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일본의 음식문화


우선 음식문화란 음식에 관련된 문화를 총칭하는 개념인데, 식재료, 조리법, 식기에 외식 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의 필요에서부터 기근, 자연재해 등의 대처에 이르기까지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특수 상황에 대비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민족이나 종교, 풍속에 따라서 제각기 고유한 음식문화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면 종류처럼 문화권을 초월한 공통적인 음식문화가 존재하기도 한다. 유럽에서는 근세에 들어와서, 지리상의 발견, 식민지 전쟁을 통해 식재료나 향신료 등의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일본의 경우에도 태평양 전쟁 중의 식량부족, 패전 후 미 군정하의 식량원조, 고도 경제 성장으로 인해 일본의 전통 음식문화가 급속히 변화되었지만, 전통 음식은 각 집안의 주부들의 손을 통해, 또 전통 음식점을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본인은 음식을 맛으로 먹기도 하지만, 또한 눈으로 그리고 의미로도 먹는다고 한다. 즉 일본요리에는 일본인의 미적 감각과 정서와 생활 감각이 그대로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먹는 음식에서도 느낄 수가 있으나, 전통적 행사에서의 요리, 연회석상에서의 요리 등에서 훨씬 더 그 색채가 강하다고 하겠다. 옛날부터 일본요리를 五味, 五色, 五法의 요리라고 하는데,  일본문화의 특질이 잘 반영되어 있는 말로, 우선 五味란 달고(甘い), 시고(酸い), 맵고(辛い), 쓰고(苦い), 짠(塩っぱい) 맛을 말하며, 五色은 희고(白), 노랗고(黄), 붉고(赤), 푸르고(青), 검은(黒) 색을 말하며, 五法이란 다섯 가지의 요리법으로 날것 그대로(生), 졸이고(煮る), 굽고(焼く), 튀기고(揚げる), 찌는(蒸す) 요리법을 말한다. 그만큼 일본요리에는 복잡한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소재가 지니고 있는 맛을 제대로 구현하면서도, 향과 색을 소중히 여기고 또 춘하추동의 계절감도 고려하는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라 하겠다. 

일본요리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 중에 또 하나가 계절 감각을 나타내는 순(旬)이라는 항목일 것이다. 식재료는 그 재료가 생산되는 계절 중에서도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순간을 순(旬)이라 하고, 그 순(旬)을 놓치지 않고 요리함으로써 재료가 가지는 최고의 맛을 구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음식을 담아내는 그릇도 일본 요리에서는 중요한 항목이다. 요리에 따라, 또 계절에 따라 색, 형태, 재료를 고려하여 먹는 이로 하여금 시각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담아낸다. 이러한 요리에 대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전통적 요리인데, 같이 살펴보도록 하자.

전통적 요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well being 

붐의 영향으로 패스트푸드의 폐해에 대항해 스로우 푸드 즉, 제대로 된 음식을 찾던 사람들이 자기 나라 고유의 음식 문화를 존중하는 문화 현상이기도 하다.


1. 음식

 

■ 오세찌お節 料理


오세찌御節 요리는 한자로 풀어보면, 節句 때 먹는 요리란 의미이지만, 현대에서는 설날의 요리로 정착되었다. 오세찌 요리를 만드는 것은, 설날 기간 동안 주부가 쉬기 위함이란 설도 있으나, 설날 기간 동안 불의 사용을 가능한 한 금기한 것으로부터 유래한다고 한다. 이 요리의 기원은 에도江戸 시대로 비교적 역사가 짧으나, 에도江戸 시대는 한창 건강한 서민문화가 꽃을 피우는 시기로, 이 서민문화의 활기찬 멋과 유머에 찬 숨결이 고스란히 오세찌 요리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하겠다. 

오세찌 요리는 새해 첫 음식이기 때문에 길흉화복을 잘 따지
 
는 일본인답게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로 일본어 발음에서 비롯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검은 콩은 마메니まめに란 일본말로 건강하고 성실하게란 의미를 가지고 있고, 청어 알을 의미하는 카즈노코数の子는 자손번영을 기원하는 의미, 멸치볶음인 타즈쿠리田作り는 풍작을 기원하고, 다시마는 콘부昆布인데 기뻐한다는 
 
의미에서 집안에 경사스런 일만 일어나길 기원한다. 그 외에도, 도미, 우엉, 토란, 어묵, 연근 등도 제각기 길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세찌 요리는 보통 겹겹이 찬합에 넣는데, 본격적인 방식은 5단으로 쌓았으나, 요즘은 보통 3단으로 구성되어있다. 첫 번째 찬합인 이찌노쥬우一の重에는 술안주, 두 번째 니노쥬우二の重에는 회나 야채의 무침요리, 세 번째 산노쥬우三の重에는 구이를 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지방에 따라, 또한 가정에 따라 약간씩 담는 내용물이나 방식이 다르기도 하다. 자기 가정 특유의 오세찌를 계속 전수

해 내려오는 집도 있지만, 요즘에는 백화점 등지에서 오세찌를 구입하는 가정도 있는데, 새해를 축하하는 마음, 가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마음에 구입할 것이기에 굳이 비난만 할 수도 없다고 하겠다.

 







다양한 お節料理


■ 오조오니お雑煮

한국에서 설날 아침에 떡국을 먹듯, 일본에서도 설날에 먹는 음식으로는 오조오니お雑煮가 있다. 각 지방에 따라 만드는 방식이 다르기에 일정한 형식은 없으나, 각 지방의 향토색이 짙은 재료가 들어가고, 채소, 버섯, 고기 등을 넣어 끓인 맑은 장국이나 된장국에 찹쌀떡을 구워 넣는다. 한국의 경우는 떡가래를 넣지만 오조오니의 경우에는 사각이나 둥근 형태의 떡을 통째로 넣는다는 점이 가장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조오니는 크게 関東式과 関西式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관동식은 네모난 찹쌀떡을 사용하고 국물은 간장을 중심으로 간을 한다. 관서식은 둥근 떡을 사용하고, 국물도 된장을 비롯
 
하여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다.
떡을 먹는 것은 쌀의 신이 깃든 음식을 먹음으로써 신비한 힘을 얻을 수 있
 
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 한다.





 



 
 
 
 


각 지역의 다양한 오조오니(お雑煮)





■ 카이세키懐石 요리

벗을 초대하여 차를 대접하면서 아울러 제공하는 식사대접의 한 방식을 카이세키懐石 요리라고 한다. 원래 절에서 유래된 것으로, 옛 선승들은 규율이 엄격하여 하루 두 끼만을 먹었다. 이에 저녁이 되면 공복감을 느껴 따뜻한 
 
돌을 배에 대고 배고픔을 참았다는 데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따라서 원래의 카이세키懐石 요리는 매우 단출하고 소박하였으며, 한순간의 공복을 달래는 정도의 요리였다. 다도에서 제공되는 차는 맛이 아주 진하여 공복 상태로서는 차의 진가를 음미할 수 없었으므로 차를 마시기 전 단계로서의 식사로 제공되는 음식도 카이세키懐石 요리라 하였다. 그래서 초대된 사람
 
들은 요리의 소박한 맛과 세련된 맛을 음미하고 감상할 뿐만 아니라, 요리를 담은 그릇의 아름다움도 함께 즐겼다.

이처럼 에도江戸 이전의 일반 카이세키 요리는 비교적 간소하였지만, 에도 시대 이후 식습관이 세 끼로 정착되면서 내용과 형식이 다소 복잡해지고, 또한 서양요리의 영향도 받아 오늘 날과 같이 자리 잡

았다고 한다. 즉 요즘은 다도의 요소에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고, 카이세키 요리만을 전문으로 하는 요릿집도 성행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본격적인 카이세키 요리는, 옛날과 같은 형식은 유지하고는 있지만 결코 소박하지도 않으며, 또한 가벼운 음식도 아니다.


■ 쇼오징精進 料理
 

불교 용어인 쇼우징精進은 지속적, 적극적으로 오로지 도를 구하는 활동을 의미했는데 일본에서는 금기라는 의미로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 소극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살생유택의 계율에 따라 식물성 음식만을 먹게 된데서 유래한 음식으로 야채, 콩, 두부, 표고버섯, 박나물, 다시마 등을 재료로 하여 만들었다.

일체의 육류 등의 동물성 식품을 피하고 식물성 재료만을 사용하는 요리이기에 현대에 와서는 채식주의자 뿐 아니라, 건강식의 대명사로서 인기를 얻고 있는 요리이기도 하다.


■ 스시寿司

스시는 초밥을 말하는데, 초밥의 기원은 동남아라고 하며 지금도 동남아의 산속에서는 물고기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식혜와 같은 형태로 만들어서 먹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중국에 전래된 초밥은 송나라 때 크게 발전하여 전 대륙을 휩쓸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방민족인 원나라가 중국을 정
 
복하고는 이 초밥 문화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것이 스시라는 이름과 함께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일본에서 꽃을 피우게 되는데, 도중 경로인 한반도에는 전래된 흔적이 없다고 한다. 

초밥의 역사는 일본에서도 상당히 오래 된 것으로 보이나,  문헌에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712년에 편찬된 율령법전인 [養老律令]에서 전복초밥, 홍합초밥을 세금으로 낸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이 시대의 초밥은 해산물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초밥을 사용했던 것으로, 

주재료는 해산물이었고, 밥은 버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 같이 밥이 위주가 되는 초밥은 에도江戸 시대에 들어와서 정착되었다. 

그런데 밥이 위주가 되는 초밥은 원래 関西 지방에서 먼저 발달했었다. 손으로 눌러 만든 오시즈시押し寿司와 하코스시箱寿司로 변천하며 발달했는데, 이는 곧 일본의 초밥발전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편 関東 지방에서는 에도마에江戸前란 말이 유행하게 되는데 이것은 에도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을 일컫는 말이다. 토오쿄오東京 만에서 잡힌 생선으로 니기리즈시握り寿司를 만들어 팔았는데, 공전의 히트를 치게 되고 초밥의 대표적 주자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런데 에도마에즈시江戸前寿司가 전국을 석권할 정도로 인기를 얻다가 무슨 이유인지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関西 지방에서는 다시 오시즈시押し寿司와 하코스시箱寿司 등이 인기를 끌며, 에도마에즈시江戸前寿司는 토오쿄오東京의 지방 요리로 전락하게 된다. 

1000년 이상이나 역사를 갖고 있는 칸사이즈시関西寿司가 200년 역사에 불과한 에도마에즈시江戸前寿司에 재역전 당하게 된 것에는 역사적 전환점이 있었다. 즉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이 지진으로 인해 에도마에
 
즈시江戸前寿司 집은 거의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고, 요리사들은 관서지방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로 흩어지며 그들이 에도마에즈시를 전국에 파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어 전후에 냉동기술이 발달하고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초밥의 재료도 늘어나고 일본의 경제발전과 함께 초밥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결국 관동대지진이 니기리즈시의 세계화에 공헌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스시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니기리즈시 외에도 치라시즈시ちらし寿司, 마키즈시巻き寿司, 이나리즈시いなり寿司 등이 있다.

 
 
 
 





치라시즈시는 우리의 회덮밥과 비슷한 종류인데, 관서식과 관동식으로 나눌 수가 있다. 관서 식은 고모꾸즈시五目寿司라고 하여 주로 식물성 재료를 많이 넣는 반면, 관동식은 생선, 생선알 등을 밥 위에 수놓듯이 뿌려 아주 예쁘게 완성한다.

마키즈시는 우리나라의 김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는데, 우리의 김밥이 여러 가지 재료를 한꺼번에 넣는 반면, 일본에서는 한 종류의 재료를 넣어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후토마끼太巻き라고 하여 엄청나게 두꺼운 김밥도 있다. 그리고 이나리즈시는 우리의 유부초밥과 흡사하다.

스시가 원래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고급 음식이었고, 지금
 
도 그런 감각은 크게 변하지는 않아, 서민들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초밥 집으로 회전초밥집이 성행하고 있다. 주방에서 만든 스시를 접시 위에 올려 콘베어벨트 위로 돌게 하는 시스템으로, 자기가 마음에 드는 종류의 스시를 골라 먹을 수가 있다. 밥 위에 올려놓은 생선에 따라 그 가격이 다른데 접시의 색깔에 따라 가격이 정해져 있으므로, 주머니 사정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가격과 맛으로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로 인기가 있는 가게도 있다.



■ 덮밥요리

우리의 재래식 사발 같은 도자기인 동에 밥을 담고, 그 위에 양념을 스며들게 하거나 조리한 재료를 얹어 먹는 음식의 총칭이다. 미국에 패스트푸드인 햄버거 문화가 있다면 그에 해당하는 일본식 간편한 식사방법은 도시락과 삼각초밥, 그리고 덮밥이 있다. 요즘의 바쁜 현대인의 생활패턴과 매치하여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우나기동鰻丼(장어덮밥)이 덮밥요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에도시대에 오오쿠모이마스케란 사람이 우나기(민
 
물장어)를 좋아하여 거의 매일 배달해 먹었는데, 배달원이 더운밥과 보온을 한 우나기를 따로 가져오자, 그는 배달원에게 사발에 더운밥을 담고 그 안에 우나기를 넣으면 따로 보온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가르쳐 준 데서, 우나기동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밥 위에 올리는 재료에 따라서 이름도 달라지는데 튀김을 올리면 템푸라동天ぷら丼(튀김덮밥: 보통 새우튀김을 얹는다), 계란과 닭을 올리면 오야코동親子丼(닭
과 계란이 자식과 부모라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소고기를 올리면 규우동牛丼 등 재료에 따라 다양한 덮밥이 있다. 

가격이 비교적 싼 탓에, 도시의 젊은 샐러리맨들의 점심 메뉴로 인기가 있다.  덮밥 체인점으로 유명한 요시노야吉野屋는 싼 가격으로 인기가 있는데, 일본 전국을 커버하고 최근에는 미국, 중국 등지로 진출하여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다.

 
 
 



■ 라면ラーメン

라면은 17세기경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일본에서 돼지 뼈 국물 등을 개발하여 지금의 일본식 라면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관동대지진 이후 지나소바란 이름으로 크게 유행을 하여 일본의 전통 음식인 소바의 인기를 능가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라면이 일본 국민에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 되었고, 또 매스컴에서도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라면특집을 다루고 있다.

일본의 라면은 공통적으로 인스턴트가 아닌 생라면을 사용하고, 고명으로 차슈라고 하는 돼지편육을 얹는다. 그런데 국물의 종류에 따라 이름도 달라지는데, 크게 간장라면(쇼오유라멘醤油ラーメン), 된장라면(미소라멘味噌ラーメン), 돼지사골라면(톤코츠라멘豚コツラーメン)으로 나눌 수가 있다. 

간장을 베이스로 한 간장라면은 국물이 맑고 맛이 깔끔해 우리나라 사람이 먹어도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는 않을 맛이다. 주로 토오쿄오東京를 중심으로 한 관동지역에서 많이 먹는다. 된장라면은 육수에 일본된장을 풀고, 숙주를 비롯한 야채를 볶아 언지고 차슈를 더 한다.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으나, 동북지방 그리고 홋카이도北海道 지방에서 많이 찾는다. 

마지막으로 사골라면은 큐우슈우九州의 하카타博多에서 발생하였다고 해, 하카타라면이라

고도 한다. 돼지 뼈를 푹 고아 만든 사골로 국물을 만들고 면도 가는 면을 사용한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먹는 인스턴트 라면도 일본
 
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중일 전쟁 때 중국군이 비상식량으로 쓰던 건면에서 힌트를 얻은 한 오오사까大阪의 한 사업가가 1958년에 상품화에 성공한 후 현재까지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라면이라고 하면 인스턴트보다는 생라면이 일본에서는 인기가 있다. 한 밤중에 술을 한잔 한 직장인들, 그리고 공복감을 달래려는 젊은이들이 가게 가득히 앉아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가 있다.


■ 에끼벤駅辯

1885년 토오쿄오東京의 우에노上野역과 우츠노미야宇都宮역을 잇는 철도가 개통하자, 우메보시梅干し(매실장아찌) 주먹밥에 단무지를 곁들여 역에서 판 것이 에끼벤의 효시라고 한다. 1872년 토오쿄오의 심바시新橋와 요코하마横浜 간의 열차가 개통된 후 13년 만에 태어난 셈이다.

일본은 전 국토를 연결하는 철도망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 오끼나와沖縄를 제외한 전국을 기차를 타고 여행할 수가 있다. 일본에서의 기차 여행은 각 역마다 선보이는 지방색 풍부한 각양각색의 에끼벤駅辯을 맛볼 수 있어 그 재미가 더해진다. ‘열차 도시락’이라고 말할 수 있는 에끼벤駅辯은 일본 문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로서, 영어로는 ‘Station lunch box'로 번역되나 ‘에끼벤’으로 통용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각 지방에서 재배한 쌀로부터 특산물에 이르기까지 풍부한 식자재, 陶器와 대나무 제품의 용기, 보기에도 즐거운 다채로운 포장, 다양한 가격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철도여행 중에 맛보는 에끼벤을 통하여 그 지방 특유의 역사, 풍토, 인정과의 만남이 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지방의 다양한 에끼벤駅辯

 
 










 
 
 
 


秋田県奥羽本線大館駅「鶏めし」                   北海道 函館本線森駅「いかめし」


 
 

 
 


群馬県 信越本線横川駅「峠の釜めし」               山梨県 中央本線小淵沢駅「元気甲斐」



2. 茶 


■ 센노리큐우千利休의 차세계
 

센노리큐우千利休는 중국풍의 차 문화에 불교의 禅 사상을 접목시켜 독특한 차문화를 만든 사람이다. 전국 시대에 살면서 인생무상과 허무를 뼈저리게 느꼈던 리큐우利休는 다도에 그 철학을 구현하였는데, 마음을 비우고 살아가며 죽어서도 깨끗함을 남기는 일을 추구했다. 리큐우의 다도는 4規 7則으로 규정지었는데, 4規란 <和敬清寂>의 세계를 지향했다. 이 4規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7가지의 실천방안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 차는 맛있게 끓인다 : 손님을 초대하여 차를 대접하는 만큼 모름지기 차는 찻물을 알맞게 넣고 맛있게 타야 한다.

② 숯불은 알맞게 물이 끓도록 배려해야 : 솔바람 소리는 숯불의 힘이 만들어내는 물 끓는 소리이다. 숯불도 알맞아야 차 맛이 제대로 나는 법이다. 물 끓는 소리에 깨달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③ 꽃은 들에 피어있는 것처럼 : 꽃은 기교를 부리지 않고 자연 그대로 꽂는 것이 좋다.

④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하게 : 손님을 맞는 기본자세를 표현한 것이며 손님을 최상으로 모시기 위한 배려를 나타낸 것이다.

⑤ 정해진 시각보다는 빠르게 : 약속한 시각보다 빨리 하여 여유를 갖고 다도에 임한다. 모든 것이 질주하는 시대에 여유를 찾는 느림의 미학을 나타낸 다도의 태도이다.

⑥ 비가 오지 않아도 우산 준비를 : 일이 닥쳐서 허둥지둥하기보다는 미리미리 만전의 준비를 꾀하는 차 준비의 마음가짐을 나타낸 것이다.

⑦ 손님끼리 서로 배려하도록 : 다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화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화합을 할 수 있는 상대방을 선택하고 선택했으면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다.


이러한 리큐우의 사상은 <一期一会>란 한마디로 축약할 수가 있을 것이다. 一期란 불교용어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는데, 즉 지금 마주하고 있는 손님은 평생 두 번 다시 보지 못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접하면, 모든 언행에 있어서 최고의 정성이 들어갈 것이란 말이다. 이 말은 일본 차도에 있어서의 기본 이념으로 정착되어 오늘 날까지 이르고 있다.


茶道
 

茶室을 꾸미고 茶도구를 준비하여 차를 만들어 마시는 일체의 과정을 말하며, 茶道의 예법은 예술적 감각의 독특한 찻잔에 향기 짙은 차를 끓여 손님에게 권하는 방법, 또한 손님은 정성이 깃든 주인의 접대를 받아들이는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모양보다도 마음을 존중하고, 정성을 다해 손님 접대하는 것이 다도의 기본 이념이라고 한다.


‣ 다도의 역사


일본의 차 문화는 9세기경 일본의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遣唐使가 중국에서 들여와 사원, 궁정에서 차를 마시게 된 것이 시초였다.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카마쿠라鎌倉 시대로, 당시 유학승이었던 에이사이栄西가 당에서 마신 차에 감동을 하여 차 씨앗을 가지고 들어와 지금의 큐우슈우九州 지방에 심었는데, 재배에 성공을 해 일본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카마쿠라 말기에는 토오챠闘茶라고 하여 
 
재료를 공개하지 않고, 어떤 차인지를 맞추는 유희가 바샤라婆娑羅라는 신흥 사무라이 사이에서 유행하였는데, 당시에는 차도구도 호화스럽고 비싼 중국제품을 선호하였고, 경품도 상당히 큰 것을 걸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와비차侘茶가 유행하면서 사라지게 되지만, 현재에도 이 형식은 전래되
고 있다. 

무로마치室町 시대에는 차가 본격적으로 일본화 되고, 차를 마시는 인구도 귀족, 승려에 국한되었던 것이 서민까지 확산된다. 서원을 중심으로 다도형식이 갖추어지고, 또한 다도회도 개최되어진다. 그 후 茶道는 렌가連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발전해 나간다.

그 후 센노리큐우千利休가 등장해서, 위에서 언급한 독자적인 차의 세계를 창출하고 발전시킨다. 무로마치 막부를 멸하고 정권을 잡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매일같이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茶道에 몰두하게 되는데, 그는 리큐우利休 등을 불러 茶道에 심취하고, 茶道의 명기를 구하기 위해서 명기 사냥까지 했을 정도였다. 노부나가信長의 뒤를 이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茶道에 열중했는데, 히데요시秀吉는 리큐우를 쌀 3000석의 茶 스승으로 대접하며 차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 간 것도 茶道에 심취한 히데요시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 전해진다.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된 리큐우는 번잡한 형식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간소화하여 본격적으로 자신의 茶道 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한때 히데요시로부터 茶道의 천하제일이란 칭호를 얻고 전성시대를 구가하지만, 1591년 히데요시로부터 할복을 명령받고 할복하고 만다. 

히데요시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처럼 茶道에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3대 将軍인 이에미츠家光 때에는 교양으로 장려하게 된다. 일설에 의하면 토쿠가와徳川의 차접대에서 토쿠가와의 잔에 독을 탈 것을 노부나가에게 명령 받았지만 리큐우가 단연코 거부했다는 사실을 알고 토쿠가와 집안은 평생 리큐우의 후손을 돌보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이 와비차侘茶는 리큐우의 손자인 소오탄宗旦에 의해서 완성된다. 
 

소오탄宗旦 이후 오모테센케表千家, 우라센케裏千家, 무샤노코오지센케武者小路千家의 3유파로 나누어져서 각기 계승되어진다. 유파는 이에모토家元라는 신과 같은 존재를 정점으로 하여 엄격한 계급체계로 구성되는데 위의 3종가 외에도 야부노우치류우薮内流, 엔슈우류우遠州流, 세키슈우류우石州流 등의 유파가 있다. 명치유신 이후 서양문화의 유입으로 한 때 쇠퇴하기도 하였으나, 전통문화로서의 가치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져 대중화에 성공, 학교 교육과정에 도입되기도 하는 등 저변인구는 늘어가는 추세에 있다. 

‣ 다도의 모임茶会


차손님으로 초대받아 그 집에 가서 가벼운 식사와 함께 차를 나누는 시간은 대략 4- 5시간 정도이다. 초대하는 주인은 미리 계절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초대한 당일의 주제를 결정하고 그에 맞게 카케지쿠掛け軸(족자), 이케바나生け花(꽃꽂이), 와가시和菓子(일본과자), 차카이세끼茶懐石(차를 마시기 전에 먹는 음식)를 준비한다. 일상생활이지만 그 일상에서 벗어나 차를 함께 하는 벗과 차도구와 차와 분위기, 마음 등 모든 것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특별하게 차를 마시며 의사를 소통하는 것이 원래 茶会의 목적이자 의미이므로, 다실 안에서는 일상에서와는 달리 상하귀천이 없으며, 취미, 취향, 茶道 전반에 관한 모든 생각이 일치됨을 확인하는 자리이다.

차를 대접하는 주인과 초대받은 손님이 초대받은 주제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특별한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이 모임에서는 차향과 차 도구, 다실, 족자, 꽃꽂이 등이 모두 대화의 대상이 되고 서로 칭찬을 통해서 합일되는 경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과 손님 모두가 차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미를 감상할 수 있는 안목과 교양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암묵적인 전제였다.

茶道에 관한 한 일본은 종교에 가깝고 한국은 풍류에 가깝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茶会에서는 반지나 귀걸이를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차를 마시다가 찻잔을 상하게 하거나 이상한 잡음이 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향수를 해서도 안 된다. 차향에 방해를 주기 때문인데, 이처럼 茶道에 임하는 사람은 지켜야 할 것이 많다. 



‣ 다도의 모임茶会 의 과정


다도를 주최한 주인은, 손님이 오면 먼저 정원에 물 뿌리기를 하는데 정갈한 공간으로 만들며 마음도 함께 정화하기 위함이다. 손님은 툇마루에서 기다리는 동안 주인과 말을 주고받지 않는다. 즉 이심전심으로 서로 소통을 기하기 위함이
 
다. 손님은 다실의 정원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일상 즉 속세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츠쿠바이에서 몸과 마음
 
을 동시에 씻는다. 몸을 숙이며 들어가게 되어 있는 좁은 입구인 니지리구치躙口는 계급여하를 막론하고 다실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겸손하여야 하며, 無垢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을 여자의 자궁에 들어가는 것이라 풀이하는 학자도 있다. 즉 태어날 때의 순간으로 돌아가 일체의 세속에서 벗어나고, 또 새로이 거듭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실에는 전등이 없으며 자연광으로 밝힌다. 어두우니까 조심스러워지고 또 예민해지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숯불과 함께 피우는 향에 의해 5감은 더욱 민감해진다. 

식사는 옛 禅房에서 먹었던 가벼운 카이세끼懐石 요리와 간단한 다과로 한다. 식사 후 손님은 밖으로 나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주인은 안에서 차를 준비하는데 이때도 가급적 말은 삼간다. 다시 茶室에 입장하면 주인이 진한 차와 연한 차를 접대한다. 진한 차를 마실 때는 긴장감이 한층 더 해지는데, 이 순간은 숨도 쉬지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차 접대의 성공 여부는 진한 차를 얼마나 잘 타는가에 있다고 말해지는 만큼 진한 차는 茶会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진한 차를 마실 때에 와가시和菓子란 일본식 과자를 같이 먹는다. 이어서 연한 차를 마시는데, 이때는 긴장을 풀고 茶器나 꽃꽂이 등의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번잡한 세상의 얘기는 삼간다.







 
 
 




 







여러 가지 茶道具



‣ 차의 종류


일본에서 흔히 마시는 차는 녹차인데 최근에는 많이 다양해졌다.

차의 구별은 우선 발효여부에 따라 무 발효차, 반 발효차, 완전 발효차로 구분한다. 그리고 잎을 따는 시기에 따라 이찌반챠一番茶(일번 차), 니반챠二番茶(이번 차), 산반챠三番茶(삼번 차)로 구분하고, 음용 시기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차로 구분한다.

 

∙무 발효차

󰁱 분말차

‣ 맛챠抹茶 : 찻잎을 곱게 갈아 뜨거운 물에 풀어 마시는 차로, 찻잎을 함께 먹는다. 가장 연한 새싹만을 따서, 말린 다음 쪄서 맷돌로 갈아서 만든 가루차. 최고급차이다. 

󰁱 잎차
 

‣ 센챠煎茶 : 찻잎을 잘게 썰어 말린 후, 뜨거운 물에 우려 마시는 차를 말하며, 일본차의 약 80%가 이 센챠이다.

‣ 교쿠로玉露 : 그늘에서 비료 등의 영양공급을 충분히 하여 키운 고급 녹차이다. 값도 비싸고 향이 강해서 적은 양을 마신다. 고급 센챠나 교쿠로는 60도 정도의 미지근한 물로 차를 타는 

것이 가장 좋다.

‣ 반챠番茶 : 오래된 큰 찻잎으로 만든 차이며, 중저가품의 차이다.

‣ 겜마이챠玄米茶 : 센챠나 반챠에 볶은 현미를 섞어 넣은 차이다.

‣ 호오지챠焙じ茶 : 반챠를 볶아서 달인 차로서 카페인이나 폴리페놀 등 자극물질이 적고 맛이 시원해서 자극적인 맛을 싫어하는 사람이나 어린이에게도 권할 수 있는 차이다.


∙ 반 발효차
 

‣ 우론챠烏竜) : 중국의 복건성에서 제조한 것이 주를 이루는데, 차 잎을 햇볕에 약간 말리므로 잎 속에 있는 성분의 일부가 산화되어 좋은 향기를 나게 한다. 막 향기가 날 때쯤 가마솥에 넣고 볶아 산화를 정지시킨다. 따라서 발효가 반쯤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 발효차라고도 한다. 이 차는 연간 1만 톤가량을 일본으로 수출하고 있다고 한다. 이 차의 이름의 연유는 복건성에 武夷山이란 산이 있는데 항상 검은 구름이 용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는 상태여서 그 모양을 묘사한 말이란 설도 있고, 반쯤 말린 차 잎의 모양이 검은 용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 완전 발효차

‣ 홍차(紅茶) : 차나무의 어린 차 잎을 따서 발효시키면 홍갈색으로 변화되면서 아름다운 향을 내는데 이것을 건조한 것이 홍차이다. 차로 탈 때 맑은 홍색을 띠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주로 인도, 스리랑카 등지에서 생산된다.


∙ 세계의 대표적인 홍차

 

‣ 다즐링(Darjeeling) :  인도의 북동지방의 서벵갈주의 북단, 히말라야 산맥의 남쪽기슭의 피서지로, 홍차의 산지. 해발 2300m에 위치한 히말라야 고산지대에서 딴 찻잎을 사용하는데, 생산량이 적어 아주 고가의 홍차이다. 세계 3대 홍차의 하나. 

‣ 아샘(Assam) : 일명 Black Tea. 아샘은 중국이 원산지이며, 벵갈
 
과 캘커타 북부에서 재배되고 있다. 아샘은 인도의 북동부지방의 산지인 세계 최대의 홍차생산지이기도 하다. 세계 3대 상표의 하나이다. 몬순의 영향을 받은 유리한 기후 조건 덕분에 고급의 아샘 홍차에는 황색아의 함량이 많고 형태가 일정하다. 또 뜨거운 물에서 진한 홍색
이 빨리 우러나오며 향이 강하다. Irish Breakfast가 거의 100% 아샘 홍차인데, 쓴맛, 떫은 맛 때문에 우유와 블랜딩하기에 더욱 적당한 차라고 한다.
‣ 키먼(Keemun, 祁門) : 색상이 흑색이고 우려낸 차 빛깔이 밝은 오렌지 빛에 가까운 선홍색으로 난초의 향 같은 특이한 향기가 일품이다. 중국의 대표적인 홍차로 기홍(祁紅)이라고도 부른다. 중국 상하이 근처에서 생산되며 잉글리쉬 브랙퍼스트나 얼 그레이의 베이스로 많이 쓰인다. 맛이 부드러운 편이며, 인도의 다즐링, 스리랑카의 우바와 함께 세계 3대 홍차로 일컬어지는 홍차이다. 

‣ 실론(Ceylon) : 홍차의 황금이라고 하는 스리랑카 실론산 홍차이다. 

인도의 아샘처럼 최대규모의 차산지인 실론 섬의 고지대에서 재배된다. 지역이 높을수록 쓴맛이 강하며 색이 옅어 high grown이라고도 
 
한다. 그 외 midium grown, lower grown은 주로 브랜드의 베이스로 쓰인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입에 익숙한 홍차이기도 하다. 가장 깨끗한 실론 찻잎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려낸 차 빛깔이 오렌지색에서 황금색에 가까워 홍차의 황금이라고도 불리는데, 강한 향에 개운한 맛과 감칠맛을 갖고 있어 공복에 스트레이트로 마셔도 좋은 홍차이다. 끓인 홍차를 하얀 컵에 부어보면 띠가 두 개 생기는데 가운데가 빨간빛을 띠는 것이 좋은 홍차라고 한다.




3. 일본의 술 


음주문화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가 있다. 서양 사람들처럼 자기 술잔에 마시고 싶은 만큼만 따라 마시는 자작문화, 중국, 러시아, 동유럽 사람들처럼 잔을 맞대고 건배를 하며 마시는 대작문화,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는 수작문화가 있다. 수작문화의 원점은 사람과 사람을 정신적으로 결속시키는 숭고한 수단이었다고 하나, 오늘날 이 수작문화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아직 나이든 분들이 마신 잔을 돌리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거의 행해지지 않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 일본인이 즐기는 술


‣ 니혼슈日本酒

 

청주(清酒)는 일본에서 보통 ‘니혼슈日本酒’라고 불린다. 그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음용되어 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정종’(正宗)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日帝시대에 우리나라에 몇몇 청주 메이커가 있었는데, 우선 가장 최대 규모의 월계관 청주는 충북 청주에서 생산되어 많은 양이 군납 또는 관납되는 관계로 일반인들에게는 그냥 큰 청주메이커로만 알려졌었고, 마사무네正宗란 제조업체의 술이 일반인들에게 판매된 관계로 아직도 청주를 ‘正宗’이라고 흔히 부르는 것이다.

清酒는 日本에서 서기 400년경 처음으로 ‘스미사께清酒’라는 문헌이 발견되었고, 그 이후 8세기의 ‘만요오슈우万葉集’에도 기록이 나오며 13세기 카마쿠라鎌倉 막부시대로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주세에 대한 각종 세금이 정립되는 과정을 거치며 발전되어왔다. 현재는 일본에서 맥주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음용되고 있는 国酒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고 있으며, 세계 시장에서도 "사께"라는 
 
명칭으로 가장 넓게 보급된 아시아권의 주류라고 할 수 있다. 

‘日本酒’는 원래 쌀과 누룩으로만 제조되었지만, 전쟁 시기에 쌀의 부족으로 인해 흔히 酒精이라 불리는 양조용 알코올을 첨가한 제품이 생산되게 되었다. 일본이 경제적으로 풍요해지고 또 쌀이 남아도는 시기가 도래하였지만, 옛날 그대로의 공법을 고수한 몇몇 양심적인 양조 메이커를 제외한 대부분의 양조장에서는 양조용 알코올을 첨가해 술의 양을 늘려 이문을 남기려고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주세를 조금이라도 더 걷기 위한 정부의 방관도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몇몇 양심적인 양조장과 술 도매상, 그리고  니혼슈 애호가들의 니혼슈를 지키자는 
노력에 힘입어, 현재는 니혼슈를 애호하는 팬들이 많이 증가하였고, 니혼슈만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가게도 늘고 있는 추세이다.
 


‣ 맥주ビール


맥주는 B.C 4000년경 중동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수메르 민족이 
 
최초로 제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들이 만든 맥주는 보리를 건조시켜 가루를 낸 다음, 그 가루로 빵을 구워 낸 후 그 빵을 부수어 물을 가하여 자연발효 시킨 것으로 원시적인 제조 방법이었다. 그 후, B.C 3000년경에는 이집트에서도 나일강변에서 수확한 대맥으로 맥주를 제조했고 그리스나 로마에까지 전파하였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맥주에 대한 평가는 와인에 비해 그렇게 좋지 못하였으며 질 또한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중세에 들어서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우수한 품질의 맥주를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이었던 승려들은 양조지식도 뛰어나 여러 가지의 향초와 약초를 조합하여 향미제인 루르트를 사용한 구르트비어를 만들었다. 

15세기 이후 비로소 맥주에 호프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도시의 발전과 길드제도의 정착과 더불어 폭넓게 대중화되어 갔으며, 품질 또한 향상되어 갔다. 맥주의 품질향상을 꾀하기 위해 원료 등을 규제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는데 독일에서 1516년 빌헬름 4세가 공포한 "맥주 순수령" 이 유명하다. 이것은 대맥, 호프, 물의 세 가지 원료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당시 맥주의 품질유지,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맥주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본격적으로 가능해진 것은 산업혁명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열처리 살균법이 발명됨으로써 장기 보관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 파스퇴르의 이론을 응용한 덴마크의 한센은 효모의 순수배양법을 발명하여 맥주의 질을 한 차원 더 높였다. 또한 칼 폰린네가 발명한 암모니아 냉동기는 처음으로 사계절을 통한 양조를 가능하게 하고 품질을 향상시키는데 공헌했다.

日本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맥주는, 페리제독이 도항한 1853년경으로, 효오고켄兵庫縣 출신의 카와모토 코오민川本幸民이 네덜란드 서적을 바탕으로, 에도江戶의 츠유츠끼露月에 있는 자택에서 만들어 시음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맥주도 배급제가 된 역사가 있었다. 1943年 3月 전황이 심각해지고, 맥주도 배급제가 되면서 개별적인 맥주 상표가 금지되고 「麥酒」로 통일되었다. 이와 동시

에 맥주 회사의 통합과 맥주병의 공용화가 이루어졌다. 맥주병의 공용화에 의한 용량이 통일된 것이 현재의 맥주 큰 병 용량의 기준이 되었다. 전시 하에 이루어진 맥주병의 공용화는 맥주의 개성을 앗아간 반면 이러한 합리화를 이루어지게 한 것은 아이러니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맥주회사의 설립도 일제 시대에 이루어졌는데, 1933년 일본의 대일본맥주 주식회사가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한 것이 그 시초이며, 뒤이어 같은 해 12월에 역시 기린맥주 주식회사가 소화기린맥주(동양맥주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이들 두 회사는 해방과 함께 1945년 적산 관리 공장으로 지정되어, 미국 군정에 의해 관리되어 오다가 그 후 1951년에 이르러 민간에게 불하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조선맥주(현재 하이트맥주) 주식회사와 동양맥주(현재 오비맥주) 주식회사이다.


‣ 위스키


증류주의 일종. 엿기름으로 곡류의 녹말을 당화(糖化) · 발효시켜서 익게 하고 증류시켜 얻은 독한 술을 참나무통에 넣어 다시 숙성시켜서 독특한 향기와 맛을 낸 증류주이다. 보리의 싹을 낸 엿기름만을 원료로 하고, 단식증류기(單式蒸溜機;pot still)로 증류한 것을 몰트위스키, 엿기름 외에 옥수수 등 발아하지 않은 곡류를 원료로 해서 연속증류기(patent still)로 증류한 것을 그레인위스키라고 한다. 


역사

위스키란 말은 켈트어로 <생명수> 라는 뜻인 우슈크 베하(uisge beatha)가 변화한 우스케보(usquebaugh)에서 왔으며, 이 우스케보가 위스키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일랜드와 미국에서는 whiskey라고 <e>를 넣어 쓰고 있다. 증류기술은 B. C 3세기 무렵 고대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술하였으며, 아라비아인은 연금술의 수단으로서 이것을 실용화하여 <아라빅>이라 하였다. 이것이 증류기술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동남아시아 · 중국 등에서도 증류기를 람빅이라고 하거나, 증류주를 아락 · 아라기[阿剌吉]라고 오랫동안 불러왔다. 유럽에서도 증류기를 아람빅이라고 한다. 그러나 증류주가 만들어진 것은 10세기 이후의 일이며, 주로 남유럽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그 지방의 많은 농산물을 원료로 하고 있다. 라틴어로 아쿠아비타이(aqua vitae), 프랑스어로 오드비(eau- de- vie)라고 하여 모두 <생명수> 라는 뜻을 가진다. 위스키도 켈트어의 <생명수>라는 뜻에서 왔는데, 켈트족이 어떤 경로로 증류기술을 익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위스키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으나, 1170년 헨리 2세의 아일랜드원정 때에는 이미 아일랜드에서 증류주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15세기부터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기록에 나오는데, 지금의 스카치위스키의 제조기술이 확립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18세기 전반의 엿기름 세(稅), 후반에 계속된 증세와, 다시 작은 용량의 가마를 사용 금지시키는 법령에 의해 소규모 생산자는 산 속에 숨어서 엿기름만을 원료로 해서 우스케보를 만들고, 이것이 나중에 참나무통 숙성과 결부되어 몰트위스키로 발전하였다. 몰트위스키에서는 엿기름 건조 시에 토탄으로 훈제향을 나게 하는데, 이것도 건조하는 데 토탄을 사용한 밀조시대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몰트위스키는 단식증류기로 알코올농도가 낮아지고 참나무통 숙성으로 풍미의 향상도 두드러졌다. 1826년 R. 슈타인에 이어 A. 코피에 의해 연속식증류기가 발명되어(1831년 특허), 곡류를 원료로 한 그레인위스키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레인위스키는 알코올농도가 높게 증류되므로 성질이 대단히 안정되어 있었다. 19세기 중엽 유럽의 포도가 병충해를 입어 와인 · 코냑 생산에 큰 타격을 주었던 일과, 성질이 강한 몰트위스키를 대량생산이 쉽고 부드러운 그레인위스키와 혼합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는 스카치는 세계적인 술이 되었다. 1877년 위스키회사가 모여 영국 증류자 협회(DCL)가 발족되고, 정부와 협력하여 제조업자를 차례로 흡수하였으며, 스카치의 5대 위스키메이커(화이트라벨 · 조니 워커 · 블랙앤드화이트 · 화이트호스 · 존 헤이그)가 이에 참가함으로써 당시 위스키 거래의 60%를 좌우할 만큼 커졌다. 한편 종래의 몰트위스키(pure malt whisky) 애호가는 몰트위스키가 진짜 위스키라고 하여, 1909년 왕실위원회에서 지금의 위스키의 정의가 결정될 때까지 <위스키란 무엇이냐>라는 대논쟁이 벌어졌으며, 결국 몰트위스키도 그레인위스키도 다 같이 위스키라고 결정되었다. 위스키는 영국 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아이리시위스키, 캐나다에서는 캐나디언 위스키로서 독특한 발전을 하였다. 미국에서는 켄터키주 버번군에서 옥수수를 주원료로 한 버번위스키가 탄생하여 아메리칸 위스키의 대표적 존재가 되었다. 


제법

몰트위스키의 제법은 보리를 발효시켜 건조시킬 때 토탄을 연료로 하여 그 연기의 향을 머금게 한다. 마른 엿기름을 부스러뜨려서 약 4배가량의 더운 물을 붓고 잘 섞어서 60∼65℃로 유지시켜 녹말을 당화시킨 다음에 25℃ 이하까지 냉각해서 효모를 넣어 발효시킨다. 알코올농도 7% 내외의 전국(거르지 않은 술)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포트스틸로 증류하는데, 초류 가마와 재류 가마로 2번 증류를 시켜, 중류구분(中溜區分)의 알코올농도 65% 내외의 부분을 흰 참나무의 저장 통으로 옮겨 3년 이상 숙성시킨다. 술통은 셰리나 버번위스키의 빈 통을 사용한다. 통의 재목에서 향미에 관여하는 미량성분이 스며 나와서 착색되며 위스키성분과 반응하여 풍미가 좋아진다. 이 풍미를 기호에 맞게 조절하여 제품으로 만든다. 브렌드용의 그레인위스키는 주로 옥수수를 엿기름으로 당화하고 발효시켜서 연속증류기로 증류해서(알코올농도 93∼94%) 만든다. 


원료별 분류

엿기름만을 사용하는 것을 퓨어(싱글)몰트위스키, 엿기름 외에 옥수수나 호밀을 사용하는 것을 그레인위스키라 한다. 또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은 것을 브랜드 위스키라 한다. 


산지별 분류

스카치위스키(영국) · 아이리시위스키(아일랜드) · 아메리칸 위스키(미국) · 캐나디언 위스키(캐나다) 등으로 나누어지며 각기 독특한 향미가 있다. 스카치위스키는 곡류로 만든 전국을 증류한 것으로, 엿기름을 당화시키고 효모를 발효하여 스코틀랜드에서 증류한 뒤 통에 3년 이상 저장시킨 것이다. 수많은 상표명이 있으나 DCL에 속하는 조니 워커 · 화이트라벨 · 화이트호스 · 존 헤이그 · 블랙앤드화이트 · 킹오브 킹스 · 올드파 등이 예로부터 유명하다. 
 
 
 









요즘은 순한 타입을 좋아하여 커티샥 · J&B 등이 알려졌고, 순 몰트위스키로는 더 그레린베드 등이 인기가 있다. 라벨에 12years old라 적혀 있는 경우는 조합한 위스키 중 저장연수가 가장 짧은 것을 나타낸다. 증류한 곳에 따라 하이랜드(피스 이북의 고지대 주산지) · 로랜드(에든버러 · 글래스고 등 로랜드지방) · 아일레이 · 캠벌타운 등 넷으로 분류된다. 아이리시(스트레이트)위스키는 위스키의 원형이라고 하는데, 엿기름 건조에 토탄을 사용하지 않아서 연기냄새가 나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원료는 엿기름 · 미발아보리 · 옥수수 · 호밀 · 귀리 등을 섞어 쓰며 대형의 포트스틸식으로 증류를 3번 한다. 보리 특유의 향기가 나며 맛은 산뜻하다. 최근에는 그레인위스키와 블렌드 위스키가 많다. 주된 상품명은 존파워 · 존제임슨 · 올드부시밀스 · 타라모어듀 등이 있다. 아메리칸 위스키에는 많은 종류가 있으나 거의 강렬한 성질의 스트레이트버번위스키와 부드러운 타입의 블렌드위스키이다. 스트레이트버번위스키는 원료에 51% 이상의 옥수수를 사용할 것, 저장용 통은 내면을 태운 새통을 쓸 것을 규정하고 있다. 또 사워매시라는 유산균을 사용하는 특유한 발효법을 쓰는 곳도 있어 버번의 <감칠맛>의 일부는 이 독특한 발효법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잭대니엘 · 올드크로 등이 유명하다. 캐나디안 위스키는 캐나다에서 많이 수확되는 보리와 옥수수를 사용하는 것이며, 원료와 제조법이 모두 아메리칸 위스키와 유사하나 증류법과 숙성법의 차이로 세계에서 가장 라이트한 것이 특징이다. 주요 상품명은 캐나디언클럽 · 시그램 · 셰인리 · 맥기네스 등이다. 


∙일본 위스키


전쟁 전, 영국에 간 타케츠루 마사타카竹鶴政孝는 스카치 위스키의 제법을 배워서 일본에 돌아와, 코토부키야壽屋(지금의 산토리)에서 일하게 된다. 이후, 그는 닛카 위스키를 창업하는데, 이런 연유로 일본을 대표하는 두 위스키회사의 제품에는 타케츠루의 영향이 짙게 남아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처음에 타케츠루가 목표한 본격적인 위스키는 가격이 비싸고, 또 스카치 특유의 중후한 풍미가 오히려 소비자들에게는 맞지 않아, 서민들은 토리스를 비롯한 싸고 질이 좋지 않은 제품들만 소비하였다. 한편 고급품은 조니 워커가 대명사로 남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그후, 산토리 · 닛카 두 회사는 독자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세계적으로도 최고급 품질의 위스키를 생산하게 되었다. 최근 수 년, 일본 위스키가 국제적인 품평회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으며, 세계 5대 생산지로서 인정받고 있다.


 
 
 
 



‣ 소주(焼酎)


중국에서는 증류주를 지칭해 焼酒(샤오츄) 또는 白酒(파이츄)라고 부르는데, 「焼」는 증류, 「白」은 無色透明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焼酒가 焼酎의 어원임을 알 수 있다. 증류주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宋나라 시대였다고 전해지고, 샴(지금의 타이)에서 소주가 중국 국내에 전해진 것이 11세기 서책에 나와 있다.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조선에서 소주가 처음으로 일본(對馬島)에 전해졌다고 한다. 
 

일본의 소주는 쌀, 감자, 메밀, 보리 등을 원료로 하여 독특한 향이 있는 소주가 많은 것이 특색이다. 카고시마鹿兒島의 이모쇼오츄芋燒酎(감자소주), 쿠마모토熊本의 쿠마쇼오츄球磨燒酎 등이 그러한데 그 외에도, 지방의 특산물화 된 소주가 많다. 소주(燒酎)는, 이전에는 그 지방에서밖에 마시지 못했던 것이 이제는 전국적으로 팔리게 되어, 1984년에는 소주의 소비량이 전년도에 비해 50%나 신장되는 소주 붐이 일어났다. 탄산을 탄 탄산와리炭酸割り나 우롱차를 탄 우롱와리ウ-ロン割り 등 다양하게 마시는 법이 생기고, 거기다 값이 싸서 젊은이에게 인기가 있다.







Ⅲ. 일본의 住생활

 

인간의 삶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衣 ‧ 食 ‧ 住인데, 이 행위들은 집이라는 공간에서 보통 행하여지기에 의식주 중에서도 住는 가장 기본이며 중요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住”라 함은 사전적 의미로는 '살다, 머무르다'란 의미가 있다. 동물들이 자연 속에서 자신이 살아가기에 가장 알맞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로 살기 좋은 곳에 자신의 쉼터, 보금자리를 만들어 집이라고 부르며 그곳에서 살아왔다. 집은 모든 삶을 위한 활동의 거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은, 아침에 일어나서 일상생활을 보내고 편안하게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며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 욕구를 해결해 주는 곳, 그리고 식사를 하면서 가족끼리의 화목을 이루는 곳 등 문자 그대로의 의미 외에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한편 주거환경은 어떤 나라 어떤 민족이든 터를 잡고 살아온 땅의 기후나 생업, 지리 등 생태학적 환경과 직접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사회 문화적 조건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수천 년, 수백 년을 내려오면서 나름대로의 특징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주생활도 마찬 가지로 일본의 자연, 사회적 환경을 배경으로 발달하여 왔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일본 주택의 역사


■ 고대

‣ 원시, 고대 

수혈주거(竪穴住居), 고상식주거(高床式住居) -  움집의 형태


‣ 헤이안平安 시대

귀족의 주거지로서 신덴즈쿠리寢殿造り가 성립했다. 서민의 주거는 변함없이 수혈주거가 주류를 이루었다. 


 
 









■ 중세

‣ 카마쿠라鎌倉 시대

카마쿠라 시대 무사의 집은 무케즈쿠리武家造り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지만,  신덴즈쿠리를 간략화 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 무로마치室町 시대

지금의 일본풍 주택의 원형이 성립한 시기이다.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3대쇼오군)의 저택은 아직 신덴즈쿠리의 모습이 남아있었지만, 히가시야마문화의 시대,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8대쇼군)의 저택은 쇼인즈쿠리書院造り라고 불리는 원형을 보이는 주택의 형식을 취하였다. 타타미를 빈틈없이 깔고 쇼오지障子를 사용하였으며, 도코노마床の間 등의 자시키카자리座敷飾り(도코노마와 같이 응접실의 기능에 부합되는 장치를 붙박이로 설치한 것)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 아즈찌 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한 천하통일은 일본 주택에 있어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노부나가의 아즈찌성이나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오사카성 등과 같이 자신의 서열을 나타내 권력자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쇼인즈쿠리書院造り를 완성했다. 가신들은 죠오카마치城下町에 살도록 명령을 받아, 도시건축도 함께 발달되었다. 상층계급의 주거지로서 쇼인즈쿠리가 정착해 에도 시대 이후에는 다실의 요소를 도입한 이른바 스키야즈쿠리數寄屋造り(다실풍의 품위 있는 건축)의 주택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 근세

‣ 에도江戶 시대
 

에도 시대에 들어오면서 서민의 주택도 점점 발전하게 되었다. 근세초기, 관동에서 일반적인 농민의 주거는 도마土間(봉당- 안방과 건넌방 사이의 마루를 놓을 자리에 마루를 놓지 않고 흙바닥으로 그대로 둔 곳)에 이로리를 만들어서 바닥에 돗자리 등을 까는 것 같은 것이 많았다. 공법도 굴립주(掘立柱)를 세워, 풀로 지붕이나 벽을 만들었다.

농가도 점차 발전해서 도마土間를 부엌이나 작업장 등으로 사용해 마루를 만들어 식사나 취침을 위한 방이 만들어졌다. 공법도 초석의 위에 기둥을 고정시켜서 대들보를 복잡하게 맞추어 만드는 식으로 변해, 한층 세련되고 복잡한 기술을 요하게 되었다. 단, 흙벽이나 카야부키茅葺 지붕은 가족이나 부락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에도 시대 후기이후에는 밭전 자 모형의 방의 배치가 널리 보급되었다.  이 배치는 결혼, 장례식 등 사람이 모이는 행사에 사용할 것을 의식한 것으로 용도에 맞춰 후스마를 열고 닫아서 사용하였다.


■ 근대

‣ 메이지明治 시대

메이지 시대가 되자 건축에 관한 봉건적인 규제가 없어져 자금력에 따라서 주택을 만들게 되었다. 서양건축의 기술도 도입되어 공구나 도구의 질도 높아지고, 직공들의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건축의 질은 전체적으로 향상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식의 주택에 사는 것은, 정치가나 실업가 등 매우 한정된 계층의 일부의 사람들로, 대부분은 일본식주택에 살았다.


 
‣ 타이쇼大正 시대

이쇼 시대 이후 샐러리맨이나 도회지식인들이 서양식 생활을  동경해 일부 서양식을 도입한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문화주택이 도시교외에 많이 지어졌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신발을 벗고 타타미에서 쉬는 생활풍습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 근대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주택난 속에서 공단주택 등 대량공급형의 주택이 만들어졌고 다이닝 키친 등이 새롭게 고안되었다. 
 
옛날에는 토코노마가 없는 집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서양풍의 집이 보급되어 와시츠和室(일본식 방)가 없는 집도 들어, 토코노마가 있는 집이 오히려 드물게 되었다. 또, 예전의 주택은 농가이건 상가(商家)이건, 생업과 연결된 직주일치(職住一致)가 많았지만, 현재는 직주분리의 경우가 주류가 되었다. 




2. 일본 주택의 특징


■ 지역에 따른 특징

‣ 홋카이도오北海道

서양식의 거실 중심형이 많고, 겨울철 많은 눈과 여름철의 잦은 비 때문에 지붕이 급경사 를 이루고 있다. 냉대 기후로 긴 겨울과 추운 날씨로 보온을 위해 폐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 혼슈우本州

대지 면적이 작기 때문에 대부분 2층의 형태를 하고, 평면, 외관의 서양화와 넓은 거실중심

의 구조를 가졌으며, 남부와 북부의 중간적인 구조형태이다. 일본식이 다수이다.


‣ 산요오山陽

산림형, 온난형, 태풍형에 따라 3가지 주택양식을 보인다. 서양화가 진행되고 있는 형태이며 여름철 고온 다습한 기후 때문에 개방적인 구조가 많이 보인다.


‣ 큐우슈우九州

구조가 단순하고 아열대 기후의 특성상 여름이 무더워 개방적인 구조에서 남부와 북부의 차이를 보여준다. 서양화로 인한 거실 중심의 형태이다.


■ 자연 환경에 따른 특징

‣ 자연재해

특히 지진을 대비한 주택문화가 발달되어있다. 겉으
 
로 보기에는 약해 보이지만, 지진에 잘 견딘다. 창문은 크지 않으며, 목조건물이어서 지진으로 붕괴되어도 콘크리트와 같은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다만 화재위험이 매우 크다는 단점이 있다. 95년 코오베神戸 지진 때 6천 여명의 사망자를 낸 것도 목조 건물이 많아 화재로 인한 피해가 절반 이상이었다. 같은 정도의 지진이 터키나 대만에서 일어났을 경우를 보면 목재건물이 적어 화재로 인한 피해가 적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따라서 벽재로는 몰탈을 섞은 콘크리트를 사용하고, 책꽂이나 장롱과 같은 가구는 벽에 고정시켜 지진으로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도록 하고 있다. 


‣ 타타미문화

일본은 지진이 많기 때문에 온돌과 같은 난방 시설을 설치하기가 어렵다. 또한 여름은 습기가 많아,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주는 타타미를 방안에 깐다. 내부구조의 서구화에도 불구하고 타타미로 방을 꾸미는 것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타타미에 사는 다니(진드기의 일종)는 주택의 구조와 관계없이 살고 있다. 타타미에 벌레가 많이 사는 것도 일본 주택문화의 특징이다.



‣ 목욕문화

주택의 형식과 구조에 관계없이 설치되어 있는 것이 목욕탕이다. 일본에서는 지진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에 온돌과 같은 난방시설을 기피해왔다. 따라서 저녁이 되면 몸을 따듯하게 해주어 몸의 컨디션을 조절한다. 이런 습관은 일본인이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목욕을 한다기보다는 그런 열악한 난방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생활지혜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시이레押し入れ(벽장)의 문화

일본에는 주택 내에서 가장 큰 방에 벽장이 있어 이불 등을 넣을 수 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장롱이 필요 없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치부를 잘 드러내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국민성이 엿보이는 형식이라고 하겠다.


‣ 코다츠 문화

일본은 온돌과 같은 난방시설을 하지 않기 때문에 거실에는 전기난로가 부착된 코다츠를 놓는다. 여기서 차를 마시고 몸을 녹인다. 그런 환경은 차 문화의 발달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주택문화는 의식문화와 마찬가지로 매우 검소하다. 


3. 일본 전통 주택의 구조


■ 헤야部屋 (방)

일본식 방은 두칸의 방이 후스마(맹장지)라는 
 
문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용도에 따라 방의 크기를 조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깥쪽은 쇼오지障子(장지)로 되어 있는데, 아래쪽 반은 유키미마도雪見窓라하여 위로 올리면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쇼오지 바깥쪽에는 엔가와(緣側)라는 툇마루가 있고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리문 덧문을 설치했다. 일반가옥의 방바닥에는 직사각형의 타타미가 깔려있으며 타타미에서는 실내화를 신지 않으며 나무로 된 마루에서만 실내화를 사용한다. 응접실은 자시끼座敷라고 하는데 꽃꽂이, 조각 등을 진열해 놓았으며, 액자와 예술품 등을 거는 도코노마(床の問)가 딸려있다. 
 
 


■ 후로風呂 (목욕탕)

일본식 목욕탕은 일반적으로 화장실과 분리되어 별도로 되어있다. 욕조 자체는 직사각형으로서 넓지는 않지만 깊이는 서양식 욕조나 한국의 욕조보다도 훨씬 더 깊다. 일본식 목욕탕을 사용할 때 유의점은 몸을 씻는 일은 욕조 밖에서 해야 하며 몸을 씻고 헹군 다음에 욕조 안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잠겨 피로와 긴장을 푼다. 일본사람들은 거의 매일 목욕을 하며 뜨거운 욕조 물에 몸을 담금으로써 피로를 푸는 것이 하루의 일과로 되어있다. 그리고 목욕 후에 목욕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한번 받아서 데운 물을 가족이 모두 사용하며 각자 집안에서의 정해진 순서대로 목욕을 하기 때문이다.

 
 
 

■ 후통布団 (이불)

일본식 잠자리는 밤에는 타타미 위에 펴고 낮에는 개어서 벽장에 넣어두는, 후통布団이라 불리는 이불과 시키부통敷き布団이라 불리는 요를 사용한다. 일본식 방은 낮엔 음식을 먹고 공부하는 등의 모든 가족들의 생활공간이므로 실내공간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먼저 이부자리를 개는 것이 예의이다. 

■ 타타미

‣ 일본식 타타미

타타미란 한자로 (たたみ:畳)이라고 쓰며 원래 뜻은 접다   〮겹치다 는 의미로서 속에 볏짚 같은 것을 종횡으로 엇갈려 차곡차곡 쌓아 만든 것으로 약간은 푹신하고 얼마간은 자연적인 맛을 나게 하는 이른바 볏짚 매트리스라고 말할 수 있다.

처음 만든 타타미는 상당히 오랫동안 마른 풀잎 냄새가 풍기므로 처음에는 역겹기도 하지만 농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고향의 향수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타타미는 재료가 부족했던 옛날에는,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이용한 아주 현실적인 바닥재라고 말할 수 있다. 타타미는 한 5년 쓰고 나면 교환해 주어야 하는데, 뒷면을 뒤집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이를 우라카에시裏返し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한번 밖에 할 수 없으므로, 교환해 주어야 하는데, 타타미를 만드는 집이 현대에도 없어지지 않고 주택가에 자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본은 섬나라기후로서 특히 습기가 매우 많은 나라이다. 그러므로 타타미는 습도가 높은 여름철이면 습기를 빨아들이고 겨울철 난방장치가 없어도 방바닥이 아주 차가워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런가 하면 무릎을 끊고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일본인들의 생활 습관상으로도 타타미가 딱딱한 맨바닥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방 영주들 간의 전쟁 시에는 적을 막는 화살막이라는 훌륭한 방어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단점을 든다면 장마나 물을 흘렸을 경우 햇볕에 말려야 하는 등 관리가 번거로우며 벌레나 진드기 같은 세균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

타타미를 까는 방법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용도에 따라서 몇 장의 타타미를 어떻게 까는지가 정해져 있기도 한다, 일본사람들은 방의 크기
 
를 말할 때 지금도 ‘타타미 몇 장(죠)’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즉 타타미 6장 크기의 방이면 보통 정도의 크기이고, 8장짜리 방이면 조금 큰 방이다. 4장반정도짜리 방이면 어른 두 명이 겨우 잠을 잘 수 있는 크기를 말하는데, 대체로 4,6장 형식의 방이 하나 또는 두개짜리에 부엌  〮화장실 〮목욕탕이 첨가된 것이 일본의 일반적인 주거양식이라 말할 수 있다. 


‣ 정좌의 유래

다실에 타타미는 겨우 4장반으로 많은 손님들이 몰려 앉게 되면, 책상다리는커녕 무릎 

꿇는 일본식 정좌에도 다실은 그만 포화상태가 된다. 쿄오토京都 대학 경제학 박사인 오시다 마사아키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릎 꿇는 정좌는 다실의 좁은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불과 타타미 4장반 크기의 다실에 10명씩 앉는 경우 책상다리로는 모두 앉을 수 없습니다. 이 다도에서 정좌는 금세 일어서기 힘들다는 데서, 반 공격적입니다. 즉 평화적인 자세라는 데서 일종의 예법이 되었습니다. 다도를 배우게 된 무사들도 정좌를 하면서 그것이 일상생활에도 침투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왕족이며 귀족이나 신사의 신관과 사찰의 승려들은 무릎을 꿇지 않고 책상다리를 했다고 합니다. 일본 시대극이나 영화 장면을 보더라도 귀족이며 무사, 조정의 중신들은 항상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작아지고 있는 타타미 

길이가 ‘5자 6치’ 정도의 것을 가리켜 코로쿠마ころくま라고 부르고 있다. 근년에 신축되는 가옥 특히 맨션이나 공단 주택단지에 이것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명칭도 단치마たんちま(단지규격) 라는 것이 등장하였다. 

이는 건축업자들이 타타미의 길이를 줄임으로써, 방의 크기를 작게 조종하여 공사비를 절약하는데서 생겨났다고 한다.  따라서 요즘 일본에서 새로 짓는 대단지 주택일 경우, 타타미가 표준형이 아닌 크기가 약간 작은 ‘단치마’의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 니와 (정원)

일본의 고옥(古屋)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나무를 다루는 독특한 문화에서 비롯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원이나 분재로 주택을 장식하며 목재를 많이 사용한다. 대체로 건물은 장식이나 화사함을 추구하기보다는 내부 공간과 자연 공간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다.  일본의 집들을 관찰해보면 단독주택의 경우 인공정원을 만들거나 미니정원을 만들어 자신만의 독특하고 소박한 정원을 꾸민다. 마당이 없는 경우 자기 집 앞에 화분을 나란히 놓아 꽃을 기르는 집도 많다. 이 때문에 골목에 들어서면 벽을 따라 촘촘히 화분이 놓여 있는 곳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 오시이레押し入れ (붙박이장)

이불 등을 넣기 위해서 만들어진 붙박이장으로 물건을 
 
넣어두는 곳이다.

타타미방의 한 면에는 보통 붙박이장이 있는데, 깊이가 90cm에서, 폭은 방의 크기에 따라서 90cm, 180cm, 270cm로 되어있다. 미닫이문으로 되어있어 옆으로 밀어서 열고 닫으며, 문은 종이로 발려있다. 내부는 위아래로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주로 위 칸에는 이불을 밑에 칸에는 물건을 넣어둔다.


■ 부쯔단仏壇 (불단)
 

일반가정에서 조상의 위패나 불상을 모시는 곳이다.

옷장이 각 가정에 당연히 있는 것처럼 부쯔단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각 가정에 반드시 있었다. 하지만 집값의상승, 신앙심과 조상경배사상의 상실로 인해 부쯔단이 있는 가정이 격감했다. 그렇다 해도 아직까지 노인층에는 부쯔단을 모시는 집이 많다고 한다. 


■ 코다쯔こたつ

상밑에 방열 기구를 놓고 그 위에 이불을 덮은 
 
형태의 겨울철 난방기구로 사람들은 이불 속, 상 밑에 발을 넣고 정담을 나눈다. 한국과 같은 온돌장치가 없는 일본에서는 겨울나기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품목 중 하나이다. 코다쯔는 일본의 전통적인 난방기구로, 현대는 전기를 이용해 보온을 유지하는 작은 용기위에 야구라라는 나무틀을 설치하여 그 위에 이불을 덮어서 만든 것이다. 이불안에 발을 넣어 따뜻하게 하는 방법으로 매우 경제적이여서 서민 가정에서 특히 사랑을 받고 있다. 이불위에 네모난 판자를 놓아 식사할 때는 
식탁으로, 보통 때는 다용도 책상으로 사용하므로 겨울철 가족생활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 토코노마床の問

서화를 걸거나 화병이나 장식물을 놓기 위해 바닥
 
을 한단 높여 놓은 곳으로 좌식형 일본 가옥에서는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실내 장식이다. 기원은 무로마치시대 일본의 전통예술인 다도, 꽃꽂이 등의 장식이 확립되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토코노마는 전통적인 분위기로 문학적인 의미를 지녀야만 했으며, 성스러우며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했다. 


■  이로리囲炉裏
 

일본 민가의 큰 특징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실내 마루방 입구에 놓인 이로리(화덕- 방바닥 또는 마루바닥을 네모나게 파서 그 가운데 난방 겸 취사를 위한 화로를 놓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일상적 식사는 이로리 주변에 둘러 앉아 하며 가족의 서열에 따라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이 이로리는 우리나라 제주도 가옥에 있는 ‘봉덕’과 그 형태나 사용 용도가 아주 흡사하다. 

 

■ 아마도雨戸

비바람이나 도난을 막고, 실내 보온을 위해 전통가옥에서는 유리창문의 밖에 아마도라는 두꺼운 판자로 된 덧문을 설치한다. 해가 뜨면 이를 열고 밤에 다시 닫는다. 발처럼 생긴 스다레(발)를 아마도 밖에 매달아 강한 햇빛을 차단한다.




4. 거리 경관을 조성하는 전통주거


■ 마찌야

마찌야町家는 일본의 전통적인 도시주택이다. 이 주택은 
 
도로에 면해 접하도록 지은 단층주택으로 일본 각지에 아름다운 마을 풍경을 남기고 있다. 마찌야는 한 곳에 모여 마을을 만든다는 기본적인 성격을 갖춘 주거이며, 그 특징은 「고밀도 주거 생업과 가족생활의 양립」이다.

전통적인 마찌야는 전국 각지의 마을 풍경에 따라 그 특성이 다르고, 외관과 구성에 다양한 양식이 있다. 주거가 점포부분과 주거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에서는 기본적인 공간구성에 공통점이 있고 점포나 일터, 작업장으로 사용되는 부분과 주거부분은 각각 독립된 두 개의 동(棟)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 고밀도주거의 고안

마찌야에는 높은 인구밀도를 가능케 하는 구성이 있다. 

우선 첫 번째로는 주택의 전면 폭이 좁고 종축의 치수가 긴 사각형 대지이다. 실제 교토에서는 1ha당 약 300인의 인구밀도를 가진 마찌야 지구가 있으며, 이 좁고 긴 대지에 건축되는 건물은 원칙적으로 인접한 토지와의 경계에는 개구부(창)를 갖지 못하고, 옆집과는 건물을 접하며, 좁은 전면 폭을 최대한 이용한다.

두 번째로는 모든 주택이 일정한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마찌야는 전면부터 점포부분, 주거 부분, 츠시厨子 정원 그리고 창고 등의 부속 건물의 순으로 배치된다. 뒷 정원에는 옥내의 주거환경을 확보하기 위해서 자연과 접촉되는 장소를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마찌야는 일정의 형식을 갖고 있으며 이것이 지역의 규범이 됨으로 해서 높은 인구밀도와 쾌적한 거주 환경을 확보한다.


■ 마을정경의 형성

마찌야의 점포부분은 옆집과 간격을 두지 않고 건설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각 집의 전면이 서로 옆집과 연속되어 있고 가로는 긴밀하게 둘러싸져 있는 외부공간이 된다. 그것을 

기본을 공동체로서의 마을도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점포부분 건물의 높이나 재질은 대부분 정렬되어 있으며 통일감이 있다. 이것은 그 지역에서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이용한 동시에 서로 주위와의 조화를 의식해서 건축하는 태도가 지배적이다. 

이처럼 마찌야는 일정한 환경이 확보된 주거와 번화한 가로공간을 양립시키면서 마을 정경속의 주거가 되어 있다.


■ 마찌야의 변용과 유지

제2차 대전이후 마찌야는 거의 계승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로는 

첫째, 상공업의 변화이다. 가내수공업과 소규모 상업이 이뤄졌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발전으로 상ㆍ공업이 대규모화되고 직장은 주택에서 배제되었다. 

둘째, 교통의 증가로 자동차의 보급이 많아졌다. 이로써 마을 정경은 도로에 의해 양측이 분단되고 가로는 더 이상 에워싸진 공간으로 남을 수 없게 되었다. 

셋째, 지역과의 관계변화이다. 마찌야는 지역의 규범에 따라서 건설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택건설 과정에서 법적으로 규정된 용적률을 최대한 이용하고, 자신들의 집을 조형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에만 주목하여 주위보다 높은 건물이 세워졌다. 

넷째, 환경의 가치를 상실하고 그저 오래된 것으로만 취급하는 관점을 갖게 되어 문화로서 공유되지 못하게 된 점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용에도 불구하고 마을 정경을 
 
유지하고 재생하려는 움직임도 각지에서 활발히 보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관광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그 예로는 교오토京都나 카나자와金沢처럼 음식문화, 의류, 예능 등을 포함한 전통문화의 일부로써 마찌야가 존속하고 있는 곳도 있다. 이렇게 개개의 주택이 마을과의 관계를 생각하고, 지역문화를 재생해 가는데 있어서 지금까지의 운영이 남겨준 가장 좋은 재료라고 할 수 있다. 




5. 현대 일본 주택의 형태


일본 현대 주택형태의 기본형은, 타이쇼오大正 시대(1912~1925)에서부터 쇼오와昭和 시대(1926~1988)초기에 확립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서양식 생활양식이 널리 계몽, 도입되어, 에도江戸 時代(1603~1867년)의 전통적 양식을 계승한 주택양식에서 근대적 주거양식으로의 개혁이 추진되었다. 1920년 문부성은 저명한 학자 및 교육자들을 모아서 생활 개선 동맹회를 결성하여, 의자식 생활도입을 권유하는 한편, 부엌의 근대화, 거실, 아이 방, 주부 공간 등의 설치를 제언하고 있다. 손님 접대를 중시하던 모습의 주거에서 가족본위로 변환하게 되었다.

일본의 집을 비유하기를 うさぎ小屋(토끼집)이라고 하는데, 기껏 20~25평 아파트 수준의 주거시설을 말하며, 도심 한복판일수록 더욱 평수가 작아지며, 영국작가 윌리엄부르마는 「종이집」이라 불렀고, 타임지에서는 「성냥곽집」이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거의 1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말만큼이나 유명해진 「토끼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였다. 이는 바로 EC위원회의 비밀리포트(1979년)의 일정에 「Workaholic(일중독)」과 나란히 적힌 표현으로 일본인들의 주거의 현실적인 문제 또한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가는 선진국 일본이지만, 일본인들은 이곳에서 살아가며 소시민적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 만숀マンション(맨션)

전후에 보급된 맨션(프랑스어로 대저택의 의미)은 1962
 
년 도쿄의 부동산업자가 사용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제1차 맨션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 맨션은 교통과 편의 시설이 좋은 위치에 있어 대체로 가격이 비싸다. 콘크리트로 만들어 비교적 튼튼하며 기존의 주택보다는 현대적인 시설을 겸비한 주택이다. 쇼와40년대(1965- 1974년)전반까지 서민들에게는 전혀 손에 미치지 않는 고급집합주택의 일반명칭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일반 서민용의 패밀리 맨션, 독신자용 원룸 맨션 등으로 다양화 되면서 점차 고급이라는 이미지는 엷어지게 되었다.



■ 아파트アパート

미국식 주택양식인 아파트라 불리는 집합주택이 
 
등장하였다. 본격적인 것으로는 미국인 건축가 W.M 보리즈가 도쿄에 설계하였던 <문화 아파트>(1924년)가 유명하다. 목조건축 또는 조립식건축으로 보통은 2층의 집합주택, 부엌, 화장실, 목욕탕이 있다. 높은 층의 방일수록 방세가 비싸며, 방2개 또는3개, 거실 겸 부엌 1개, 목욕탕과 화장실 겸용 1개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최근의 아파트는 구조가 합리적으로 되어 있지만 옛날구조는 현관을 들어서면 작은방이 있고 미닫이를 건너 큰방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따라서 큰방을 출입하기 위해선 작은방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리고 일본주택에는 덧문이 있어 낮에는 열어 놓고 저녁이 되면 닫는다. 건물재료는 얇은 나무와 가볍고 얇은 특수재질을 사용한다. 그래서 소음을 차단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일본의 주택을 1970년대 로마클럽의 토끼집이라고 빗대어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아파트를 보고 말한 것이다.
아파트 중에서 2DK라 불리는 것은, 일본주택공단이 개발한 공단주택의 표준적 배치로 주택평면에서 2침실+다이닝+키친의 평수 13평의 주택을 의미한다.  앞의 숫자는 침실의 수를 의미하는데, 예를 들어 3LDK라 함은 거실과, 침실 
 
3개에 다이닝과 키친이 있는 주택을 말한다. 2DK는 태평양 전쟁 후, 일본이 어려울 때 일본의 서민에게 공급한 소형주택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도시를 중심으로 급증하는 샐러리맨 세대를 수용하기엔 기존의 주택은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고, 일본정부는 도시 노동자들의 주택수요에 대응하기위해 1955년 ‘일본주택공단’을 발족하였다. 서민의 주택문제 해결은 당시 하토야마鳩山내각의 선거공약이기도 하여, 정부는 주택공단을 통해 빠른 속도로 주택보급을 늘려나갔다. 특히 주택부족이 두드러진 대도시 주변에 소위 단지라고 하는 새로운 주거양식이 급속도로 일반화되어 갔다. 2DK 표준화된 아파트의 등장은, 비슷한 모양을 한 대규모 단지의 집단주택으로 대량의 인간을 능률성 있게 수용, 거대한 상자의 집합 같은 비정함마저 느끼게 하지만, 많은 일본인들이 지향한 또 다른 ‘표준화된 삶의 양식’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주거방식은 그에 적합한 가구나 가전제품의 수요의 증대, 내수확대로 연결되었고, 그 내부에 생활의 합리화와 전통 가족제도의 붕괴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주생활의 변화만이 아니라 관계의 변화, 의식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 잇코타테一戸建て(단독주택)

일본 사람들은 아파트보다는 개인주택을 선호하
 
는 경향이 있다. 평범한 회사원들이 집을 사려면 한평생 은행 빚을 갚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내부구조는 아파트와 거의 비슷하지만 정원이 있고, 대문주위로 소나무를 장식하며, 이 소나무는 연중행사 특히 정월행사에 쓰여 진다. 그리고 대문을 들어서면 2층의 목조건물이 있다 마당에는 자연을 가까이하는 마음이 있어서인지 작은 미니정원(箱庭)을 만들어 대나무나 분재 같은 작은 나무들을 가꾸며, 작은 연못에 잉어나 금붕어를 기르고 있는데, 일본의 정원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특히 공간이 좁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정원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일본 집 담은 아주 낮거나 동백꽃 등의 관엽수를 심어 놓기 때문에 밖에서도 안이 들여다보이는 경우가 많다. 


6. 일본의 주택제도


오늘날 일반적으로 집을 얻을 경우 복덕방에서 소개하는 ‘얼마만한 방이 몇 개이며, 집세가 얼마 되는지’하는 기준은, 일본에서는 ‘몇 죠 타타미 방이 몇 개,’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복덕방 입구 유리문에 붙여 놓음으로써 일반임대세입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대체로 임대기간은 2년을 기준으로 하고 있고, 우리나라 같은 전세는 거의 없고 모두 월세로 되어있다.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을 사용하여 더럽혔다는 청소비와 타타미 교체비용 등을 포함하여, 레이킨礼金 ‧ 시키킨敷金 등을 내야 하므로 빈번한 이사는 많은 손실을 가져다 줄 수 있다.


 
■ 월세제도

일본의 주택제도는 전세제도가 없고 월세제도로 계약한다. 월세제도는 매달 계약한 일정한 금액을 거주자가 지불하는 제도다. 처음 계약할 때는 월세의 5~6개월분을 지불해야 한다. 2개월분은 집주인에게, 또 2개월분은 보증금, 1개월분은 복덕방에 주는 소개비이다. 이때 보증금은 계약기간(2년)이 만료되어 나갈 때 주택의 훼손 정도에 따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는 돈이다. 주택의 훼손 정도를 파악하는 객관적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시비가 될 여지가 있다. 재계약을 하게 되면 집주인에게 2개월분을 주면 된다. 이런 주택제도는 주택을 마련하기 위해 일시에 많은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서민들이 이용하기 쉽지만 목돈을 만들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 임대주택제도 

임대주택은 매달 일정한 임대료를 내야 하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 한편으로 관계기관이 건설해서 서민들에게 장기적으로 싸게 임대하는 공영임대주택은 사설임대주택과 비교하여 현저하게 싸다. 일본의 임대주택문화는 예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따라서 선조 대부터 임대해서 자식세대에까지 계승되고 있다. 이런 임대 기간이 오래된 집이나 땅은 임대자가 살 수 있는 권리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고 또한 집주인이나 땅주인이 임대자를 추방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 부동산 용어


‣ 시키킹敷金

보증금 같은 개념으로 집주인에게 수리비나 집세체납 등에 대비해 미리 받는 비용으로, 일반적으로 집세의 2개월분이지만 1개월분일 경우도 있다.


‣ 레이킹礼金

집주인에게 사례로 주는 돈. 집세의 1~2개월분을 주는 것이 관례이며, 이사 갈 때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다. 그런데 잘 찾아보면 의외로 레이킹이 없는 집도 있다. 



 ‣ 테스우료手数料

소개해 준 부동산에 주는 수수료, 일반적으로 집세의 1개월분을 지불한다.


 ‣ 야찡家賃

집세를 말한다.


 ‣ 보증인

방을 임대할 시 월세에 대한 보증이 되어줄 사람, 일본사람이거나 외국인일 경우 영주자여야 한다.


■ 상속세

일본의 상속세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인데, 지난 반세기 동안 땅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함에 따라 옛집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세금을 내기 위해 끊임없이 그 집들을 팔아야만 했다. 이렇게 해서 생긴 땅들에는 어김없이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단층짜리 목조건물이 서 있는 비좁은 공간을 따로 활용할 방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세무서는 역사적인 지역에 있던 옛 건물에 대해 거의 면세를 해주지 않았으며 중앙정부가 결정한 세금안내 지침 또한 요지부동이었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원인이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현재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 일조법

고층건물이 이웃집의 햇빛을 차단하는 행위를 제한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져 1960년대에 통과 되었다. 이법으로 인하여 대부분의 건물은 이웃집에 햇살이 들어설 공간을 확보해 주시 위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 모양이 되었다. 이러한 법규 때문에 도쿄의 경우 바닥 면적 대비 건축물 면적이 50%를 상회할 수 없는데, 이것은 파리와 로마를 포함한 세계의 어느 수도보다도 가장 낮은 것이다. 


■ 일본의 전화선과 각종전기선 

일본은 선진국 중 전화선과 각종전기선을 지하에 묻지 않은 거의 유일한 나라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본인들의 특유의 경제성 때문이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시작된 경제개발 운동은 케이블을 지하에 매설하는 것과 같은 일에 요구되는 노력과 비용은 산업에 필요한 자원을 잠식하는 호사스럽고 낭비적인 행위로 간주 되었다. 

두 번째로 70년대에 정해진 정책에 의해서이다. 케이블 매설에 익숙하지 않은 당시의 관료들은, 일본에서는 케이블을 매설할 수도 없고 또 매설해서도 안 된다고 믿었다. 이유는 지진이 일어날 경우 위험을 가중시킨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주장은 일본의 땅이 대부분 습하기 때문에 케이블을 매설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7. 일본식 주택에서 주의할 점 


일본식 주택의 현관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나올 때 신기에 편한 방향으로 돌려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인이 돌려놓지 않으면 집주인이 돌려놓는 경우가 있으므로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식 방에서는 토코노마의 앞부분이 가장 상좌이다. 방바닥 보다 약간 높으며 타타미 한 장 넓이의 좁은 공간이지만 옛날에는 더 넓어서 지위가 높은 집주인이 앉는 자리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손님으로 갈 때는 처음부터 그 앞에 가서 앉지 말고 안내 될 때까지 문 옆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이 예의이다. 

일본인은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우리처럼 많지는 않지만 초대받은 경우 손님에 대한 예우로써 목욕을 맨 먼저 할 것을 권한다. 습기가 많은 지역이므로 손님에 대한 가장 큰 서비스인 셈이다. 조심할 것은 목욕물을 한 번 데워 온 가족이 쓰게 되므로 탕 안에서 때를 민다거나 목욕물을 모두 빼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일본인은 집으로 초대하는 경우가 우리처럼 많지는 않지만 초대받은 경우 손님에 대한 예우로써 목욕을 맨 먼저 할 것을 권한다. 습기가 많은 지역이므로 손님에 대한 가장 큰 서비스인 셈이다. 조심할 것은 목욕물을 한 번 데워 온 가족이 쓰게 되므로 탕 안에서 때를 민다거나 목욕물을 모두 빼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