊本県阿蘇郡9町村

滋賀県長浜市

岩手県水沢市

小迫祭り

阿蘇の火まつり

長浜曳山まつり

日高火防祭

0228- 42- 1113

http://www.aso.ne.jp/~koiki/himaturi2.htm

http://www.city.nagahama.shiga.jp/

0197- 24- 2111

5

京都市下鴨神社他

仙台市

京都市‧車折神社

高知県室戸市

葵祭

仙台‧青葉まつり

三船祭

御田祭

http://www.kyokanko.or.jp/

http://www.aoba- matsuri.com/

075- 861- 0039

0887- 22- 5142

6

京都府宇治市

岩手県盛岡市、滝沢村

札幌市

岩手県平泉町

県祭

チャグチャグ馬コ

北海道神宮例祭

毛越寺あやめまつり

http://www.kyoto- uji- kankou.or.jp/

019- 651- 4111

011- 611- 0261

http://www.motsuji.or.jp/

7

宮崎県西郷村

愛媛県城川町

新潟県村上市

石川県能都町

御田祭

どろんこ祭り

村上大祭

あばれ祭り

http://www.vill.saigo.miyazaki.jp/

http://www.town.shirokawa.ehime.jp/

http://www.mu- cci.or.jp/kanko/maturi.html

0768- 62- 2100

8

横浜市

福島市

兵庫県姫路市

盛岡市

神奈川新聞花火大会

福島わらじまつり

姫路お城まつり

盛岡さんさ踊り

http://www.kanagawa- np.co.jp/

024- 521- 3333

mailto:kankos1n@city.himeji.hyogo.jp

http://www.ccimorioka.or.jp/

9

富山県八尾町

岐阜県郡上郡八幡町

熊本市

群馬県伊香保町

おわら風の盆

郡上おどり

藤崎宮例大祭

伊香保まつり

http://www.town.yatsuo.toyama.jp/YATSUO/index.htm

http://gujo- hachiman.jp/

096- 343- 1543

http://www.town.ikaho.gunma.jp/ci/matsuri/index_matsuri.html

10

福島市飯坂町

長崎市‧諏訪神社

前橋市

埼玉県川越市

飯坂けんか祭り

長崎くんち

前橋まつり

川越まつり

024- 542- 4241

http://nagasaki- kunchi.com/

http://www.city.maebashi.gunma.jp/syoukai/kanko/maturi3.htm

http://www.city.kawagoe.saitama.jp/kawa05.htm

11

鹿児島市

神奈川県箱根町

佐賀市

大分県豊後高田市

おはら祭

箱根大名行列

佐賀バルーンフェスタ

若宮八幡秋季大祭(裸祭り)

http://www.city.kagoshima.kagoshima.jp/WebGuide/kago_kanko.nsf/

http://www.kankou.hakone.kanagawa.jp/index.html

http://www.city.saga.saga.jp/doc/burari.html

http://bungotakada.com/city/

12

和歌山県古座町

埼玉県秩父市

大分県別府市

大分県千歳村柴山

ねんねこ祭り

秩父夜祭

別府HANABIファンタジア

ひょうたん祭り

http://www2.cypress.ne.jp/koza/

http://www.chichibuji.gr.jp/

http://www.beppu- navi.jp/xmas/

0974- 37- 2111

Ⅱ. 일본의 영화


영화는 20세기에 들어와 커다란 발전을 이룬 표현수단으로, 오늘날은 예술이라 불릴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였다.(그림, 조각, 음악, 문학, 무용, 연극, 건축에 이어 제 8의 예술이라 불린다) 원래 영화라 함은 필름으로 촬영한 작품으로 극장 상연을 전제로 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디지털 기술의 진보에 따라, 디지털화된 영화도 존재하며, 극장이 아닌 TV상연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다. 

에디슨이 영사기를 발명한 3년 후, 바로 일본에도 영사기가 도입되었으니까, 일본 영화의 역사란 영화의 역사와 거의 같다고 할 정도로 긴 역사를 가진다. 긴 역사를 가진 만큼 작품의 수도, 또 작품의 완성도도 높다고 할 수 있는 일본 영화를 살펴본다.


1. 일본영화의 역사


■ 활동사진시대 - 1896~1918

 

‣ 영화의 시작 

에디슨은 1893년, 상자 속에서 전개되는 영상의 움직임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는 장치인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를 발명했다. 이 장치는 3년 뒤 1896년 11월 코오베神戸의 타카하시 신지高橋新治가 수입하여 황족인 코마츠노미야 아키히토小松宮彰仁에게 보여준 것이 당시의 신문 기사에 실렸는데, 이것이 최초라 말해진다. 

1897년 2월에는 이나하타 카츠타로稲畑勝太郎가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를 수입하여 오오사까大阪시 에비스바시戎橋의 극장에서 상연하여 호평을 얻었다. 이것이 일본에서의 첫 영화 상연이었다. 이어 3월에는 키네토스코프를 개량한 비타스코프(Vitascope)를 사용하여, 토오쿄오東京의 영화관에서 「전기 활동 대사진회」란 간판을 걸고 흥행에 성공하였다.

1899년 6월 20일 토오쿄오東京 카부키자歌舞伎座에서 「게이샤의 춤사위」芸者の手踊り란 제목으로 상
 
연을 하였는데, 이는 일본제작 제1호의 기록영화이었다. 같은 해 9월에 제작된 「피스톨강도 시미즈테이키치」稲妻強盗 清水定吉는 일본 극영화 제1호로 기록된다. 이 영화를 촬영한 아사노 시로浅野四郎가 일본 최초의 감독이었고, 이 영화의 주연인 요코야마 운페이横山運平가 일본 최초의 영화배우라 말해진다.


‣ 변사 

영화를 설명해 주는 사람으로서 1886년경, 슬라이드가 일본에서 유행했을 때 이미 설명자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영화가 공개된 시점에서 이미 관객은 변사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없었다. 변사는 한 편의 영화 이야기를 엮어 갈 뿐만 아니라, 퍼포먼스의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갔다. 영화의 상영속도를 자신의 이야기에 맞추어 자유롭게 조절하거나, 본래의 이야기를 고차원적으로 파악하여 비평하기도 했다.


■ 무성영화의 성숙 - 1920년대


‣ 대중예술로서의 발전 

 

일본영화가 무대극의 복사단계를 벗어나 본격적인 대중예술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닛카츠(日本活動写真株式会社, 줄여서 日活)가 발족한 데 이어 1920년에 쇼오치쿠松竹 키네마사가 설립되어 영화산업의 주축을 이루게 되면서부터였다. 닛카츠日活는 주로 모자의 이별이나 신분의 차이가 있는 남녀 간의 사랑, 정조를 잃은 소녀의 타락 등 눈물을 유도하는 멜로드라마가 중심이었다. 반면 쇼오치쿠松竹는 명랑하고 활발한 도시풍의 현대극이나 소시민적 행복을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했다. 닛카츠日活는 1913년 무코우지마向島 촬영소를 건설해, 스튜디오시대를 열었다.

한편 미조구찌 켄지溝口健二감독과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감독도 젊은 시절『동경행진곡』東京行進曲(1929)과『대학은 나왔지만』大学は出たけれど (1929)이란 무성영화 작품을 만들었는데, 이는 뒤에 세계적 평가를 받는 작품의 초석이 이때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 경향영화 

1923년의 관동대지진을 기점으로 1920년대 후반의 일본 지식층은 엄청난 공산주의 붐에 휩싸였다. 소련과 독일을 선구로 마르크스 ‧ 엥겔스 전집이 간행되고, 토오쿄오東京 번화가의 카페에서는 러시아풍 상의를 입은 청년들로 넘쳐났다. 이런 풍조는 이른바 경향영화라는 사회주의 풍조의 영화를 출현시키게 된다. 1929년 2월에는 일본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프로키노)가 창립되고,  우찌다 토무内田吐夢감독의 『산 인형』生ける人形, 미조구찌 켄지溝口健二감독의 『도회 교향곡』都会交響曲등의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나, 사회주의 운동의 탄압으로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 제 1의 황금 시대 - 1930년대

 

‣ 본격화된 토키

1931년에는 일본 최초의 발성(토키)영화인 고쇼 헤이노스케五所平之助 감독의 부자관계, 그리고 교외주택의 꿈과 행복을 그린 영화,『마담과 아내』マダムと女房가 제작되었다. 토키영화의 유행으로 변사, 악사 등의 토키영화에 대한 반대운동과 데모가 있었지만, 변사 대신 배우가 본격적인 직업으로서 대두되었으며 본격적인 토키영화시대가 열렸고,  순수문학을 영화로 만든 문예영화가 유행하였다.

 

‣ 3대 영화사 정립시대 

1937년에는 토오호오東宝영화사가 새로이 출범하여 닛카츠日活, 쇼오치쿠松竹와 더불어 3사 정립시대가 열렸다. 토오호오東宝는 ‘공공질서와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소재는 다루지 않는다’ 는 보수주의적 회사 PLC를 개칭해서 만든 회사이다. 회사이름의 변경과 함께 기존의 가족적, 봉건적, 인맥 위주의 영화에서 탈피하여 오페레타풍의 영화나 사회를 비판하는 영화를 제작했다. ‘닛카츠’, ‘쇼오치쿠’, ‘토오호오’의 3대 영화사 정립으로 일본영화계는 첫 황금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에 제작된 주요 작품으로는, 수입배급회사 東和商事의 카와키타 마사나가川喜多長政가 日独 합작영화인 이타미 만사쿠伊丹万作감독의「새로운 땅」新しき土등이 있다.


■ 암흑시대 - 1940년대


‣ 전쟁과 영화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중국 침략전쟁을 도발하고(1937), 이어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1941), 일본영화는 정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 들어가 침략전을 합리화하고 전의를 고취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더욱이 영화법(1939년 4월 5일 제정, 영화의 사전검열 등 국가가 직접 영화 내용에 관여하는 법률, 1945년 11월 폐지)의 제정으로, 자유로운 영화제작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화상연전에 문화영화의 상연이 강제되었으며, 또한 타이세이 요쿠산카이大政翼賛会의 요청에 의해, 영화상영전에 군가인 「愛国行進曲」등이 흐르게 되었다. 영화는 국책영화 내지는 군의 사기증진을 위한 영화 일색이었다. 예를 들면 하와이・말레이만 해전ハワイ・マレー沖海戦은 1941년 12월 8일의 진주만공격 및 12월 10일의 말레이만 승리를 그려,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1942년에 토오호오東宝가 제작하고 사단법인 영화배급사의 배급으로 공개된 전쟁・국책영화이었다.


‣ 암흑속의 빛 
 

국책사업으로 전쟁을 선전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그 사업으로 인해 훗날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기초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작가 세오 미츠요瀬尾光世에 의해 만들어진『모모타로오의 바다독수리』桃太郎の海鷲는 일본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영화로, 해군성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몇 년 뒤에 만들어진 『모모타로오 바다의 신병』桃太郎 海の神兵도 같은 성격의 작품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가 전부가 전쟁・국책 영화는 아니었다. 당국의 검열을 통과한 순수영화도 
 
제작되었는데, 토오호오東宝의 쿠로사와 아끼라黒澤明가 『스가따산시로오』姿三四郎,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恵介가 『꽃피는 항구』花咲く港 로 감독 데뷔를 하고 두 사람 모두 「국민영화장려상」을 수상하였다. 그 외에도, 이나가키 히로시稲垣浩 감독의『에도 최후의 날』江戸最後の日 (1941),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恵介 감독의『오오소네가의 아침』大曾根家の朝 (1945), 쿠로사와 아끼라黒澤明 감독의 『내 청춘에 후회란 없다』わが青春に悔なし(1946),『술취한 천사』醉いどれ天使  (1948), 이토오 다이스케伊藤大輔 감독의『대장』王将 (1948),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감독의 『셋집 신사일기』長屋紳士録 (1947),『만춘』晩春(1949), 이마이 타다시今井正 감독의『푸른 산맥』青い山脈  (1949) 등의 작품이 있다. 


■ 제 2의 황금시대 - 1950년대

1950년대는 일본 영화가 본격적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한 때로, 특히 유럽을 겨냥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1951년에 쿠로사와 아끼라黒澤明가 『라쇼오몽』羅生門 (1951)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으며, 같은 해에는 키노시타 케이스케木下恵에 의해 첫 컬러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가다』カルメン故郷に帰る가 제작되었다. 또한 비극에 처한 여인의 슬픔과 분노를 그린 미조구찌 켄지溝口健二의『사이카쿠 일대녀』西鶴一代女 (1952),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1953)와 독일 표현주의적 작품을 만들어 일본영화를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키누가사 테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지옥문』地獄門 (1954) 등이 국제영화제에서 잇달아 입상하자 일본영화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일본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된 이유는, 

첫째,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일본영화는 주로 근대화 이전의 일본을 무대로 했기 때문에 키모노와 사무라이의 등장이 필연적이었다. 이러한 점이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을 부추겼던 것이다.

둘째, 당시 유럽의 국제영화제의 비평가 사이에서는 작가주의를 중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는 빛을 보지 못했던 할리우드의 B급 감독에서부터 동양의 신인 감독이 공평하게 심사를 받을 수가 있었다.

셋째, 일부 감독과 다이에이의 제작자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처럼 아예 국제영화제 수상을 목표로 
 
하여 어떻게든 서양인들의 흥미를 끄는 작품을 많이 제작했기 때문이다. 키누가사 테이노스케衣笠貞之助의 『지옥문』地獄門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그리고 나가타永田는 동남아시아를 시장으로 삼기 위해 미조구치溝口감독의 홍콩과의 합작영화인 『양귀비』楊貴妃를 제작하기도 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일본 영화는 세계의 관심을 끌었으며, 일본 국내에 있어서도 1950년대는 정점에 도달하였다. 또한 쿠로사와黒澤, 오즈小津, 츠부라야円谷 등의 작품은, 후일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Allan Spielberg),프랑시스 포드 콥포라(Fracis Ford Coppola) 등, 해외의 영화감독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고지라』ゴジラ와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는 영화계에 혁명을 이루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 쇠퇴와 정체의 시기 - 196, 70년대 
 

1960년은 일본영화 제작 편수가 574편에 이르러 일본 영화사상 최고를 기록하며 일본영화에 있어 황금기의 피크를 맞이했다. 하지만 1961년에 신토오호오新東宝가 제작중지(실질적인 도산)를 하는 등, 붕괴의 조짐은 서서히 보이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후반이 되자, TV의 보급 등에 따라 점차 일본영화는 집중력과 수용력을 잃고, 축소재생산을 반복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발전과 상승의 시대로, 이 시대의 종식을 고한 것이 1970년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할복사건과 1972년 연합적군 린치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은 급속히 쇠퇴되고, 

일본사회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정착되어 갔다. 문화 예술 방면에서도 실험적이며 경이적인 시도는 퇴색되었으며, 비평에서도 냉소적인 저회취미, 즉 사상이나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세상과 인생을 여유롭게 조망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성향은 영화계에도 바로 파급되어, 영화계는 큰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 텔레비전의 보급

1953년부터 실시된 텔레비전 방송에 밀려 일본영화는 점차 퇴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각 영화사는 계속해서 영화사업을 위해 분발했다. 도시 대학생이나 샐러리맨의 밝고도 소시민적인 세계를 영화한 ‘토오호오東宝’, 지방출신 주인공의 성공담 중심의 ‘다이에이大映’, 인정미 넘치는 도쿄 서민들의 삶을 주로 제작한  ‘닛카츠日活’와 같은 제작회사의 분발이 그것이다. 

 

‣ 일본영화의 누벨바그 

1960년대는 쇼오치쿠松竹의 조감독이었던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등장으로 일본영화의 누벨바그, 즉 새로운 물결이 인 시기였다. 오오시마大島는 학창시절부터 좌익사상에 눈을 떴고 학생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러한 경험들은 그의 작품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작품을 감독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재일동포 소년의 살인사건 실화를 영화화한 『교수형』絞死刑(1968) 등은 ‘차별’이라는 문제를 화두로 내건 문제작으로서 영화사상 화제로 남는 작품이기도 하다.


‣ 야쿠자영화의 전성시대
 

각 영화사들이 활로를 찾기 위해 ‘야쿠자 영화’를 양산했다. 당시의 야쿠자 영화는 시대극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그대로 답습한 형태를 보였다. 변화를 준 것은 등장하는 인물이 사무라이에서 야쿠자로 변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점점 이 형태의 영화도 하나의 영화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야쿠자 조직을 선한 악당과 악한 악당이라는 이분법으로 설정하여 선한 야쿠자가 악한 야쿠자의 비열한 행위를 처단한다는 기본 패턴이 반복되었다. 거기에 의리의 세계를 살아가는 야쿠자, 그 야쿠자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여인, 여인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의와 의리를 위해 말없이 사라지는 주인공, BGM으로 잔잔히 흐르는 엔카는 필수적 요소였다.

대표적인 영화로는 전후 히로시마広島에서 실제로 일어난 야쿠자의 항쟁을 제재로 1973년 토오에이

에서 제작한 후카사쿠 킨지深作欣二 감독, 스가와라 분타菅原文太 주연의 진기나끼타타카이仁義なき戦い시리즈가 있다.


‣ 핑크영화에 의한 활로 모색 

신토오호오新東宝나 오오쿠라大蔵와 같은 영화사들은 남녀의 섹스장면을 넣은 에로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경영난에 봉착한 대기업의 제작사들도 기구를 축소하고 ‘핑크영화’ 제작에 나섰다. 닛카츠日活는 다년간 쌓아온 노하우와 기술진을 토대로 종래의 핑크영화와는 다른 고품격의 작품을 만들었다.  ‘닛카츠 로망 포르노’日活ロマンポルノ라는 이름을 붙여 차별화를 꾀한 것이 성공하였고, 이로 인해 닛카츠日活는 재기하게 된다. 한때 일본영화를 주름 잡았던 제작사들 마저 로망 포르노 영화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몰락하는 일본 영화산업의 모습을 상징하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 스튜디오 시스템의 해체 - 1980년대 


‣ 대형 영화사의 몰락

1980년대 일본 영화의 특징은, 스튜디오 시스템이 흔들려 유명무실해지면서 영화의 제작 ‧ 배급 ‧ 흥행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1961년에 6개의 영화사에서 520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이 스튜디오 시스템 제도는, 25년 후 인 1986년에 이르자 3개의 영화사에서 고작 24편 정도밖에 제작하지 못할 정도로 매우 쇠약해졌다. 당연히 블록 부킹 방식, 즉 한 작품을 전국의 전속 직영 영화관에서 같은 시기에 개봉하는 방식은 사실상 어려워져, 대형 영화사가 대작만으로 영화계를 장악해 나가던 종래의 방식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 일본애니메이션의 태동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의 등장으로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바람계곡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 (1984),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 (1986),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1988), 『마녀 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 1989) 등은 애니메이션이 어린이들의 전용물이 아니라 어른들까지 공유할 수 있는 예술임을 보여주고 있다. 에콜로지와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고 실사영화에서는 촬영하기 힘든 비행장면을 자주 넣어 유토피아적인 감각을 자아내게 했다.


‣ 1960년대 거장들의 복귀와 신인의 등장 

1960년대 눈부신 활약을 보이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침묵을 지키거나 침체기를 맞이했던 감독들이 재기하기 시작했다. 쿠로사와黒澤는『카게무샤』影武者 (1980)와 『난』( 1985)이라는 대작을 발표함으로써 서사시적 스타일을 완벽히 소화해 내며 재기에 성공하였다. 또, 1961년 『돼지와 군함』豚と軍艦,『일본곤충기』にっぽん昆虫記,『붉은 살의』赤い殺意등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한때는 기획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 위궤양을 앓으며 당장 내일 양식을 걱정할 정도로 극빈생활을 겪은 이마무라 쇼오헤이今村昌平 감독은, 1983년 『나라야마부시코오』楢山節考를 제작하여, 칸느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한다.  그는 『우나기』うなぎ(1997)로 또 한번 칸느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여, 일본 영화계를 놀라게 한다. 

60년대 일본영화의 누벨바그의 기수였던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도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1983)를 제작하여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 작품은 칸느영화제에서 이마무라감독의 『나라야마부시코오』와 끝까지 경합하였으나, 아쉽게 수상을 하지 못하였다.

 
 
 










한편 신인감독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다.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
 
 
는 1983년 마츠다 유우사쿠松田優作 주연의『가족게임』家族ゲーム을 발표한다. 전통적인 가족상의 변화라는 주제는 많은 감독들이 다루었는데 모리타森田가 선택한 방법은 공간의 활용과 음향의 사용이었다. 영화에 나오는 식사장면이 대표적이다. 일자형의 식탁에 가족들이 앉아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식사를 한다. 대사도 거의 없다.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서로 얘기하지 않는다. 사토오타다오佐藤忠男는 이 식사 장면이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의 영화에 나오는 식사장면을 변형시킨 것으로 과거의 가족과 현대의 가족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오즈小津의 가족드라마는 식사장면이 많고 구성원과의 화합을 서로 마주보는 식사장면을 통해 그린 데 반해,『가족게임』은 정반대라는 얘기다. 공간의 구성과 헬리콥터의 소음과 같은 음향의 사용을 통해 영화에 나오는 도시는 현실을 벗어난 공간을 설정하였다. 이 영화는 그의 출세작이 되며, 신세대의 귀재라는 칭호와 함께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85년에 다시 마츠다 유우사쿠松田優作를 주연으로 캐스팅하여, 나츠메 소오세끼夏目漱石 원작의 『소레까라』それから를 제작하였다. 원작에 충실한 문예적인 영화로 영상미가 돋보이는 수작이란 
 
평이었지만, 흥행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가족게임』에서 아버지 역을 맡아 호연했던 이타미 쥬우조오伊丹十三는 1984년『장례식』お葬式에서 영화감독으로 성공적으로 데뷔를 한다. 이 작품은 일본국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일본아카데미상을 비롯해 30개를 넘는 상을 수상했다. 2번째 부인인 미야모토노부꼬宮本信子의 아버지의 장례식을 모델로 불과 1주일 만에 시나리오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 뒤도 식욕과 성욕이 미분화된 인간 군상을 희극적으로 묘사한 『민들레』タンポポ(1985), 국세국 사찰부, 통칭 마루사의 철저한 취재를 바탕으로 제작한 『마루사의 여자』マルサの女 
 
(1987), 또 야쿠자의 민사개입 폭력과 항쟁하는 여변호사를 그린 『민사폭력의 여자』ミンボーの女 (1991)등, 일본사회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한편, 엔터테이먼트성이 풍부한 영화들을 제작하였다. 

『민사폭력의 여자』를 공개한 직후에 자택 부근에서 칼을 든 괴한 5명에게 습격을 당해, 얼굴 등 전치 3개월의 중상을 입기도 하고, 우익단체의 괴한으로부터 영화관 스크린을 난자당하는 일도 일어났지만, ‘나는 항복하지 않는다, 영화로 자유를 관철 한다’고 선언을 하며, 1997년에 『마루타이의 여자』マルタイの女에서 영화화했다. 1997년 12월 20일 사진 주간지 Flash에 불륜의혹의 기사가 실린 것에 대해,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 한다’란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했다. 친구이자 제매인 오오에 켄자부로大江健三郎의 소설『토리카에코』取り替え子에 이타미伊丹를 연상시키는 인물이 등장해 화제가 되었다.


■ 침체일로인가 ? 제2의 전성기인가 ?  - 1990년대 

‘볼 만한 일본 영화가 없다’, ‘일본 영화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비관론과, 슈퍼웨이브란 찬사를 받으며 등장한 신인감독들과 영화계와는 다른 길을 걷다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이업종감독들의 활약 등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낙관론이 공존하는 1990년대의 일본 영화계를 살펴본다.

‣ 영화계의 거품 붕괴와 비관론

90년대의 일본은 80년대 후반에 버블로 인한 호경기가 끝나고, 공전의 불경기가 계속되었다. 기업들은 일제히 경영 규모를 축소했으며, 실업률은 증가했다. 불경기는 우선적으로 지금까지 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던 관련 기업의 퇴진을 의미했다. 세이부 유통 그룹은 영화관과 배급, 제작 회사를 폐쇄하고 문화 사업을 포기했다. 이와 같은 버블의 직격탄을 맞은 영화계는, 영화를 기획하던 감독, 제작자들이 영화제작을 포기하는 사태까지 이어져, 그렇지 않아도 비관론이 팽배하던 일본 영화계에 찬물을 끼얹는 사태로 진전되었다. 

비관론을 주장하던 이들은, 그 이유로 

첫째, TV를 들고 있다. 60년대 말, 70년대에도 영화계는 TV에 의해 찬 서리를 맞은 적이 있었지만, 90년대에도 TV의 드라마로 날마다 인기배우를 볼 수 있어서 굳이 영화관을 찾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 늘었다는 것이다.
둘째, 영화 소재의 고갈로 TV 드라마나 소설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아져, 신선미가 떨어져 영화관을 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관객을 끌만한 흡입력 있는 작품이 없어서, 관객이 영화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진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셋째, 영화계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를 들고 있다. 소수 메이저영화사의 배급 독점으로 인한 비싼 입장료가 관객으로 하여금 극장을 멀리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 영화 제작 시스템의 변화, 즉 메이저 시스템 영화의 소멸이 일본영화다운 일본영화가 없어지게 했다고 주장한다. 

비관론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은 주장을 할뿐이지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는 푸념에 지나지 않으며, 진정 영화계를 생각하고 사랑한다면 불평만이 아닌 미래를 위한 대책과 행동이 필요하지 않을까하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들이 불만을 늘어놓을 때에도 흥행이 되는 영화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주목을 받는 영화가 계속 나왔다는 점이다.

‣ 낙관론
• 1990년대 ‘슈퍼웨이브’의 등장

1990년대는 예술성과 오락성을 겸비하며 일본 영화 제2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신인 감독이 대거 등장했다. 이처럼 재능 있는 감독의 데뷔는 1990년 2월, 여섯 명의 프로듀서로 구성된 기획집단 아고라(AGORA)의 출현과 관계가 깊다. 여고 연극부를 무대로 여고생의 우정과 심리를 구석구석까지 충실히 그려낸 나카하라 슌中原俊의『벚꽃 동산』櫻の園은 키네마 준보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서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독점했다. 


• 타 업종 감독의 등장

지명도 있는 사람을 동원해 흥행을 보장받으려는 기획. 영화관에 가지 않는 관객을 끌어 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영화의 질이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여론도 높다.

• 국제영화제에서의 주목 

『원더풀 라이프』의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감독은, 『EUREKA』로 칸느 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 연맹상을, 아오야마 신지青山真治감독은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로 최우수 남우상(야기라 유우야柳楽優弥)을 받는 등 잇따라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을 받는가 하면, 스오 마사유끼周防正行의『쉘 위 댄스』, 오시이 마모루押井守의 『공각기동대』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성공을 거두어, 해외에서의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 재패니메이션이라는 문화권력 

일본애니메이션은 단순한 일본의 문화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까지 바꿀 수 있는 ‘문화권력’이 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는 일본애니메이션이 TV애니메이션 시장을 독점해 버렸고 일본애니메이션을 숭배하는 오타쿠들이 속출했으며 비디오 시장을 석권했다. 일본애니메이션 전용 극장까지 출현한 것은 물론 애니메이션에 관한 단행본과 월간지들이 경쟁적으로 출간되고 있다. 또 팬클럽이 결성되거나 OTACON과 같은 애니메이션과 만화 팬들의 국제회의도 자주 개최될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나 일본문화 워크숍에 참여하는 젊은이들도 많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아시아와 유럽, 미국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커다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작품성’ 때문이다.


‣ 1990년대의 작품

아직 버블의 잔영이 남아있던 1990년, 카도카와角川문고의 자회사격인 카도카와角川 영화사가 의욕적
 
 
 
으로 만든 영화로, 오너인 카도카와 하루키角川春樹가 직접 진두지휘를 하며 메가폰을 잡아 화제가 된 『하늘과 땅』天と地と이 90년대의 서막을 열었다. 주인공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 역에는 당시 가장 인기가 있는 기대주 와타나베 켄渡辺謙을 발탁해서, 거액의 제작비를 투입하여 캐나다에서 대규모 로케를 감행하는 등 의욕적 출발을 하였으나, 와타나베 켄渡辺謙이 촬영 도중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쓰러져 도중에 대역으로 오디션을 통해 선발해 영화를 완성하였으나, 작품의 평가는 기대와는 달리 냉혹하였다. 하지만, 화제가 된 작품으로 관객의 기대, 영화사의 홍보 등을 통해 아직까지 일본 영화 역대 흥행기록 7위에 랭크되고 있는 만큼 당시 흥행에서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1991년은 이렇다할 작품이 없는 가운데, 이업종 출신의 두 감독, 키타노 타케시北野武와 타케나카 나오토竹中直人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와 『무능한 사람』無能の人으로 주목을 받았다.

1992년은 스오 마사유끼周防正行의 졸업을 위해 학점 교환을 조건으로 폐부 직전의 스모부에 들어가게 된 대학생의 분투를 코믹하게 그린 코메디 영화,『으랏챠챠 스모부』シコふんじゃった가 화제를 불러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주연을 한 모토키 마사히로本木雅弘는 블루리본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 자체도 일본의 영화상을 독점하였다.

1993년은 비교적 일본 영화가 선전한 해이기도 하였다. 쿠로사와黒澤 감독의 마지막 작품,『아직 멀었어』まあだだよ를 비롯하여, 최양일 감독의 『달은 어디에 떠있나』月は
 
どっちに出ている
, 타키타 요오지로滝田洋二郎감독의 『우리들은 모두 살아있다』僕らはみんな生きている가 개봉되며 화제를 모았다.

1995년에는 이와이 슌지岩井俊二감독의 『Love Letter』가 주목을 받았다.

1996년에는 스오 마사유끼周防正行의『쉘 위 댄스』,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의 『봄』, 키타노 타케시北野武의 『키즈 리턴』등이 각광을 받았다.

1997년에는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감독, 와타나베쥰이치渡辺淳一 원작, 야쿠
 
쇼 코오지役所広司, 쿠로키 히토미黒木瞳 주연의『失楽園』이 화제를 불러 모았으며, 이마무라 쇼오헤이今村昌平 감독의 『장어』うなぎ가 칸느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였으며, 하라다 마사토原田眞人 감독의 『바운스 ko GALS』バウンス ko GALS과, 이타미 쥬우조오伊丹十三 감독의 『마루타이의 여자』マルタイの女가 분전을 하였다.

1998년은 키타노 타케시北野武의 『HANA- BI』가 영화가를 석권하였다.

1999년은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고핫토』御法度, 후루하타 야스오降旗康男감독의 『철도원』鉄道員이 흥행에 성공을 하며 개봉되었다.


■ 최근 일본 영화계 동향  - 2000년대 이후

현재 일본 영화시장 규모는 미국, 독일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인 가운데, 2000년대 이후에는 지금의 두 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최근 전반적인 일본 영화계의 침체 속에서도 영화관수는 증가 추세인데, 멀티플렉스 건립 붐에 따른 스크린수 증가로 영화산업 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가운데, 오늘의 일본 영화를 규정하는 '쇠퇴' 혹은 '혼돈 시대의 전환기'라는 표현은 많은 공감을 얻고 있으며, 이제 일본 영화의 국제화를 선도했던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쿠로사와 아끼라黒澤明' 감독 등의 시대극들이 서구인의 취향에 긍정적으로 반영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는 견해 역시 일반적인 추세이다. 시대극의 쇠퇴 요인은 일본의 영화 산업이 막대한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시대극보다는 현대극 장르에 치중함으로써 경영 안정을 도모한다는 점도 있지만, 현재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봉건 시대에 대한 향수나 미련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영화의 산업적 퇴조와 질적 하락에 대한 우려 또한 계속되고 있지만, 1990년대의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 독립 영화 집단의 활성화, 그리고 국제화를 지향하는 기업들의 영화 산업 진출 등이 앞으로 일본 영화의 전망을 밝게 해주고 있다. 오늘날 일본 영화 산업계는 애니메이션 장르로 매년 히트작을 창출해 내고 있지만, 일반 극영화의 경우 미국식 블록버스터 수준에 달하는 영화의 부재, 영화 전문 스타 시스템의 비활성화, 만능 탤런트형 TV 드라마의 강세, 홈비디오의 보급, 메이저사의 자체 제작 부진 등으로 인해 전반적인 침체 수준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도 하다





2.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


■ 쿠로사와 아키라黒澤明

 

‣ 쿠로사와黒澤 감독의 탄생

 쿠로사와黒澤는 1910년 동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육군체육교관으로, 4남4녀의 막내였다. 케이카京華 중학 졸업 후, 프롤레타리아 미술연구소에 다녔다. 쿠로사와의 콘테 실력은 유명한데, 二科展에도 입선할 정도로 화가로서의 수행을 한 사람이기에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당시 형이 영화 변사를 하고 있어, 형의 신분증으로 영화를 공짜로 보고 다녔다고 한다. (이 형은 나중에 이즈伊豆에서 자살을 하고 만다.) 그리고 PCL(토오호오東宝의 전신)에 시험을 봐, 조감독으로 입사를 하여, 1942년 『스가타 산시로오』姿三四郎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된다. 당시는 전시하의 상황이라 심사가 엄격했으며, 이 작품도 감독법에 의한 감독 등록시험의 대상이었다. 그 때의 심사위원 중의 한 명인 쇼오치쿠松竹의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감독은, 후일 이 시험에 대해  ‘백점 만점에 백이십 점’이었다고 회상을 했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에 『긴레이노 하테』銀嶺の果て(은빛 봉우리의 끝, 1957년 토오호오東宝)가 있다. 
 
사실 이 작품은 쿠로사와의 작품이 아니다. 입사동기생이었던 절친한 친구 타니구찌 센키치谷口千吉의 첫 감독 작품인데, 쿠로사와가 원작・각본을 적었고, 시무라 타카시志村喬, 미후네 토시로오三船敏郎, 코스기 요시오小杉義男란, 나중에 쿠로사와 패밀리라 불렸던 명배우들이 출연한 영화란 점에서 쿠로사와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 작품이 중요한 점은 「쿠로사와黒澤와 미후네三船」라는 세기의 해후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3명의 은행 강도가 은빛 찬란한 알프스에 도주, 그 극한 상황에서 자중지란을 일으킨다는 다이내믹한 스토리 속에서 좌중을 압도할 만한 연기를 보여준 이가 젊은 시절의 미후네三船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작품이 『요이도레 텐시』醉いどれ天使 (술 취한 천사 1948)였다. 쿠로사와 작품에 미후네三船가 첫 주연을 한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이후 쿠로사와黒澤・미후네三船 콤비는 15작품이나 같이 했다. 여기에 또 하나, 「미후네三船와 시무라志村」라는 명콤비가 탄생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폐병을 앓고 있는 마을 건달 마츠나가松永(미후네三船), 의사로서 그를 구하고자 하는 사나다真田(시무라志村), 쿠로사와 작품의 전형이 되는 대비의 구도가 이미 여기에서 구축되었다.


‣ 세계의 쿠로사와로

2명의 뛰어난 배우를 얻은 쿠로사와는,『시즈카나루켓토』静かなる決闘(조
 
용한 결투, 1949・타이에이大映),『노라이누』野良犬(들개, 1949・신토오호오新東宝),『스캔들』醜聞(スキャンダル)(1950・쇼오치쿠松竹)라는「미후네三船와 시무라志村」콤비 작을 계속하여 발표한다. 그리고 1951년 9월, 『라쇼오몽』羅生門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금사자상(그랑프리)을 수상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라쇼오몽』에서 쿠로사와는 여러 가지의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아프리카 탐험 영화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질주하는 카메라 워커’, 소방차 3대에서 뿌렸다고 하는 ‘먹물 탄 비’, 그리고 화제가 되었던 것이 ‘태양을 향해 직접 카메라를 비추는’ 수법이었다. 태양을 촬영한다는 것은 필름이 탄다고 오랫동안 터부시 되어왔었는데, 쿠로사와가 세계 최초로 성공을 시켰다. 이후, 전 세계에서 이 수법이 유행을 하였다.

 쿠로사와의 실험은 기술적인 면만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않은 채 끝나버린다. 한 무사가 살인을 당했다. 도적, 무사의 아내, 나무꾼 등이 등장하여 서로 자신이 죽였다고 우기는데, 대체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알 수가 없다. 아쿠타가와 류우노스케芥川龍之介의 「야부노나까」藪の中(덤불 속)를 각색한 이 작품은, 관객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혼자 질주한 후 끝나버린다. 이 전개는 마치 유럽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아, 해외 특히 유럽에서 찬사 받는 것도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라쇼오몽』은 베니스에 그치지 않고, 1952년 아카데미 최우수외국영화상도 수상했다. 토오호오東宝


‣ 절정기

이후 약 15년간에 걸쳐, 쿠로사와는 절정기를 맞이한다. 1952년에 ‘삶은 짧다, 사랑을 하거라 처자여’란 대사로 잘 알려진 명작 『이키루』生きる(살다, 토오호오東宝), 1954년은 최고걸작이라 불리는『시찌닌노 사무라이』七人の侍(7인의 사무라이, 토오호오東宝), 1957년에는 세익스피어의「맥베스」를 전국시대의 무대로 바꾸어 번안한『쿠모노스죠오』蜘蛛巣城(거미성), 같은 해 고리키의 『돈조코』どん底(밑바닥)를 에도江戶시대로 바꾸어 번안하는 등 의욕적인 활동을 펼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61년에는 인기를 끌었던 오락 활극『요오진보오』用心棒(보디가드, 토오호오東宝), 63년에는 스릴 넘치는 현대극 『텐코쿠토지고쿠』天国と地獄(천국과 지옥, 토오호오東宝)으로 영화팬들을 매료시켰으며, 1965년에는 다시 시대극 『아까히게』赤ひげ(붉은 수염)에서 본령을 발휘했다. 여기까지는 순조로웠다. 
그런데, 1967부터 1969년에 걸친 미국 20세기 폭스사와의 합작, 『도라・도라・도라』トラ・トラ・トラ!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쿠로사와는 진주만공격을 그린 이 작품에 일본 측 감독으로서 참가했다. 그러나 촬
 
영은 곤경에 빠졌다. 여러 가지 문제점이 생긴 것이었다.

우선은 캐스팅. 전문 배우가 아닌 회사 사장 등의 일반인을 기용한 대담한 캐스팅은 주위의 배우들, 특히 절친한 미후네三船조차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또한 제작비가 싸게 든다고 사용한 토오에이東映 쿄오토京都 촬영소도 문제가 되었다. 영화제작에 있어서는 천황이라 불리며 완벽주의를 추구했던 쿠로사와에게는, 사무라이 영화로 돈벌이만 생각하는 토오에이東映의 제작 환경이 맞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마찰은 미국 측 20세기 폭스사와도 마찬가지여서, 결국 쿠로사와는 도중하차를 하고 말았다. 쿠로사와를 대신하여 일본 측 감독은 마스다 토시오升田利雄, 후카사쿠 킨지深作欣二가 맡았다.

이때의 강판의 이유는 쿠로사와의 노이로제 때문이란 보도가 나왔다. 이 건에 관해서는 계약서상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보험회사로부터 손해배상을 받는다.’란 조항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던 쿠로사와프로덕션이 일부러 쿠로사와를 노이로제로 몰고 갔다란 설도 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2년 뒤의 1971년 12월 22일, 쿠로사와는 자택의 목욕탕에서 목 등을 칼로 그어 자살을 기도한 사건이 일어났다. 


‣ 70년대 이후

왜 자살을 기도 하였는가? 그 원인으로 일본영화의 쇠퇴를 드는 이도 있다. 70년대에 들어 영화인구는 격감하여 전성기의 ⅕ 까지 감소하는 상황이었다. 자살 전날에는 『라쇼오몽』을 찍은 명문, 다이에이大映가 도산을 하였다. 그리고 『도라・도라・도라』문제로 쿠로사와는 심신이 피폐되어 있었다. 

목숨을 건진 쿠로사와는 이전과는 달리 템포를 늦추어 영화를 만들었다. 
 
1975년에 5년 만에 신작『데루스・우자라』(러시아와의 합작)를 만들고, 1980년에는 칸느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품인 『카게무샤』影武者(토오호오東宝)를 만들었다. 이후 5년 간격으로 신작을 발표하여, 1985년 『난』, 1990년 『꿈』, 1991년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1993년의『아직 멀었어』まあだだよ를 마지막으로 1998년 9월 6일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 오오시마 나기사 大島渚


‣ 오오시마大島 감독의 탄생
 

쿄오토京都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 쿄오토 학생연맹 위원장을 역임한 것에 의해 그의 인생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이노키 마사미치猪木正道 교수를 경애한 탓도 있어, 학문의 길을 걷고자 법학부 조교 시험을 응시하나, 과거 경력이 문제가 되어 불합격 처리된다. 이에 오오시마大島는 졸업 후 쇼오치쿠松竹에 입사하게 된다. 1959년에 『사랑과 희망의 거리』愛と希望の街로 감독 데뷔 후, 60년에『청춘 참혹이야기』青春残酷物語『태양의 묘지』太陽の墓場 등이 연이어 히트하며 쇼오치쿠松竹 누벨바그의 기수가 된다.

 

‣ 독립제작회사 「創造社」창설

日米 안보조약의 개정・비준에 반대하는 안보투쟁을 제재로 한 작품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1960)를 쇼오치쿠松竹가 오오시마大島와 의논 없이 흥행부진을 이유로 상영 중지하는데, 이를 항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회사를 그만둔다. 그 후 배우 토우라 록코오戸浦六宏, 각본가 타무라 타케시田村孟 등과 영화제작회사 「創造社」를 창설한다.

『백주의 토오리마』白昼の通り魔(1966)『닌자부게이쵸오』忍者武芸帳(1967)『교수형』絞死刑(1968)『신쥬쿠도둑 일기』新宿泥棒日記(1969)등 정치색과 시사성을 겸비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해 국내외에 인지도가 높아졌지만, 『여름의 여동생』夏の妹(1972)을 마지막 작품으로 창조사는 해산되고, 『아이노 코리다』愛のコリーダ(한국에서는 감각의 제국이란 제목으로 상연되었다.) 제작까지 자금을 모으기 위해 TV 출연 등 동분서주한다.


‣ 『아이노 코리다』愛のコリーダ
 

본 국내에서 초기 작품부터 주목을 받았고, 쇼오치쿠 누벨바그 기수로 불렸지만, 『아이노 코리다』라는 작품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외국에서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1936년에 실제로 일어났었던 아베 사다阿部定 사건을 제재로 남녀의 성적 집착과 궁극의 사랑을 그린 도발적인 이 작품에 의해 오오시마大島는 부동의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로사와黒澤의 휴머니즘, 그리고 검열제도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식에서 하드코어 포르노그라피에 경사한 오오시마大島는, 공권력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일・프 합작이란 형식을 취해 촬영이 끝난 필름을 프랑스에 직송해서 현상과 편집 작업을 했다. 그러나 영화윤리위원회의 개입으로 일본 공개에서는 작품의 의미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대폭 커트된 채로 상영되었다. 당시 이 영화의 오리지널 버전을 보려고, 프랑스까지 가는 투어가 생길 정도로 이 영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다. 오오시마大島는 이 영화의 외설 문제로 오랜 기간 동안 재판이 계속하여 결국 승소를 하였으나, 여전히 

일본 국내에서는 오리지널 버전을 관람할 수가 없다.

『아이노 코리다』에 의해 확고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오오시마大島는 『사랑의 망령』愛の亡霊(1978),『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 (1983),『맥스, 몽・아무르』Max mon amour (1986)등 외국자본 내지는 해외에서의 공개를 전제로 한 작품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다.

 
 
 







‣ 감독 오오시마大島, 인간 오오시마大島

오오시마大島는, 감독・연출가로서의 능력뿐 아니라 연기자의 자질을 간파하
 
는 능력도 탁월했다. 코미디언으로서만 알려졌던 키타노 타케시北野武를 ‘그가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다’라며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에서 과잉충성을 하는 하사관이란 중요한 역할에 발탁한 일은 유명한 얘기이고, 그 외에도 『동반자살 일본의 여름』無理心中日本の夏사쿠라이 케이꼬桜井啓子, 『日本春歌考』의 아라키 이치로荒木一郎, 『신쥬쿠 도둑 일기』新宿泥棒日記의요코오 타다노리横尾忠則, 『여름의 여동생』夏の妹의 쿠리타 히로미栗田ひろみ, 『전장의 메리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사카모토 류우이찌坂本龍一 등, 배우를 본업으로 하지 않는 인물이나, 거의 일반인에 가까운 신인배우를 기용하여 성공시킨 점은 놀라운 그의 업적이었다.

TV의 코멘테이터로서도 활약하였는데, 격정형의 그는 한국의 문화인과의 대담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폭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오오시마大島 자신의 생일 파티에서 게스트로 출연 한 작가 노사카 아키유끼野坂昭如와 취재 중이던 TV 카메라 앞에서 축사의 순번을 두고 치고받는 싸움을 한 적도 있었다. 후에 둘은 반성문을 주고받으며 화해를 했다.

안보조약반대, 미군철퇴를 주장하는 좌익 성향이 있는가 하면, 보수계의 대가인 대학시절의 은사 이노키 마사미찌猪木正道 교수와의 친분이 있는, 한마디로 그의 성향은 좌익・우익, 혁신・보수라고 하는 유형화된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이라 하겠다.


‣ 90년대 이후
 

오오시마大島는 1996년1월 하순, 근 10년만의 영화제작발표를 하고 얼마 후에, 런던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한때 중태에 빠졌다. 하지만 3년간에 걸친 요양생활로 회복한 그는 『고핫토』御法度 (1999)를 제작하여 비록 칸느영화제에서 수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많은 비평가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 영화에는 키타노 타케시北野武와 최양일 감독을 배우로 출연시켰는데, 두 사람은 촬영 당시 감독을 보좌하여 감독 역할도 하였다고 한다. 

2001년 6월 프랑스예술문화훈장을 수여한 이후, 다시 병상이 악화되어 요양생활에 전념하며 일선에

서 물러나 있는 상태이다.


■ 이마무라 쇼오헤이 今村昌平
 

1926년9월15일 -  2006년5월30일. 인간의 욕망을 유모러스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정평이 난 영화감독. 東京 출신. 東京고등사범학교 부속중학교(현 츠쿠바筑波대학 부속고등학교), 와세다早稲田대학 제1문학부 졸업 후, 쇼오치쿠松竹 영화사에 입사. 주로 오즈감독의 조감독을 오랜 기간 동안 하다가, 수입이나 일에 불만을 느끼고, 1954년에 닛카츠日活로 이적한다. 1961년의『돼지와 군함』豚と軍艦,『일본곤충기』にっぽん昆虫記,『붉은 살의』赤い殺意 등의 작품으로 인정을 받았으나, 한때는 기획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아, 위궤양을 앓으며 당장 내일 양식을 걱정할 정도로 극빈생활을 겪는다. 

1979년, 사키 류우조佐木隆三의 『복수는 나에게 달렸다』復讐するは我にあり의 영화화를 두고,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자신이 메가폰을 잡아, 재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1981년에 공개된『뭐 어때!』ええじゃないか의 대실패로 ‘천하의 이마무라今村도 끝났다’란 혹평을 받는다. 기사회생의 작품『나라야마부시코오』楢山節考(1983年)로 칸느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다. 그러나 그는 칸느영화제를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다 라며 영화제에 결석한다. 『우나기』うなぎ (1997)로 또 한번 칸느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여, 일본 영화계를 놀라게 한다.

2006년5월30일, 전이성 간암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 키타노 타케시(北野武)


‣ 방황하는 청년

토오쿄오東京 都立 아다찌足立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메이지明治 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 재즈에 경도하여 신쥬쿠新宿의 재즈다방에 거의 살다시피 하며 보냈다. 한편 프로복서를 목표로 복싱 체육관도 다녔으며, 또 2종 면허를 취득해 택시 운전사를 하기도 하며 청춘시대를 보냈다. 

그 후, 아사쿠사浅草에 있는 스트립극장 아사쿠사 프랑스좌의 엘리베이터 보이를 하면서, 극장주인 

 

후카미 센자부로深見千三郎의 눈에 들어, 콩트를 배우기 시작했다. 막간 콩트에 출연하여 실력을 닦으며, 탭댄스도 배우는 등 데뷔를 준비하였다.


‣ 투비트 결성

당시 아사쿠사 로크좌에 재적하고 있던 카네코 지로兼子二郎(비트키요시)에 이끌려 만담콤비를 결성했지만 전혀 전망이 보이지 않자, ‘유명 스승의 제자로 들어가는 것이 살 길이다’라는 카네코兼子의 제안으로 전략적으로 쇼가쿠야松鶴家 치요와카千代若 치요키쿠千代菊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둘은 투비트ツービート를 결성해 본격적인 만담 콤비 활동을 시작한다. ‘붉은 신호 모두 같이 건너면 무섭지 않다’등의 독설 만담을 전면에 내세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키요시가 ‘만담은 힘드니까 그만하자’고 하여 투비트는 
 
해산한다.


‣ 방송계에 진출

투비트 해산 후, 어쩔 수 없이 솔로 만담가가 된 타케시는, 올나이트닛뽄オールナイトニッポン, 오레다치 효오킨족쿠俺たちひょうきん族 등의 프로에 출연하여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소노만마 히가시そのまんま東를 비롯해 제자를 지망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해, 타케시군단이 결성되었다. 이후, 아카시야 삼마明石家さんま, 이츠미 마사타카逸見政孝 등과 명콤비를 이루면서 각종 프로에 출연해 황금기를 맞이한다.


‣ 영화감독 데뷔
 

1989년,『그 남자, 너무 흉포해서』その男、凶暴につき란 영화가 후카사쿠 킨지深作欣二 감독의 도중하차로 인해 핀치히터로 발탁되어, 영화감독으로 데뷔를 하게 된다. 이는 배우로서의 캐리어도 있으며, 또 아사쿠사 프랑스좌에 들어가게 된 계기도 ‘영화를 맘껏 보기 위해서’라고 술회할 정도로 영화광이었던 타케시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처녀작 『그 남자, 너무 흉포해서』는 기존의 형사 영화에 대한 통렬한 도전이라고 말해질 정도로 리얼리티를 추구한 의욕 작이었다. 경찰의 실태는 프라이데이 습격사건으로 체포될 당시 직접 목격한 사실을 토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뺨을 때리는 장면, 범인의 범행 장면 등 격렬한 
 
폭력 표현이 화제가 되었다. 비평가들에 의해 이 영화는 극심하게 비판되었는데, 타케시는 비판한 
 
평론가들을 모두 자신의 TV 프로그램에 불러 모아 공개토론형식으로 진행했는데, 방송에 익숙하지 못한 평론가들은 타케시의 논지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이후 타케시의 영화를 비판하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었다고 한다.
1990년 2번째 작품 『3- 4×10月』에서는 전작의 비평을 비웃기라도 하듯, 수수께끼 같은 스토리로 구성된 작
 
품이다. 작품명도 여전히 불명인 채이다. 전작과 같이 불가사의한 엔딩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작품 역시 섣부른 비평을 할 수 없는 문제작으로 거론되었다. 
다음 작품『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에서는 
 
그 전까지의 폭력적인 이미지를 일신하여, 농아자의 가련한 비극적인 연애와 불합리한 존재를 그렸다. 키타노작품=폭력 이란 선입감에서 그의 작품을 멀리하고 있던 요도가와 나가하루淀川長治가 이 작품을 보고 타케시에 대한 평가를 180도로 바꾸어 열렬히 지지한 것을 계기로 영화도 만드는 타케시에서 영화감독 타케시란 이미지와 평가가 확립되었다. 보통 핸디캡을 가진 사람이 다른 면에서 재능을 발휘할 것이란 관객들의 기대를 배반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설정은, 전작에서 보여준 폭력을 ‘잠재화된 폭력’으로 연출한 것이 아난가하고 평가되어진다.

『소나티네』ソナチネ는 영화전문 잡지나 비평가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의 한사람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하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인상적인 라스트 장면을 연출하였다.

 

‣ 바이크 사고 후

1994년의 바이크 사고는 죽음에 직면한 일이 타케시의 세계관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왔다고 말해진다. 사고로부터 생환한 타케시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 이어, 본인이 출연하지 않은 작품,『키즈리턴』キッズリターン을 발표한다. 인생에 좌절한 청년 2명이 고교시절처럼 수업을 무시하고 자전거를 타고 교정을 질주하면서, ‘우리 이제 끝난 건가?’ ‘바보! 아직 시작도 안했어’라며 중얼거리는 일본 청춘 영화사에 남을 명 라스트신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3부 구성으로, 첫 번째는 만담가를 꿈꾸는 고교생. 두 번째는 멍청한 청년이 의외로 자기가 동경하던 여자와의 사랑을 성취하게 되고 택시 운전수가 되어 모든 게 잘 되는 것같이 보이나,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세 번째는 

복싱선수를 꿈꾸던 2명중, 한 명은 야쿠자의 표면상의 매력에 이끌려 그 길로 접어들고, 친구의 권유에 의해 시작했던 나머지 친구가 생각지도 못한 재능을 발휘하여 승승장구하나, 나쁜 선배의 꼬임에 빠져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 모두가 타케시 자신의 인생경험 그 자체를 그린 것으로, 현실에서는 나름대로 성공한 자신을 20살 시절로 되돌려, 당시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그린 것이 이 영화였다. 그리고 그 길을 되돌아 본 순간, 자신의 현실은 병실이라고 하는 지극히 자서전적인 작품이란 해석을 할 수가 있다.

‣ 세계의 타케시로
 

그 후『하나비』(HANA- BI)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금사자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 국내 및 세계 각지의 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영화비평지 『Cahiers du cinéma』에 타케시 자신이 표지를 장식한 특집이 실린 것이라든지, 유럽에서는 대학의 졸업
 
논문에 키타노영화를 다룬 학생도 있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아졌다.

1999년 『키쿠지로오의 여름』菊次郎の夏은 고인이 된 아버지 키타노 키쿠지로오北野菊次郎에 대한 헌정 작품으로, 흥행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며,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살아계실 때 완성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제작한 작품이었다. 작품 속에서 유년기의 자신과 돌아가신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된 자신을 오버랩 시켜, 키쿠지로菊次郎와 타케시 소년의 교류를 영화란 공간 속에서 정성스럽게 그려내었다.

2001년 작품 『BROTHER』는 해외 로케를 시도한 첫 작품이었다. 『하나비』로 유럽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국에서는 아직 그렇다할 성과가 없었기에, 굳이 미국을 타깃으로 한 영화라고 말해진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의 BROTHER가 교차하는 빼어난 스토리 성을 가지고 있으나, 흥행면에서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2002년 작품 『Dolls』는 실험적인 작품으로, 키즈리턴과 같이 복수의 인간드라마를 동시진행으로 구성하였다. 작품의 구상은 아사쿠사 시절 실존한, 끈으로 묶어 동냥을 했던 부부를 모티브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에서는 실연당한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여 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된 여성과 도피행각을 벌이는 청년, 약속한 장소에서 몇 년이나 기다리던 여인이 남자와의 재회, 인기 절정의 아이들이 시력을 잃자 그 뒤를 따르는 팬, 이란 복수의 인간 군상을 일본의 사계절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그렸다.

 
 







2003년『자토이찌』座頭市는 의외로 단기간에 제작된 작품이다. 옛날 아사쿠사에서 신세를 졌던, 평소 어머니라 부르는 사이토오 치에꼬斎藤智恵子 부인의 생일파티에서, ‘부탁할 일이 있는데, 거절하면 안돼’라며 요정에 불려나가 부탁받아 찍게 된 작품이었다. 전에 상연된 적이 있는 작품이라, 예전의 
 
배우 카츠 신타로勝新太郎의 인상을 지우기 위해 금발을 하는 등, 전체적으로 종전 작품의 틀을 깬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도 호평을 얻어, 타케시가 소원하던 미국 시장에도 진출하는 결실을 보았다.


■ 그 외 주목받는 감독

 

‣ 모리타 요시미츠森田芳光

1950년 토오쿄오東京 출생. 니혼日本 大学 예술학부 방송학과에 재학 중에 영화 제작을 시작하게 된다. 특별히 영화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는데, 학교 분쟁에 휘말려 동아리 활동이 중지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1981년『와・같은 것』の・ようなもの으로 감독 데뷔. 제목은 산유테이 킨바三遊亭金馬의 라쿠고落語 『이자카야』居酒屋에서 채택하였다고 한다.

1983년 마츠다 유우사쿠松田優作 주연의 『가족 게임』家族ゲーム을 발표. 이 작품이 출세작으로, 신세대의 귀재란 별명을 얻으면서 세상에 주목을 받게 된다.

1985년에 나츠메 소오세키夏目漱石원작, 마츠다 유우사쿠松田優作주연의『소레까라』それから를 발표한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이 작품을 본 후로, 메이지시대의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의 얼굴이 마츠다松田의 얼굴과 겹쳐진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1995년에 와타나베 쥰이치渡辺淳一 원작, 야쿠쇼 코오지役所広司, 쿠로키 히토미黒木瞳  주연의『失楽園』을 발표. 삶에 지친 중년 남녀가 불륜의 끝에 동반 자살한다는 스토리로, 원작도 성의 묘사로 화제가 되었으나, 쿠로키黒木의 농후한 베드신 등이 화제가 되어, 200만이 넘는 관객을 극장으로 향하게 하였다.

1999년에 키시 유우스케貴志祐介원작의『검은 집』黒い家을 발표. 1997년 이후 일본에서는 『링』등, 공포물이 일대 붐을 이루었으나, 이 작품은 그 붐에 편승한 작품이 아닌 빼어난 수작이란 평가를 받았다.

2003년, 무코오다 쿠니꼬向田邦子원작의『아수라와 같은』阿修羅のごとく을 발표. 4자매의 각기 각양의 연애담을 그린 영화로, 오오다케 시노부大竹しのぶ, 쿠로키 히토미黒木瞳, 모모이 카오리桃井かおり, 후카츠 에리深津絵里란 호화 캐스팅이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2004년 이토오미사키伊東美咲 주연의『괭이갈매기』海猫를 발표. 홋카이도의 한 시골 어부의 집에 며느리로 들어간 여자가, 남편의 동생과 불륜을 저지른 끝에 자살한다는 내용의 영화로, 모리타 감독은 ‘많은 이들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원했으나, 이토오가 연기한 격한 베드신 등, 강한 성묘사로 성인 지정을 받았다.

 
 
 



‣ 스오마사유끼周防正行
 
대학 졸업 후, 영화제작을 꿈꾸고 쿠로사와 키요시黒沢清 감독의『칸다가와 음란 전쟁』神田川淫乱戦争(1983년) 등, 핑크영화의 조감독을 역임한 후, 1984년에 『변태가족 형님의 아내』変態家族 兄貴の嫁さん로 감독 데뷔.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영화의 인용과 참조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오즈小津감독을 마음 속 깊이 경애하던 스오周防가 한번을 거치고 지나가야 할 성장통과 같은 작품으로 스오 자신 단 한번만의 도전이라고 결심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사실 그 후의 스오의 작품에는 오즈의 색깔이나 세계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코미디나 엔터테이먼트 일색의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1989년, 수행스님의 일상과 청춘을 그린 『팬시 댄스』ファン
 
 
シイダンス
로 주목을 받고, 1991년에 한 대학의 스모부를 무대로 한『으랏챠챠 스모부』シコふんじゃった를 제작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1996년 『셀 위 댄스?』Shall we ダンス?로 일본 아카데미상 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 후, 스오 자신이 『셀 위 댄스?』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장기간에 걸쳐 미국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이 작품을 상영해 상업적인 성공과 더불어, 피터 첼섬(Peter Chelsom)감독에 의해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게 된다. 

긴 공백 기간을 거친 후, 치한 문제로 일본의 경찰, 사법에 강한 의문을 제기한 영화『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가 2007년 1월 20일에 공개되었다.


‣ 崔 洋一

1949년 일본 나가노켄長野県 출생. 1968년 토오쿄오東京 조선 중고
 
급학교를 졸업한 후, 토오쿄오 종합 사진전문학교 중퇴 후, 조명 조수로 영화계에 입문.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감독의 『감각의 제국』愛のコリーダ 등의 조감독을 거친 후, 1981년 TV드라마 『프로 헌터』로 감독 데뷔. 1993년에 제작한 『달은 어디에 떠있나』月はどっちに出ている로 그해 영화상을 전부 석권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6년부터 2년간 한국에 유학.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염원하고 있던 제주항쟁 사건을 영화화하기 위한 준비를 겸해서라고 한다.

한편 키타노 타케시와 함께 오오시마나기사 감독의 『고핫토』御法度에 배우로 출연해 오오시마 감독에게 보은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코멘테이터로서 TV에 출연해 특유의 독설화법으로 논지를 전개해 주목을 끌고 있다.

2004년에는 『피와 뼈』血と骨란 영화를 제작. 타케시가 자기중심적이며 괴물과 같은 체력과 성욕의 소유자, 재일동포 金俊平 역으로 출연하여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는 78회 아카데미 외국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일본 영화감독협회 이사장으로 재임 중이다.

 
 








‣ 츠카모토 신야塚本晋也
 

1960년1월1일 토오쿄오東京 출생. 영화감독 및 배우. 日本대학 예술학부 졸업 후, CF제작회사에 입사해 디렉터로서 4년간 근무한 후, 퇴사하여 카이쥬우 시어터海獣シアター를 결성한다. 1988년, 『전봇대 소년의 모험』電柱小僧の冒険으로 PFF아우터에서 그랑프리를 획득. 이듬해 1989년에는 자기가 사는 단칸방에서 제작비 1000만 엔으로 스텝 몇 명과 『철의 남자』鉄男를 제작하여 로마국제 환타지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다. 일반 공개 첫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다. 1997년 베니스 영화제 심사원을 역임하고, 2003년 『6월의 뱀』六月の蛇으로 베니스 영화제 역류부분 심사원 특별상 수상.

츠카모토塚本의 작품은 인간 신체의 변용과 고통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폭력과 에로티시즘 등의 주제를 능숙하게 처리하는 작풍이면서도, 음습한 결말을 맺지 않고 페
 
이소스와 유머를 잊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관람한 관객은 상쾌함과 완벽한 오락으로서의 활극을 제공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에는 이시카와 타타시石川忠의 음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한 배우로서도 뛰어난 연기력과 개성적인 캐릭터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 이와이 슌지岩井俊二
 

1963년1월24일, 미야기켄宮城県 센다이시仙台市에서 출생. 센다이 제일고등학교를 거쳐 요코하마横浜 대학 교육학부 미술학과 졸업. 1988년 비잉구 등의 뮤직비디오 작업에 종사한 후, 1993년, TV드라마 『만약, 불꽃놀이, 밑에서 볼 거니? 옆에서 볼 거니?』もしも~打ち上げ花火、下から見るか? 横から見るか?를 연출해, 일본 영화감독협회 신인상을 수상. 이 작품은 재편집해서 1994년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1995년, 최초의 장편영화『Love Letter』를 감독. 일본에서도 호평이었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에 이은 『스왈로우 테일』スワロウテイル은 찬부 양론이 있었으나, 이와이岩井의 지명도를 크게 올린 작품이었다. 

그 후, 장편・단편 작품을 순조롭게 제작하여, 독특한 영상미로 ‘이와이 미학’으로 불리게 된다. 다큐멘터리를 발표한 1999년부터 감독 이외에도 분야를 넓혀, 2000년에는 안노 히데아끼庵野秀明감독의 『시키지츠』式日에 배우로서 출연하기도 했다. 새로운 기술에도 호기심을 발휘하여 왕성한 활동을 보여, 같은 해 인터넷에서 BBS를 사용해 대중 참가에 의한 소설『리리이・슈슈의 모든 것』リリイ・シュ
 
シュのすべて을 완성해, 영화화한다. 이 영화 또한 HD24P 라고 하는 필름 표현에 가까운 디지털 촬영에 의한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또 2003년에는 WEB을 통해 『꽃과 아리스』花とアリス란 단편영화를 공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