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일본사회와 문화






이진후





































 






































































차례  1

현대 일본사회와 문화





A. 일본 개관

Ⅰ. 일본의 인문 지리7

1. 개관7

2. 위치8

Ⅱ. 일본의 역사13

1. 원시사회13

2. 고대사회14

3. 중세사회17

4. 근세사회19

5. 근대사회22


B. 일본인의 의식주

Ⅰ. 키모노33

1. 키모노의 역사33

2. 키모노의 구조39

3. 키모노의 종류39

Ⅱ. 일본의 음식문화48

1. 음식49

2. 茶58

3. 일본의 술65

Ⅲ. 일본의 住생활73

1. 일본 주택의 역사73

2. 일본 주택의 특징76

차례  2

3. 일본 전통 주택의 구조78

4. 거리 경관을 조성하는 전통주거84

5. 현대 일본 주택의 형태86

6. 일본의 주택제도88

7. 일본식 주택에서 주의할 점91


C. 일본의 통과의례

Ⅰ. 일본의 결혼식93

1. 결혼식을 하기까지93

2. 결혼식의 형태95

3. 결혼 피로연98

Ⅱ. 성인식106

1. 성인식의 개요106

Ⅲ. 일본의 연중행사111

1. 오쇼오가츠お正月(설날)111

2. 발렌타인데이116

3. 세츠분節分117

4. 히나마츠리ひな祭り117

5. 탄고端午119

6. 오본お盆120

7. 시찌고상七五三121


D. 일본의 전통예능

Ⅰ. 카부키123

1. 카부키의 역사123

2. 카부키의 구성126

3. 카부키의 종류127

4. 카부키 용어128

차례  3

Ⅱ. 노오133

1. 노오能의 명칭133

2. 노오能의 역사133

3. 노오의 구성135

4. 노오멘能面138

Ⅲ. 분라쿠142

1. 분라쿠의 역사142

2. 분라쿠의 무대구성143

3. 분라쿠의 인형144

4. 극의 종류147

Ⅳ. 라쿠고149

1. 라쿠고의 역사149

2. 엔모쿠演目의 종류151

3. 표현의 양식153

Ⅴ. 우끼요에155

1. 우끼요에浮世絵의 역사155

2. 우끼요에浮世絵의 특징159

3. 해외에 끼친 영향159

4. 제재160

Ⅵ. 게이샤161

1. 게이샤의 정의161

2. 게이샤의 기원과 역사162

3. 게이샤가 되는 과정163

4. 게이샤의 역할과 예술적 측면164

5. 게이샤의 외관166

6. 대표적인 게이샤167

7. 현대의 게이샤168



차례  4

E. 일본의 문화

Ⅰ. 마츠리祭171

1. 마츠리의 개요171

2. 일본의 3대 마츠리173

3. 그 외 일본의 유명한 마츠리175

4. 일본의 이색적인 마츠리178

5. 마츠리의 꽃, 불꽃놀이182

6. 월별 일본 마츠리 편람185

Ⅱ. 일본의 영화186

1. 일본영화의 역사186

2.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200

Ⅲ. 일본의 城216

1. 城의 개요216

2. 일본의 城217

3. 일본의 城의 구조218

4. 대표적인 일본의 城223

Ⅳ. 일본의 정원236

1. 일본 정원의 역사236

2. 일본의 유명한 정원244

Ⅶ. 일본의 애니메이션250

1. 애니메이션의 역사250

2.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257

3.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258


F. 일본의 스포츠

Ⅰ. 스모285

1. 스모의 역사266

2. 스모의 구성270

차례  5

3. 경기 방식275

4. 스모의 기술279

5.  혼바쇼本場所280

6. 스모 선수들의 일생281

7. 일본 문화가 깃든 스모282

Ⅱ. 프로야구284

1. 일본인과 프로야구プロ野球284

2. 고교야구의 상징 ‘코오시엔甲子園’285

3.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285

4. 일본 프로야구 시스템287

5. 일본 프로 야구의 상징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과 암288

6. 데이터와 단체야구290

7. 취소된 홈런291

Ⅲ. 일본 프로축구293

1. 일본 프로축구의 역사293

2. J 리그의 구성297

3. J 리그의 정신299

4. 스포츠 마케팅300


■ 참고문헌 / 301





A. 일본 개관  7

A. 일본 개관


Ⅰ. 일본의 인문 지리


인문지리란, 지표(地表)에서 발생하는 인간 활동의 모든 
 
현상을 지역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지리학은 크게 인문지리학과 자연지리학으로 나누어진다. 현대의 인문지리학은 문화지리학・사회지리학・경제지리학・정치지리학・역사지리학 등으로 나누어지며, 인구・민족・취락・도시・농업・공업・상업・교통 등에 관하여 이들의 지리적 분포, 지리적 구조, 환경과의 관계를 연구한다.


1. 개관


일본은 아시아 동북에 위치하는 섬나라로, 4개의 큰 섬과 부속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4개의 큰 섬은 북으로부터, 홋카이도오北海道, 혼슈우本州,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순으로, 
 
이 4개의 섬을 일본 본토라 부른다. 또한 일본의 지리학에서는 이 4개의 큰 섬을 섬이란 개념에서 제외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예를 들면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이라고 할 경우는 혼슈우가 아니라 오까나와沖縄 본도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은 섬나라인 동시에, 국토의 약 73%를 산지가 차지하는 산악 국가이기도 하다. 때문에 일본의 하천은 경사가 심해, 비가 오면 단번에 흘러내려, 대륙의 강들과 비교했을 때, 폭포와 같은 성격을 지닌

A. 일본 개관  8

다. 게다가 다우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침식이 많이 일어나 산지에서는 깊은 V자 계곡을, 분지나 평야 등 산지에서의 출구부근에는 선상지가 발달되어 있다. 

일본의 바다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동쪽은 태평양, 북쪽은 오오츠크해, 서쪽은 동해, 남쪽은 동지나해로 불린다. 혼슈우本州와 시코쿠四国 사이의 바다는 세토나이카이瀬戸内海라 불리며, 많은 섬들이 점재한다.

해류를 보면, 일본 열도의 남단을 쿠로시오黒潮라 불리는 난류가 흐른다. 쿠로시오黒潮는 북쪽에서 오는 오야시오親潮와 혼슈우本州의 중간 지점에서 부딪쳐 어장이 형성된다. 

일본의 기후는, 열도의 중앙을 종주하는 산악지대를 경계로 서쪽과 동쪽이 크게 다르다. 홋카이도오北海道와 혼슈우本州의 고원지대가 아한대, 오끼나와沖縄 지방 이남은 열대, 그 이외 지역은 온대에 속하나, 남북의 기온차가 크다. 겨울에는 서쪽 지역은 시베리아에서 부는 계절풍에 의해 많은 눈이 내린다. 니이가타켄新潟県이나 토야마켄富山県 등 중부 서편 지방의 산간지방은 특히 호설지역으로 유명하여 유끼구니雪國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편 동쪽 지방의 겨울은 날씨가 맑으며, 펜 현상에 의해 건조한 날씨가 계속된다.

여름은 5월 하순부터 7월 하순에 걸쳐 장마가 계속되고, 장마가 걷히면 고온 다습한 여름이 시작된다. 여름에는 연일 최고 기온이 30도를 넘는 날이 많다. 


2. 위치


아시아 대륙의 동북쪽에 4개의 호상 열도(치시마千島 열도, 일본 열도, 류우큐우琉球 열도, 이즈伊豆・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로 구성되어 있는 섬나라이다. 동해를 사이로 러시아,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으며, 동지나해를 사이로 중국 및 대만과 인접해 있다. 

 

■ 경도와 위도에서 본 위치

‣ 최동단

토요쿄오토東京都 미나미토리지마南鳥島

(북위24도16분59초・동경153도59분11초) 

‣ 최서단

오키나와켄沖縄県 요나구니지마니시자끼与那国島西崎

(북위24도26분58초・동경122도56분01초) 

‣ 최남단

A. 일본 개관  9

토요쿄오토東京都 오끼노토리지마沖ノ鳥島

(북위20도25분31초・동경136도04분11초) 

‣ 최북단 

홋카이도오北海道 에토로후토오択捉島 카오미왓카カモイワッカ

(북위45도33분28초・동경148도45분14초) 


■ 면적

‣ 영토 

377,906.97 km²(2004年) 

‣ 영해 

3,091 km² 


■ 인구

일본은 인구의 5할 이상이 국토의 14%정도의 평야에 집중해 있다. 특히, 토오쿄오東京, 나고야名古屋, 오오사까大阪 지역에 인구의 5할이 집중해 있다. 이와 같은 인구의 차에 의해, 과소화・과밀화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인구의 변동은, 현재 증가에서 감소로 변하는 변환기에 있고, 인구 감소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세대별로는 2차 대전 후, 2번째 베이비 붐 때 태어난 세대가 특히 많은 점 외, 세계적으로도 65세 이상의 고령자의 비율이 높은 고령화 사회이며, 15세 이하의 인구 비율이 낮은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총인구의 구성(2004년 10월 1일 현재)단위 천명, %              인구 증가수 및 인구 증가율

구분

인구(구성비)

전년대비 증가수(율)

총인구


0∼14세

15∼64세

65세 이상

127,619(10)           184( 0.14)

62,304( 48.8)          52( 0.08)

65,315( 51.2)         132( 0.20)


17,905(14.0)        - 197(- 1.09) 

85,404(66.9)        - 302(- 0.35) 

24,311( 19.0          683( 2.89) 

 




A. 일본 개관  10

 
■ 지세

산지가 73%를 차지한다. 산간부에 규모가 작은 분지가 있으며, 연해안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펼쳐져 있다. 좁은 평야나 분지에 인구, 경지, 도시기능, 경제기능 등이 집중되어 있다. 특히 태평양 벨트 지대에는 도시기능이나 경제기반이 집중되어 있다. 때문에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고, 1970년대에 집중된 기능을 분산시킬 계획이 세워졌으나 아직 실행 단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다만 기업이 본사를 지방도시에 옮기는 등, 부분적으로 분산의 움직임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 주요자원

대체적으로 거의 모든 광물이 산출되나, 상업화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것이 대부분이거나, 석탄처럼 바탕이 난 경우가 많다. 단, 콘크리트의 원료가 되는 석회석은 국내 수요 이상으로 산출되고 있고, 또 요소는 세계적으로도 많은 양을 산출한다.

일본에서는 석유가 산출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보통이나, 일본 연해안에는 많은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고, 또한 활발하게 채굴되고 있다. 하지만 14, 5년 전에 채굴할 수 있는 석유는 거의 바닥이 나버려, 현재는 대부분의 지역이 경제성이 없기 때문에 채굴을 중지한 상태이다. 2003년 시점에서 액화석유가스는 일본 국내 수요의 약 33%, 천연가스는 약 3.5%를 산출하고 있다. 

옛날에는 일본 전국 각지에서 금이 산출되어, 화폐나 물품, 건조물 등에 사용되었다. 마르코폴로가 일본을 ‘황금의 나라 지팡’이라 불렀던 이유라고 말해지는데, 에도시대에서 메이지 시대에 걸쳐 해외로 대량 유출되어, 현재에는 거의 산출이 되지 않고 있다. 또, 은이나 동, 철 등도 금과 마찬가지로 현재는 매장량이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해저 자원에 관해서는 금속광물은 물론 천연 가스 등이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농산물에서는 쌀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품목을 자급할 수 없는 상태로, 수입 없이는 일본의 식량 수요를 충족할 수가 없다.


■ 기후

국토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탓으로, 열대에서 아한대까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다. 혼슈우本州(일부 지역은 제외), 시코쿠四国, 큐우슈우九州 지역의 대부분은 온대에 속하며, 

A. 일본 개관  11

 
그 외의 지역은 홋카이도오北海道 와 혼슈우本州의 고원 지대는 아한대, 카잔火山 열도・미나미토리南鳥 섬・오키노토리沖ノ鳥 섬・야에야마八重山 열도・타라마多良間 섬・오끼다이토오沖大東 섬은 열대에 속한다. 온대지역은 물론, 일본의 전 지역이 계절의 변화가 크고, 기후는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
여름은 장마로 시작되며, 5월 하순부터 7월 하순에 걸쳐 남쪽으로부터 장마가 걷힌다. 장마가 걷히면 고온 다습한 여름이 시작되는데, 심할 경우는 습도가 70%이상이 되는 날도 있다. 더위는 건조 지역의 섭씨 30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체력을 소모시키나, 반면 고위도임에도 벼농사를 할 수 있어 일본문화의 근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 태평양에 면한 지역은 연일 최고 기온이 섭씨 30도를 넘는 일이 허다하다. 일본의 여름은 태풍의 계절이기도 하다. 1946년에서 2000년까지 평균 연 3회 이상이 일본 본토에 상륙을 했으며, 많은 해에는 4, 5회나 상륙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전통적인 주택은 방을 벽으로 구분하지 않고, 후스마나 쇼오지障子와 같은 탈부착이 가능한 문을 사용하며, 또 바닥을 높이고 타타미를 까는 방식으로 고온다습한 기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전통적인 일본 주택은 점점 사라지고, 철근 콘크리트 주택으로 대체되면서 냉・난방기를 사용하게 된다. 특히 도시에서는 당연시되는데, 그 결과 히트아일랜드현상이란 국소적인 온난화가 문제로 부상하였다.


■ 자연

  일본 부근은 플레이트 이론 (plate tectonics)에 따르면, 유라시아 플레이트, 북아메리카 
 
플레이트, 태평양 플레이트, 필리핀해 플레이트의 4개의 플레이트가 서로 부딪치는 경계선에 위치하고, 조산 활동이 활발한 환태평양 조산대에 포함된다. 표층은 가장 오래된 기후켄岐阜県・나가노켄長野県부근도 약 2억 4000만 년 전의 것으로, 지질학적으로 신생대에 속한다. 때문에 화산의 분화가 각지에서 빈번히 발생함과 동시에, 매그니튜드(magnitude) 7에서 

A. 일본 개관  12

 
8 정도의 지진이 주기적으로 발생한다. 매그니튜드 4 정도의 지진은 거의 매일이라고 해도 좋은 정도로 빈번하게 발생하여, 지진대국이라 불리기도 한다. 또 플레이트의 움직임에 따라 국토 전체를 종횡으로 활단층이 달리고 있어 도시에 대지진이 직격하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하지만 화산 지대이기 때문에 온천이 풍부하고, 온천 지역은 대부분이 유명한 행락지가 되어, 국립공원이나 국정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국토 전체가 화산의 분화나 대륙이동, 퇴적작용 등의 활동으로 형성되었기에 험한 산지가 많고, 각지에 토사가 무너지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 환경

일본은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여 다채로운 생물이나 자연의 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독일을 비롯한 서구의 앞선 환경대책에 비교하면 환경 보호에 대한 대책은 아직 뒤쳐진 상태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공해로 인한 질병을 경험한 나라이기에 공해에 대한 대책은 앞선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대책은 아직 완전하지 못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고도성장기 이후의 식탁의 변화, 외국 농산품의 수입 문제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최근 농림 수산업이 크게 변화하였다. 










A. 일본 개관  13

Ⅱ. 일본의 역사


1. 원시사회


■ 日本列島의 形成

일본이 불완전하지만 열도의 형태가 형성된 것은 지금부터 약 500만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그 무렵에는 아직 유라시아 대륙과 붙어있었으며, 그 후 화산분화에 의한 지각변동이 있었고, 빙하기를 거치는 동안 지형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약 1만 3천 년 전부터 1만 2천 년 전 무렵부터 대륙에서 떨어져 현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 구석기시대

일반적으로 마제석기 사용이전이나, 토기 사용이전의 인류의 
 
전체 역사를 구석기 시대라고 하는데, 지역에 따라 같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순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류에는 현재의 인류(호모 사피엔스) 외에도 초기 인류인 네안데르탈인도 포함되어 있다. 일본열도에 가장 오래된 인류 유물은 약 3만 년 전에 출현되었다고 보이며, 조악한 석제가공 유물이 주류를 이루었다. 현재 확인되는 한, 이 유물들이 일본열도에 있어서의 인류 최초의 족적이라고 하겠다. 구석기 시대의 종언은 토기가 사용되는 죠오몽繩紋시대의 개시기라 할 수가 있다.


■ 죠오몽繩紋시대

죠오몽繩紋시대의 사람들은 竪穴式住居에 살았으며, 활과 화살로 수렵을 하였고, 패총에서 볼 수 있듯 어로, 식물의 채집과 조리, 재배를 하는 등, 다양한 수단으로 식량을 얻었다. 보존과 조리에 죠오몽 토기를 사용하고 다양한 용도로 타제석기 ‧ 마제석기와 골각기를 사용하였다. 사람들 사이의 교류는 넓은 범위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때로는 대규모의 일도 같이 한 흔적도 보인다. 죠오몽 시대의 사람 구성은 구석기인을 기조로 하고, 구석기시대 말기에 대륙에서 세석기문화를 가져온 북방계인과 남방에서 건너온 오스트라네시아 부족, 

A. 일본 개관  14

또 중국의 長江 유역에서 건너온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


 
 
 












■ 야요이彌生시대
 

대략 기원전 5세기 중엽에서 3세기 중엽까지의 시기로, 수도경작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농업의 채용과 그 발달에 의해 빈부의 차가 생겼으며, 서서히 신분의 차로 이행하였다. 경작지를 둘러싼 농지 확장 분쟁과 또 그 경작지에 사용할 농경수의 분쟁을 둘러싼 집락 ‧ 촌락간의 분쟁이 생겼고, 이 분쟁을 통해 집단 간의 질서가 형성되었으며, 이 질서에 의해 지역이 통합되어 갔다.


2. 고대사회


■ 코오훈古墳 시대

3세기 중엽에서 6세기 말엽까지, 약 300년에 걸쳐 前方後円墳이 북쪽으로는 동북지방에서 남으로는 九州 중부에 이르기까지 계속하여 축조되던 시대를 지칭한다. 종래에는 아스카飛鳥시대와 합쳐 야마토大和시대라 불렸으나, 오늘날에는 시대를 따로 구분하여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시대는 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유력후보가 자신의 부모, 형제를 막론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략이나 술책을 동원해 상대를 제거했던 격심한 왕권쟁탈이 반복된 

A. 일본 개관  15

 
시기였었다. 한편 관개용수확보를 위해 농수로의 정비등 대규모의 공사도 왕성하게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였다.


■ 아스카飛鳥 시대 

아스카飛鳥 시대는 고분시대의 말기와 겹치는데, 6세기 말엽에서 8세기 초반에 걸쳐, 아스카에 왕궁과 수도가 있었던 시대를 지칭 한다.  스이코推古 천황시대에 아스카飛鳥 문화, 몬무天武·지토오持統 천황시대에는 하쿠호오白鳳 문화가 
 
꽃을 피웠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倭로부터 日本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고도 전해진다.

백제로부터 4세기 말에는 한자와 유교가, 6세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쇼오토쿠타이시聖德太子는 불교를 바탕으로 정치를 펼치고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7세기에 지배계급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율령제도를 지배의 기본체제로 하는 정치개혁을 통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집결하고자 하였다.


■ 나라奈良시대 
 

나라奈良시대(710년- 794년)는 710년에 겐메이元明 천황이 나라奈良의 헤이제이쿄오平城京에 수도를 천도한 뒤, 794년에 칸무桓武 천황에 의해 헤이안쿄오平安京로 수도를 천도하기까지 84년간을 지칭한다. 중국의 長安을 모방하여 지어진 헤이제이쿄오平城京는 지배계층이 주민의 태반을 차지하는 정치도시였다. 

전시대에 선정되어 시행되어온 율령이 일본의 실정에 맞도록 다방면에 걸쳐 검토, 변경되는 등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율령국가·천황 중심의 전제국가· 중앙집권제 국가를 지향한 시대였었다.

전국에 國分寺를 세워, 불교적 색채가 강한 텐뾰오天平 문화가 꽃을 피웠다. 古事記, 日本書紀, 万葉集 등 현존 最古의 史書 ‧ 문학이 등장하였으며, 호적과 計帳에 의해 국민을 파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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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租庸調와 軍役을 부과하였다. 또 遣唐使를 자주 파견하였으며, 唐을 위시로 하여 대륙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 헤이안平安 시대
 

헤이안平安 시대(794년- 1185년)란, 794년에 칸무桓武 천황이 헤이안쿄오平安京(지금의 쿄오토京都)로 천도하고 난 뒤, 카마쿠라鎌倉幕府가 成立하기까지의 약 400년간을 지칭한다. 

헤이안平安 전기는 전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율령정치를 부분적으로 수정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는 계승해 나갔다. 그러나 율령제와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 커져, 9세기말부터 10세기 초반 무렵, 정부는 조세를 확보하기 위해 율령제의 근간이었던 사람을 대상으로 조세를 부과했던 조세법을, 토지를 대상으로 과세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이 방침은 민간의 유력자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새로운 지배체제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를 왕조국가체제라고 한다. 왕조국가체제는 통상 고대 말기에 위치하나, 중세의 發芽期로 볼 수도 있기에 고대에서 중세로 가는 과도기로 이해할 수가 있다.

왕조국가체제에서는 국가로부터 토지의 권한을 위양 받은 유력농민층이 성장을 하고, 아울러 국가로부터 군사, 경찰권을 위양 받은 군사귀족층도 또한 무사계급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권한의 이양에 의해 중앙정계에서는 정치가 안정되고, 관직이 특정의 가계에 세습되는 家職化가 진행되었고, 최상위의 계층에서는 세도정치 가문이 등장하고, 중류귀족으로 고정된 귀족층은 수령이 되어 지방정치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는 攝關정치가 전개되고, 서서히 장원이 증가되어갔다. 

11세기 후기부터는 上皇이 사실상의 국왕이 되어 정무를 맡는 院政이 시작되었다. 院政의 개시를 놓고 중세의 개시라고 보는 견해가 유력한데, 院政期에는 장원의 집적이 시작되어 장원공령제로 불리는 체제로 이행하여진다. 12세기중기에는 귀족사회 내부의 분쟁이 무력으로 해결되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자연히 무사의 지위가 급속히 상승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최초의 武家 정권이 등장하는데, 이 시기의 사회모순을 그대로 반영하듯 얼마가지 않아 붕괴되고 만다. 타이라氏 정권과 함께, 중앙정부였던 조정과는 별개로, 지금의 관동지방을 지배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에 의한 카마쿠라鎌倉幕府가 등장하고, 헤이안平安 시대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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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세사회


■ 카마쿠라鎌倉時代

카마쿠라鎌倉 시대(1192년- 1333년)는 조정과 대등하게 정치의 중심이 
 
된 카마쿠라鎌倉幕府가 카마쿠라鎌倉에 위치하였으므로 그렇게 불린다. 성립시기에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가 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되어 카마쿠라鎌倉幕府를 연 119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시기는 무사계급이 天皇, 귀족계급과 분리되어, 새로운 지배체제를 모색하여 카마쿠라鎌倉幕府를 설치하고, 봉건정치를 시작한 시대였다. 봉건정치는 그 후 에도江戶幕府 붕괴(1868년)까지 이어진다. 

정치체제는 카마쿠라鎌倉幕府가 성립된 뒤에도 중앙귀족과 사찰세력이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여 장원영주 ‧ 무사영주의 2원지배체제가 지속되었다. 1274년과 1281년의 2회에 걸친 몽골의 침입 때는 태풍에 힘입어 이를 물리쳤으나, 막대한 군비지출 등으로 지배체제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틈을 타서 1333년 반(反)幕府세력을 결집한 고다이고後醍醐天皇이 독재에 의한 관료국가의 수립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지방 세력의 불만을 고조시켜 南北朝時代를 초래하였다. 

 

■ 무로마찌室町 시대 

무로마찌室町 시대(1338년- 1573년)는 쿄오토京都의 무로마찌室町에 幕府가 설치되었으므로 그렇게 불린다. 1336년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고다이고後醍醐天皇의 南朝에 대항해 北朝를 옹립하여 무로마찌室町幕府를 설치하였다. 두 개의 조정이 대립한 南北朝時代는 1392년까지 이어졌으나, 北朝에 의해 통일되었다. 최종적으로 무가가 우위에 섰으나, 막부의 재정 ‧ 군사 기반은 약했다. 메이오오明應정변 무렵부터는 전국시대라고 불리고, 하극상이 빈번하였으며, 대규모의 반란도 일어났다. 그리고 이어져 내려온 莊園公領制가 소멸되었다. 

전란이 끊임없이 일어난 시기였으나, 외국과의 통상은 활발하였고, 농업, 공업 분야에서는 기술이 향상된 시기였다. 그리고 왜구가 중국, 한반도를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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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코쿠戰國 시대

센코쿠戰國 시대(1493년- 1573년)는 1493년의 메이오오明應정변
 
을 발단으로, 1573년에 15代 무로마찌室町將軍 아시카가 요시아끼足利義昭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추방되고 무로마찌막부가 사실상 소멸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막부의 힘은 현저하게 저하되고, 전국 각지에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불리는 세력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성장,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은 하극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강대한 군사집단을 편성하고, 영내의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는 다이묘료오고쿠大名領國를 형성하였다. 센코쿠戰國 시대 말기에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다이묘大名 가운데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중앙에 진출하였다. 


■ 아즈찌 모모야마安土 桃山 시대

아즈찌 모모야마安土 桃山 시대(1573년- 1603년)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를 통일한 시대를 지칭한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즈찌安土城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후세미伏見城(뒤에 모모야마桃山라고 불려지는 구릉지에 위치)을 따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센코쿠다이묘戰國大名 중에서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힘이 강대하게 되었고, 후계자인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1590년에 日本을 통일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전국적으로 과세 대장을 정비하여 국민경제의 실태를 파
 
악하고, 농민이나 상인의 무장을 금지하고 비합법적 궐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치안정책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또한 明의 정복을 구실로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패퇴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후, 권력을 둘러싸고 유력 다이묘大名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1600년 세끼가하라關ヶ原전투에서 승리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쟁취하였다.




A. 일본 개관  19

4. 근세사회 


■ 에도江戶 시대

에도江戶 시대(1603년- 1867년)는 1603년 2월 12일, 토쿠가
 
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에도江戶(현재의 토오쿄오東京)에 막부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867년11월15일 메이지明治 유신에 의해 정권을 조정에 넘기기까지 264년간을 지칭한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征夷大將軍으로 취임하자 자신의 영토였던 에도江戶에 幕府를 열었다.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정권 붕괴 후의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며, 산업 ‧ 교육의 진흥 및 그 외의 정책에 힘을 쏟았다. 또 오오사까大坂에서 일어난 토요토미豊臣 후예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추종세력들을 일소하였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계속되어진 정국의 불안은 종말을 고한다.

토쿠가와德川 幕府는 철저하게 정국안정책을 취하는데, 다이묘大名들을 통제하기 위해 武家 諸法度를 제정하고,  조정과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법도 제정하여 철저히 법치체제를 유지하였다. 대부분의 다이묘大名들을 정리하였고, 전국의 중요한 곳은 다이묘大名를 두지 않고 직할령으로 다스렸다. 또한 큰 지방은 친지들에게 배분하고, 그 사이에는 세끼가하라關ヶ原 전투 이후 가신이 된 토자마다이묘外樣大名를 배치하고, 세끼가하라關ヶ原 전투 이전부터 가신이었던 후다이다이묘譜代大名에게는 작은 지방과 중앙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부여하는 절묘한 분할 통치책을 실시하였다. 自家優先主義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260년 이상이나 장기안정정권의 기반을 확립하였고, 天下泰平의 세월을 가져다주었다.

흔히 이에야스家康는 농본주의라고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었고, 또 노부나가信長의 철저한 규제완화책에 의한 경제진흥책을 직접 눈으로 보아왔던 그이었기에, 성장 중시의 경제진흥파이었을 가능성도 지적되어지고 있다. 평화가 도래함에 따라, 수많은 병사가 비생산적인 군사 활동에서 생산 ‧ 행정적 활동에 종사하여 전국적으로 농토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져, 전국시대부터 아즈찌 ‧ 모모야마安土桃山에 걸쳐 오랫동안 이루어져왔던 경제성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고, 고도성장시대가 도래되었다.

외교상으로는 나가사끼長崎를 통한 중국과 네덜란드와의 교류와 대마도를 통한 朝鮮과의 
 
교류 외를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교류를 금지한 쇄국정책을 폈다. 이미 1587년6월19일, 토요

A. 일본 개관  20

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선교사 추방령이 내려졌었지만, 쇄국의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혹사와 과중한 연공부담에 시달리던 히젠肥前(지금의 사가佐賀, 나가사끼長崎), 히고肥後(지금의 쿠마모토熊本) 지방의 백성들이 기근이 기폭제가 되어 일으킨 시마바라島原의 난으로, 이는 기독교와 폭동이 복합된 것으로 진압이 힘들었던 점으로 미루어 기독교의 위험성을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해진다.

쇄국 후는 오직 국내중시의 정책이 펼쳐지고,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경제가 형성되었다. 에도江戶, 쿄오토京都, 오오사까大阪를 중축으로 하는 전국경제와 각지의 죠오카마찌城下町(영주가 거주하는 藩의 중심도시) 경제란 복합적인 경제 시스템이 형성되었고, 각지의 특산물이 주로 오오사까大阪에 집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반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이룬 것이 겐로꾸元祿 시대로, 이 시대는 경제 외에도 문학이나 회화 등 문화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시기였었다.

겐로꾸元祿 문화가 꽃을 피우고, 천하태평의 세월이 구가되었지만, 8代 將軍인 토쿠가와 무네요시德川吉宗의 쿄오호享保개혁 이후는, 토지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지배계층인 무사의 생활안정과 안정성장 정책이 융화되지 못하고 긴축재정 정책만을 고수하였다. 그 결과, 출구가 보이지 않는 불황이 계속되어 사회정체의 원인이 되었다. 또한 너무 많아진 인구를 농업만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던 동북지방 등에서는 흉작이 발생하면 기근이 빈번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그렇지만 장기에 걸친 안정 정국은 특히 전반의 백 수십 년 간은 성장경제 기조를 바탕으로, 일본에 공전의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후대 일본이 자랑하는 학문, 문화, 예술, 상법 등의 모든 장르에서 꽃이 피었고, 현재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다. 특히 에도江戶시대는 쵸오닌町人이 중심이 되어 문화, 전통예능, 오락, 예술, 경제, 물류 등에서 활약하였고, 일본의 르네상스기로 불린다.

발전하는 경제활동과 토지자본 체제의 행정관인 무사를 과도하게 수용하고 있었던 각 
 
과의 구조적인 알력을 내포하고 있던 에도江戶 시대도 19세기를 맞이하자 급속도로 제도의 고착화에 의한 경직이 눈에 두드러지게 되었다. 더불어 18세기 후반부터 근대산업혁명과 그 열매를 얻었던 서양제국은 급속히 근대화를 이루고, 제각각의 정치적 사정에서 전 근대의 모험이 아닌, 자국의 산업을 위해 자원과 시장을 찾아 세계 각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 근해에도 서양선이 출몰하는 횟수가 잦아지고, 幕府는 이런 외국선이나 日本과의 외교루트를 모색하는 서양 사절단의 접촉을 거부하며 쇄국정책을 고수하였으며, 재야의 여론도 이에 동조하였다. 하지만, 나가사끼長崎의 데지마出島를 통한 외교절충을 고수하고 있었던 幕府의 

A. 일본 개관  21

방침에 반해, 1854년년 에도江戶의 바로 코앞인 우라가浦賀에 상륙을 감행한 미국의 마슈 베리와 어쩔 수 없이 교섭을 하게 된 幕府는, 다음 도항 시에는 에도江戶에 직접 상륙하겠다는 페리함대의 위력에 굴복해 일미화친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후 미국과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서양제국들에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같은 조건의 조약을 체결해 사실상의 개항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급무사나 지식인 계급을 중심으로 '쇄국은 日本 개벽 이래의 祖法'이라는 반발이 일어나고, 攘夷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여론이나, 반발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幕藩체제가 견고할 당시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여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쿄오토京都에 있던 天皇의 존재가 500년 만에 부각되었다. 오랫동안 幕府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숨죽여왔던 쿄오토京都가 들끓게되었고, '幕末의 소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시적으로 토쿠가와德川 집안의 가로 이이나오스께井伊直弼의 강경노선으로 한동안은 진정국면에 접어들었으나, 이이나오스께井伊直弼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將軍 후계자 문제로 인해 幕府가 흔들리는 동안 사태는 급속히 변화한다. 

한편, 藩 내의 개혁파와 보수파가 藩政의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던 쵸오슈長州 (현재 야마구찌켄山口県)藩에서는, 앞바다를 항해 중이던 외국배를 대포로 공격함으로 '攘夷'를 결행하였으나, 다음 해 4개국의 함대가 상륙해 포대를 점거당하기도 하고, 쿄오토京都에서는 주도권을 둘러싸고 사쯔마薩摩 (지금의 카고시마鹿児島)藩과 시가전을 펼치기도 하는 등 주목을 끄는 사건을 계속 일으켜서 일약 정국의 중심적인 존재로 부각한다.

쵸오슈長州藩에 대한 다른 영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幕府는 쵸오슈長州 征伐을 시도하나, 타카스기신사꾸高杉晋作가 조직한 기병대와 서민군의 활약에 저지되어 2번이나 실패를 하고 만다. 이 사건은 幕府의 힘이 더 이상 영주들을 제어하지 못함을 시사하였다. 한편 주도권 다툼을 하였던 사쯔마薩摩, 쵸오슈長州 藩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동맹을 체결하고 이웃의 다른 藩들도 끌어들여 '尊皇攘夷'를 기치로 '倒幕'의 여론을 유도하였다. 새로 將軍으로 취임한 토쿠가와요시노부德川慶喜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해 재빨리 大政奉還을 감행하였다. 무력에 의해 완전히 幕府를 제거하고자 하였던 薩長倒幕派는 공격의 목표를 잃어버린 셈이 되었으나, 재빨리 太政官制度를 부활시켜 天皇을 중심으로 한 신정부를 수립하고 정권의 교대를 선언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바로 明治維新으로 이어져 나갔다.



A. 일본 개관  22

5. 근대사회


■ 메이지明治           시대

1867년, 토쿠가와德川幕府 第15代 將軍 토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가 
 
天皇에게 大政奉還을 하여, 조정은 王政復古를 선언하였다. 이에 사쯔마薩摩藩과 쵸오슈長州藩이 중심이 되어, 메이지明治 新政府가 성립되었다. 다음에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바꾸고, 5개조 서문을 발표하여, 새로운 정치방침을 제시하였다. 

신정부는 에도江戶시대의 모든 것을 개혁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의 구축을 지향하였다. 1869년에 다이묘大名들의 영지와 영민들을  천황에게 반납하게 하고(版籍奉還), 1871년에는 번(藩)을 폐지하고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사민평등이 이루어져 평민들도 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72년, 학제를 제정하고 신분이나 직업에 관계없이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1873년에는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개혁정치를 해나가는 데는, 무엇보다도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1873년 정부는 세수입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농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방법을 바꿨다(地租改正). 우선 지주나 자작농에게 지권을 나누어주고, 에도江戶시대에 애매했던 토지의 소유권을 확고히 한 다음, 그 지권을 갖고 있는 자에게 그 토지에 상당하는 만큼의 세금을 현금으로 납입하게 했다. 그러나 이 개정은 납입하는 세금이 에도江戶시대와 다름없는 중과세였기 때문에, 농민들 중에는 세금을 낼 수 없어서 토지를 파는 사람도 생겨났다. 또 토지를 갖지 못하는 일반 소작인은 수확한 쌀의 50%를 소작료로서 지주에게 내어야만 했다. 게다가 에도江戶시대에는 부락에서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신정부가 모두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농민이 이용할 수 있는 토지는 전시대보다 더 적어져, 대다수 농민의 생활은 에도江戶시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가 되면 생활이 좀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하고 있던 농민은, 이와 같은 제도에 큰불만을 가졌다. 다른 한편, 소작료를 쌀로 받는 지주들은 쌀값이 오를 때 내다 팔아 큰 이익을 얻어 광대한 토지를 가지는 기생지주 

A. 일본 개관  23

화가 진행되었다.

이 지조개정 후, 농촌의 가난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2,3남은 농촌을 떠나 도회지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들은 일본의 근대산업 발전에 필요한 노동력이 되고, 또한 징병제도를 지탱하는 중요한 병력이 되었다.

국민들의 생활면에서도, 태양력의 사용, 1일을 24시간, 1주일을 7일로 정하고 일요일을 휴일로 하는 서양의 7요 제도를 도입했다. 또 외국 정부의 압력으로 기독교 신앙도 인정하게끔 되고 신문도 속속 간행되었다. 토오쿄오東京의 긴자銀座 거리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서양식 건물들이 늘어서고, 도로에는 가스등이 설치되었으며, 상투머리를 자르고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는 것이 새로운 풍속이었다. 또 그 때까지 먹지 않았던 소고기를 먹게 되어, 도처에 소고기전골집이 생겨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 무렵, 정부내에는 사사쯔마薩摩藩과 쵸오슈長州藩 출신자가 각각 
 
파벌을 조성하여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진 자가 적지 않았다. 특히, 士族계급은 明治維新 때문에 실직한 뒤 장사를 했지만, 장사 경험이 없는 관계로 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급기야는 士族의 반란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사이고오 타카모리西鄕隆盛는 신정부에 대한 사족의 불만을 외부로 배출시키기 위해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지만, 구미 선진국의 발전상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온건파 오오쿠보大久保 등은 국내정치를 충실하게 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주장, 이에 반대했다. 1877년 불만 사족세력이 사이고오西鄕를 부추겨서 카고시마鹿兒島에서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西南戰爭). 그러나 징병제에 의해 잘 훈련된 신식군대는 이 반란을 반년 만에 진압해 버렸다. 

1881년에 일본에서 최초의 정당인 자유당이 창립되었다. 또 다음해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가 영국식 의회주의를 주장하며 입헌 개진당을 만들었다. 

A. 일본 개관  24

1889년, 메이지천황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독일 헌법을 모델로 하여 만든 헌법 초안을 대일본제국헌법으로 공포하고, 다음해인 1890년 제국의회를 개설했다. 이 헌법은 천황 밑에 내각·재판소·의회를 두고, 행정·사법·입법의 3권 분립의 형태는 취하고 있지만, 천황 주권인 헌법이기 때문에, 내각은 천황에 대해서만 정치적 책임을 지고, 의회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육해군은 천황 직속이기 때문에, 내각이나 의회도 이를 견제할 수 없었다. 국민의 권리는 일단은 인정되어져 있으나, 그것을 제한하는 법률이 있어서 자유는 엄격하게 통제되어져 있었다. 제국의회는 귀족원과 중의원을 제한하는 시스템이었다. 

1890년 7월, 최초의 중의원 선거가 행해지고, 11월에 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는 일정한 세금을 내는 25세 이상의 남자에게만 선거권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1%만이 투표할 수 있었다. 

 메이지明治 維新으로 일본의 근대적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성립하였고,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개시되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천황제 절대주의를 국가구조의 전 분야에 실현시키게 되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구미에 대한 굴복적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강압적·침략적 태도로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 도발, 1904년의 노일전쟁의 도발은 그 대표적인 예이며, 그 다음 단계가 무력으로 한국을 병합한 것이다. 


■ 타이쇼오大正 시대
 

 타이쇼오大正天皇의 재위기간인 1912년7월30일에서 1926년12월25일까지의 기간을 지칭한다. 타이쇼오大正 시대는 흔히 타이쇼오大正 데모크라시에 바탕을 둔, 안정기로 간주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근대 일본의 상징이었던 메이지明治 天皇의 서거, 그리고 병약했던 타이쇼오大正 天皇의 즉위라고 하는 불안감을 불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출발하였다. 또 타이쇼오大正 시대 전반을 통해 향락적 도시문화의 범람, 슬램의 형성, 민중소요의 발생, 노동쟁의의 격화 등 사회적인 모순의 골이 깊어진 시기였었다.

타이쇼오大正 시대에는 2번에 걸친 호헌운동이 일어났고, 메이지明治 이후의 藩閥 지배체재가 흔들리고 정당세력이 진출하였다. 大正 데모크라시시대는 1918년에 일어난 쌀 소동의 전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쌀 소동 후, 처음으로 작위를 가지지 않는 평민 재상인 하라 타카시原敬가 내각을 조직했다. 그러나 하라는 처음 등장할 때 기대한 만큼의 

A. 일본 개관  25

개혁도 행하지 못한 채, 한 청년에 의해 토오쿄오東京역 앞에서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1923년에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수도 토오쿄오東京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복구되었다. 하지만, 외형적인 복구는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 않았으나, 조선인 대학살 등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오랜 시일이 요구되었다.


■ 쇼오와昭和           시대
 

쇼오와昭和天皇의 재위기간이었던 1926년12월25일에서 1989년1월7일까지를 지칭한다.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은 엄청난 호경기를 맞아 급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전이 끝나고 각국의 생산력이 회복되자, 일본의 수출은 감소되었고 바로 전후공황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1927년에는 관동대지진으로 발행한 수표의 부도가 누적되어 금융공황이 도래하였다. 정부는 모라토리엄을 발령해 전 은행의 일제 휴업과 일본은행의 긴급 대출에 의해 급한 불은 끌 수가 있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孫文의 뒤를 이은 將介石의 국민정부군이 북벌을 시작하여 華北으로 진출했다. 당시의 타나까田中내각은 3차에 걸쳐 山東으로 병력을 출병하고, 동경에서 외교· 군부 관계자들을 소집하고 만주, 몽고의 권리를 사수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정부는 만주에서의 권익확대를 꾀하고자 만주의 실력자 張作霖와 교섭을 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암살하고 만다. 관동군은 당초 이 사건을 중국국민정부가 한 일이라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는 관동군이 한 일이었다. 야당은 이 사건을 추급하여, 결국 타나까田中 내각은 총 사직을 하고 만다. 

이 시기에는 문화나 사회과학 연구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타나까田中 내각은 보통선거 실시 후, 예상외의 국회 진입을 달성한 무산정당이나 공산당에게 강한 탄압을 실시해, 1928년에는 3· 15 사건, 다음 해에는 4· 16 사건을 빌미로 공산당 활동가와 동조자들을 대량 검거하였다. 같은 시기, 긴급 칙령에 의해 치안유지법을 개정해서 최고형을 사형으로 만들었다.

한편 1929년10월24일, 뉴욕의 월가에서 주식의 대폭락에 의해 세계 공황이 발발하였다. 그 여파는 일본에도 미쳤고, 다음 해, 금 해금을 계기로 쇼오와昭和 공황이 도래하였다. 이 공황은 종전의 공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식민지 경영에 의한 경제 블록화에 의해 재건을 기도하였으나, 1차 대전의 패배로 천문학적 배상금을 지불해야하는 독일이나, 고수익을 보장하는 식민지가 없는 일본은 심각한 불황에 

A. 일본 개관  26

빠졌다. 이는 결국 파시즘을 초래하는 계기가 되어 독일에서는 나치가 대두되고, 일본에서는 만주가 일본의 생명선이란 주장과 함께 군의 중국진출을 추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각 국이 세계대전 후의 재정부담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영국이 중심이 되어 워싱턴 군축협약이 제안되었다. 일본은 영국,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5대 군사대국의 일원으로 이에 조인하고, 소위 말하는 열강의 대열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배후에는 일본의 중국 진출을 견제하는 내용이나, 영· 일 동맹 파기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부와 관료들 사이에 격한 의견 대립이 있었다.

1931년에는 관동군의 모략에 의해 정부의 전쟁확대 불가 방침을 군이 무시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이는 다음 해 만주사변으로 발전되고 중국과 일본의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서의 패권, 남방자원지대의 이익을 둘러싸고 서양 제국들과의 대립이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1932년에는 해군장교들이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 수상을 사살한 五· 一五事件, 1936년에는 皇道派의 청년 장교들이 사이토오 미노루齊藤實 內大臣과 타카하시高橋藏相을 사살한 二· 二六事件이 일어났는데, 이는 군부의 폭주에 의해 정당내각의 종언을 의미하였다. 이후 군부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고, 히로타 코우키廣田弘毅 내각에서는 과거 폐지되었던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를 부활시켜, 현역 군인 외에는 육해군 대신이 될 수 없는 제도가 생겼다. 즉 군의 협력 없이는 내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의회는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일본의 만주건국을 전후하여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그 조사결과에 바탕 하여 1933년, 일본의 철퇴권고안을 42대 1(일본만 반대, 그 외에 태국이 기권)로 가결했다. 이 일로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국제적으로 고립의 길을 스스로 걷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將介石과 周恩來 사이에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유럽에서는 1939년9월, 독일의 나치가 폴란드에 침공하여 유럽전쟁이 개시되었다. 일본은 처음에는 유럽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이었으나, 1940년에는 독일에 의해 프랑스가 항복하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세력이 점점 확대되자 독·이· 일 삼국 간의 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통상조약을 파기하는 등 강경책을 취했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소련과의 전쟁을 하자는 북진론과 남방진출을 꾀하는 남진론의 
 
2파가 대립되었는데, 노모한사건을 계기로 북방진출을 포기하고,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하였다. 대미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일본 외무성은 1941년 늦가을까지 미일교섭을 계속하였

A. 일본 개관  27

 
다. 그러나 군부의 강변자세에 교섭은 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 열세에 있었던 처칠 영국수상과 중화민국의 將介石의 미국에 대한 참전 요청, 그리고 일본해군의 움직임에 루즈밸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미국 대통령이 격노하여,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으로부터 일본이 중국대륙으로부터 철퇴하라는 교섭안을 받는다. 이 교섭안을 전식민지로부터의 철퇴요구로 해석한 일본은 사실상 최후통첩이란 인식을 하고,  전쟁을 결정한다. 이리하여 태평양전쟁(일본에서는 대동아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은 세계 제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1941년12월8일(미국 時間 12월7일), 하와이 時間 오전 6시 30분에 일본은 진주만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개전 당시부터, 야마모토 이소로꾸山本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은 1년간은 전황을 유지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라고 말한 것처럼, 표면상으로는 대대적인 선전을 했지만, 사태의 인식은 처음부터 비관적이었다. 또 당일, 동남아시아에 있는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지도 공격하였다. 일본해군은 개전 당초, 지금은 일반적으로 된 병법이나, 당시에는 새로운 전법인 항공모함의 함재기를 주력으로 공격하고, 또 연합국측보다  훨씬 우수한 파일럿을 통솔하여 사상 처음으로 항공기로만 이루어진 공격에 의해 이동중의 함대를 격침하는 등, 연합군 상대로 연전연승의 가도를 걸었다. 그러나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전선은 점차 후퇴되었다. 1944년7월 사이판 섬이 함락되고, 이로 인해 일본본토는 연일처럼 공습에 시달려야했다. 1945년3월10일에는 토오쿄오東京 대공습이 감행되었다. 일본 국내에는 이미 연료와 재료부족으로 이미 가동 불능의 상태에 빠진 공장들과 도로, 항만, 철도 등의 사회 자본도 철저히 파괴되고, 생활필수품조차도 궁핍한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이르러 일본은 각종 화평 공작을 기도하였지만, 국제 여론도 악화되어 항복 이외에는 길이 없었다. 1945년7월26일, 연합국은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지만, 일본 측은 정식 회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항복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본 항복의 의사는 8월15일 정오, 쇼오와昭和天皇이 직접 일본방송협회 라디오 방송을 해, 일본국민들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하여 일본만도 3백만, 관계국까지 포함하면 2~3 천만의 희생자를 낸 미증유의 

A. 일본 개관  28

 

세계대전도 종국을 맞았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일본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외국에 의해 점령되어 연합국 최고사령관 맥아더원수가 착임을 하였다. 그리고 패전 전까지 통치권을 가지고 있었던, 대만, 조선, 남 카라후토, 남양 군도, 치시마千島열도를 잃었다. 1946년에는 극동국제군사재판(東京재판)이 개정되어, 전쟁을 계획하고 수행한 평화에 관한 죄  (A급), 포로학대 등 통례의 전쟁범죄 (B급), 학살 등 인도에 관한 죄  (C급) 로 나뉘어 제각기 처단되었다.

연합국(Allies)의 일본점령은 사실상은 미국에 의한 단독 점령이었지만, 직접통치방식에 의한 군정은 오끼나와沖繩에서만 실시되었을 뿐, 일본본토는 간접통치방식인 일본정부를 통한 점령정책이 실시되었다. 점령을 둘러싸고, 연합국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소련의 스탈린은 홋카이도北海道의 북쪽 반을 소련이 점령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이 거부하였다. 이는 트루만의 공산주의 봉쇄작전의 일환이었는데, 그는 '트루만 닥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고 그리스의 내전에 개입하였다. 처칠이 '철의 장막'연설에서 예측한 동서냉전의 본격화가 시작되었다.

일본에서는 같은 패전국이라도 동서로 분할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소련이 단독 점령을 한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과는 다른 점령형태가 실시되었다. 1951년 트루만은 한국전쟁에서 원폭을 사용해야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친 맥아더장군을 해임시키고, 후임으로 매튜 번커 리지웨이(Matthew Bunker Ridgway) 장군을 임명하였다. 일본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오끼나와沖繩와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를 제외한 일본 본토에서는 주권이 주어졌다고 하지만, 점령하의 일이라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모든 법령, 문서는 점령군의 사전검사와 허가가 필요했다. 1946년에 일본 헌법이 공포되고, 1951년에는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연합국과의 강화가 완료되어, 일본은 사실상의 주권을 회복했다. 그러나 미군은 거의 그대로 잔류하고, 전 국토 기지방식이라 불리는 방법에 의해 일본 각지에 미군 기지가 남게 되었다.

점령하의 제정이라고는 하지만, 일본 헌법은 주권은 국민에 있다고 하는 국민주권주의, 기본적 인권의 존중을 명기한 평화 헌법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국제 분쟁을 무력에 의해 해결하지 않는다는 평화주의를 포함한 3대 원칙을 위주로 제정하였다. 또 이 헌법에 의해 여성의 선거권이 처음으로 인정되었다.

패전에 의해 국내경제는 괴멸되고, 국민 생활은 혼미의 극치를 이루었으나, 중국 혁명의 
 
진전과 한국전쟁의 돌발에 의해 사태는 돌변하였다. 미국은 일본 점령 당초, 일본의 완전 무장해제에 의해 비군사화를 이루고, 극동의 스위스를 건설하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정치반동의 경향은 1947년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9년 중국대륙에서 將介石을 대신한 모택동 정권이 성립되자, 대일 전략을 완전 수정하여 일본의 재무장화를 진행시키고, 동아시

A. 일본 개관  29

아의 최고중요군사전략거점으로 지정하고, 차례로 수정정책들을 실행하였다. 이러한 정책변화는 곧 일본에 있어서 기적이라 불려지는 경제부흥으로 이어진다. 미국의 전략상 필요와 국내치안과 국토방위를 위해 최소한의 규모로 경찰예비대(뒤에 자위대로 바뀜)를 유지하였지만, 헌법에서는 무력의 보유를 금지하였기에, 당시의 자유주의 각 국의 방위비 대  GDP의 비율로 보면 완전히 국방비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재정상의 행운이 따랐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인구는 한층 더 증가했다. 전후 바로 제 1차 베이비붐이 일며 인구는 1억을 넘었다. 베이비붐으로 태어난 세대는 단지세대로 불리는데, 전쟁을 알지 못했고, 방대한 동세대의 인구와의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을 던져 일했으며, 또 자기주장은 어느 세대보다도 격해졌다. 가난한 집안의 입을 덜기 위해 지방에서  도시로 집단취직을 하였고, 그들을 황금알이라 불려지고, 집단 취직 열차도 운행되었다. 도시의 중소기업에 취직한 그들의 풍부한 노동력이 일본 경제를 지탱하였다.
한편, 도시출신자나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고등학교나 대학에 진학해, 60년 안보투쟁을 겪으며  대학개혁, 베트남 반전운동 등  자기주장을 펼치며 기세를 떨쳤다. 東京大 분규, 日本大 분규를 거쳐, 일부 과격파는 당시 유행한 신좌익사상과 연합하여, 기성정당의 타도, 혁명을 외치며 폭력적인 테러를 감행하였다. 그들이 일으킨 테러활동은 사회불안을 조장했다. 그 영향 등으로 도시의 시민의 대다수는 지지 정당을 갖지 않는 무당파층이 되었다. 이는 그 후 계속 이어지는 자유민주당의 장기정권의 존재를 허락하는 결과가 되었다.

대전후의 세계정세의 변화로, 석유 산유국과 선진 제국과의 복잡한 관계에 의해 2번에 걸친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해외수출의 확대에 의해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한 일본은, 1980년대 중반에는 전후 불과 30년 만에 GNP레벨에 있어서는 미국에 이어 2번째의 경제력을 가지게 되는 기적을 완성하고, 국민 생활은 유사 이래 가장 풍요한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쇼크를 기점으로 円高의 심각화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며, 고도성장 시대는 끝나고, 저성장 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정부는 円高에 의한 수출부진의 대책으로 내수확대를 촉진하기 위해 금융완화정책을 실시하는데, 이 정책이 원인이 되어 일본은 공전의 거품경제에 돌입한다. 그러나 그 번영은 이윽고 도래할 디프레이션

A. 일본 개관  30

 

(deflation)으로 향하는 길이었음을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전환기의 혼돈 속에서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맞이하였다.


■ 헤이세이平成           시대

1989년1월8일부터 2007년 現在까지를 지칭하는 일본의 연호.

쇼오와昭和 天皇의 서거와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같은 1989년에 일어났고, 세계사적으로는 헤이세이平成 시대는 '포스트 냉전시대'라고도 불린다. 1991년
 
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영토를 구성하고 있었던 공화국이 제각각 해방되어 독립하였다. 그 후 새로운 세계구조를 모색하는 상태가 계속되었으나, 결국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유럽연합 (EU)과 중국, 러시아, 일본 등의 중대국이 그 상태에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한편 일본 국내에서는, 편사치(偏差値) 중시 교육제도의 개혁이 진행되어, 문부과학성은  '여유있는 교육'을 기치로, 수업시간의 단축, 교육내용의 감소를 추진하였다. 또한 애국심이나 정조교육을 담은 교육기본법의 개정도 단행하는데,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국가주의적인 교육이라 경계하며 반대의견을 펼치기도 하였으나, 지금까지의 지나친 좌익적인 자학사관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그 결과 경제격차, 지역격차를 배경으로 한 학력격차가 표면화되었다. 원인은 공교육 기능이 저하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되고, 공교육에 대한 불신감이 증대하였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학원이나 사립학교 진학 희망자가 증가하였다. 그런데 학원이나 사립학교가 없는 지역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가? 불경기가 만연한 가운데 교육산업만 호황인 상황은 이상 상태가 아니냐? 저소득층의 교육기회는 어떻게 보장하느냐? 등의 문제가 대두되어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다. 이로 인해 '여유 있는 교육'의 재검토와 유치원, 보육원, 고등학교의 의무교육화로 공교육의 기능강화를 향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나, 교육관이나 비용의 문제에 봉착하여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이다.

한편, 저출산의 진전으로 2005년에는 '수험생 전원 대학 입학' 시대를 맞이하였으나. 고교를 졸업하여도 부모에게 생활을 의존하는 니트, 은둔형 외톨이와 같은 학생이나 사회인이 

A. 일본 개관  31

증가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이 사실은 경제적으로는 90년대 이후의 불경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나, 학교와 실사회와의 갭이 너무 크다고 하는 일본 특유의 문제가 잠재되어 있다고 하겠다.






























B. 일본인의 의식주


Ⅰ. 키모노

 

양복이 일본에 보급되기 전까지는 일본인은 의복을 키모노着物로 불렀으나, 메이지明治 시대 이후 양복을 입는 사람이 많아지자, 양복과 구별하기 위하여 일본 고유의 의복을 와후쿠和服로 부르게 되었다. 현재에는 키모노, 와후쿠, 고후쿠呉服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일본고유 의복을 키모노로 지칭하고, 키모노에 대해서 서술하기로 한다.


1. 키모노의 역사


■ 개관

키모노는 고대로부터 사람들의 생활에 따라 그 형태가 바뀌고, 일본의 풍토・문화에 대응하여 현대의 형태로 되었다. 키모노의 역사란 일본인의 생활양식의 역사 그 자체라 하겠다.

고대에는 칸토오이貫頭衣라고 하여 통천이나 모피에 머리를 넣을 구멍을 뚫어 입었으나, 야마토大和 시대에 와서는 상, 하가 구분되는 옷을 입게 되었다. 아스
 
飛鳥시대에서 나라(奈良)시대에 걸쳐서는, 의복도 당나라의 영향을 받게 되며 의복이 우아함을 추구하게 되고, 소매도 광폭의 소매가 일반화된다.
9세기에 견당사가 폐지된 뒤로는, 국풍문화의 고조도 일조하여 보
 
다 일본 풍토에 적합한 옷으로 정착하게 된다. 귀족 취향의 우아한 복장으로 발전하여 남자의 예복인 소쿠타이束帯, 여성의 옷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쥬니히토에十二単가 탄생하게 된다. 기후에 따라 겹으로 입었던 것이 색상에 변화를 줌으로 더 우아하게 되고, 또한 

옷을 겹겹으로 입는 정도에 따라 권력과 지위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그 후, 카마쿠라鎌倉・무로마찌室町 시대에는 무사가 대두하게 되고, 서민의 복장은 현대의 키모노의 원형인 코소데小袖가 등장한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시대가 안정되자 미술, 공예 기술의 눈부신 발달이 이루어지고, 키모노의 염색기술과 봉제기술도 발전하여 호화스런 키모노도 상류계급을 중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에도江戸 시대에 들어가면 3백 년 동안 외국과의 교류를 단절한 탓으로 일본 특유의 문화가 자라난다. 특히 쵸오닌町人 문화의 발전이 두드러지는데, 부유한 쵸오닌町人은 재력을 바탕으로 복식에 공을 들여, 코소데小袖, 유우젠조메友禅染め에 갖가지 염색과 봉제 기술을 구사하여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이 쵸오닌의 키모노가 현재의 키모노의 형태로 거의 정착된다. 그 후, 역사의 변동・서양 문화의 유입에 의해 소재와 모양은 약간씩 변화하나, 기본형태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메이지明治 시대에 들어와 개국이 되고, 양복문화가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된다. 점차 일상복은 양복을 입게 되고, 쇼오와昭和시대・전쟁을 거치면서 키모노는 모습을 감추게 되나, 여전히 전통의식, 무대의상 등에서는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 시대별 특징


‣ 古代

 
 

고대의 복장은 원시시대 토우에서도 볼 수가 있는데, 현대의 양복과 같은 느낌이 드는 옷이었다. 기모노와 같이 전체 맞댐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옷깃을 맞추어 한두 군데를 끈으로 묶는 형식이었다.



‣ 아스카飛鳥・나라奈良 시대 


불교가 전해지고, 당나라 예식복식과 함께, 염색・직조방법도 함께 전해졌다. 여자는 긴 옷 위에 배자라고 하는 조끼와 같은 것을 입었고, 어깨에는 히레이라고 하는 스카프와 같은 

 
 

것을 걸쳤다. 남자는 머리에 관을 쓰고, 허리는 혁대를 매고 하카마를 입었다.



‣ 헤이안平安 시대

보통 비단과 삼을 재료로 사용하였는데, 귀족은 비단을 서민은 삼을 
 
사용하였다. 서민은 비단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시대부터 일본 기후에 적합한 옷이 만들어졌다. 또한 귀족 취향의 우아한 복장으로 발전하여 남자의 예복인 소쿠타이束帯, 여성의 옷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쥬니히도에十二単가 탄생하게 된다. 


‣ 카마쿠라鎌倉 시대

 

당시의 복장은 매우 검소하고 활동적인 복장이었으며, 또한 간소
 
화되어 코소데小袖가 겉으로 나왔다. 여자는 의과(비단옷)와 장옷을 입었다. 그림의 여자는 삿갓을 쓰고 있는데, 이는 외출할 때 쓰는 일반적인 모습이라 한다. 남자는 무사의 경우 옷깃은 수령으로 되어 있었고, 소매의 앞은 끈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겉옷은 주름 이 잡혀 있었다.


‣ 무로마찌室町 시대

이 시대의 복장이 현재 키모노의 기초가 되었다. 네덜란드와
 
 
의 무역으로 비로드와 같은 새로운 직물이 들어오게 되고, 키모노에도 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말기에는 귀족과 서민 구별 없이 키모노가 겉옷화 되었다. 그림과 같이 코소데를 겉에 입고 속치마를 허리에 감고 있었다. 무사들은 옷자락이 길고 주름 잡힌 겉옷을 입었는데, 이것이 가문의 관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 모모야마桃山 


이 시대에 현재의 기모노가 확립된다. 조선에서 들어온 매듭의 기술이 응용되어 당사로 

 
된 나고야 끈이 만들어졌다. 당시 그것을 허리에 겹겹이 돌려 사용하였는데, 주로 유녀, 여관의 하녀가 이용하였다.  여자는 코소데小袖와 오비, 남자는 평복으로는 상하로 구분된 옷을 입었다.



‣ 에도江戸 

쵸오닌町人계급의 성장으로 풍속의 주도권은 무가에서 서민으로 이동되
 
었으며, 이는 복장에도 영향을 미쳐 코소데가 서민들의 복장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또한 복장뿐 아니라 띠의 소재나 모양, 머리모양, 소품의 세공에도 혁신적인 변화가 생기게 된다. 유우젠조메友禅染め나 니시징오리西陣織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도 이 시기였다.


‣ 昭和時代 


전쟁 중에는 공습, 그리고 국민복을 권장한 정부의 방침으로 
 
 
키모노를 입지 못했던 여성들이 전쟁이 끝난 후 키모노를 꺼내 입었다. 그러나 키모노가 고가이고 또한 입는 법도 까다로워 싸고 실용적인 서양옷의 유행에 밀려 점점 키모노를 평상복으로 입는 사람이 적어지게 되었다. 다만 1965년부터 1975년까지는 일시적 유행으로 키모노를 입는 사람이 많았다. 이후, 키모노는 평상복으로는 거의 입지 않고, 특별한 행사와 의식이 있을 경우에만 입는 옷이 되었다.


■ 키모노의 특징

‣ 키모노

• 키모노는 허리 위치에서 오비(帯)로 묶어서 긴 옷을 몸에 고정시킨다. 

• 키모노는 펼쳐놓으면 직선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겨드랑이 부분이 트여 있는 점을 보면 여름형 의복임을 알 수 있다.

• 키모노는 외출복, 예복, 상복, 작업복 등에 따라 무늬가 다르다.

• 외출복이나 정장용의 키모노는 비단으로 만들기 때문에 고가이다.

• 팔을 감싸는 소매가 양복에 비해 공간적여유가 많다. 

• 양복은 단추 등을 이용해 옷을 고정하지만, 키모노는 오비나 끈으로 묶어 고정시킨다.

• 키모노는 양복과 같은 칼라가 없다.

• 키모노의 재질은 천으로 되었기에, 양복과 같은 신축성이 없다.

• 양복과 달리 깃의 좌우 방향이 남녀 구별 없이 똑같다. 즉 자기가 보아 왼쪽 깃이 위로 오게 입는다.

• 키모노는 양복과는 달리 체형을 감춘다.


‣ 신발

• 키모노를 입는 경우에는 양말과 신발을 신지 않고, 나무로 만든 굽이 높은 게타(나막신) 나, 나무나 가죽으로 만든 굽이 낮은 조리(샌들)을 신는다.

• 게타나 조리에 걸맞게 엄지발가락과 둘째발가락 사이가 갈라진 면 버선인 타비를 신는다.

 
 
 











‣ 오비
 

오비는 ‘모든 외래문화를 종합하여 일본인의 체형과 풍토, 습속에 맞게 환골탈태, 확대재생산한 지혜의 산물’이라며 일본인들은 다음과 같이 자랑하고 있다.

• 허리띠를 몇 겹씩 감아 뒤쪽으로 매듭을 지은 복식은 일본이 유일하다.

• 오비를 뒤쪽에 감아 배면미를 연출한 것은 인간이 인간을 감상할 때, 앞쪽보다는 옆이나 뒤를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는 깊은 계산에서 나온 아이디어이다.

• 오비의 위치를 허리위로 올림으로써 상반신에 비해 아랫도 리가 길게 보여 더욱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

• 오비의 넓은 띠로 몸을 감싸니까 위하수가 줄고 혈압상승을 막아 안산, 장명의 효과를 

가져다준다.


■ 키모노 스타일

키모노 스타일이란 대나무, 매화, 오비 장식과 여밈 등으로 표현되는 패션의 스타일을 말하는데, 키모노가 ‘동양의 신비’로 받아들여지면서 새롭게 탄생하며 일본문화를 전 세계로 전파하고 있다. 1970년대 야마모토요오지山本耀司 등 일본 디자이너들이 키모노의 넓은 소매와 오비 등을 변형시킨 의상으로 파리에 진출한 이후 ‘키모노 스타일’이란 새로운 복식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또 1971년 4월 파리컬렉션에서 ‘일본인이 파리를 수놓았다’라는 극찬을 받은 타카다 켄조高田賢三 역시 키모노를 세계로 알린 디자이너이다. 키모노의 선을 변형시킨 의상을 꾸준히 발표해 ‘키모노슬리브着物スリーブ’란 용어를 패션용어사전에 실리게 했다.

1997년 발렌티노를 시작으로 현대 패션 스타일로 성장했으며, 1999년 장 폴 골티에는 ‘쟈포니즘’을 테마로 키모노를 변형한 의상과 게타, 게이샤의 머리 스타일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헤어스타일도 선보여 동양의 신비를 담아낸 의상으로 세계 패션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2. 키모노의 구조


 


카케에리掛衿

혼에리本衿

미기노 마에미고로右の前身頃

히다리노 마에미고로左の前身頃

소데

타모토

히다리노 오쿠미左の衽

미기노 오쿠미右の衽

켄사끼剣先

미다케身丈

유키타케裄丈

카타하바肩幅

소데하바袖幅

소데타케袖丈

15.소데구찌袖口

16.소데츠케袖付


3. 키모노의 종류


현재 일본인이 입는 키모노의 종류에는 남성용, 여성용, 어린이용이 있다. 기본적으로 남녀 겸용의 키모노는 없다. 그리고 남녀 각각 정장, 약식 정장, 평상복의 복장이 있다. 키모노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하다쥬반肌襦袢, 나가쥬반長襦袢, 나가기長着, 하오리羽織, 다테지메伊達締め, 코시히모腰紐, 오비, 오비이타帯板, 오비지메帯締, 하카마, 타비足袋, 조오리草履, 게타下駄 등이 있으나, 생략 가능한 것도 있다.


 
 
 
 

 






■ 정장

 
 

‣ 토메소데留袖

토메소데留袖란 처녀시절에 입었던 긴 소매를 잘라 짧게 한 것이란 뜻으로, 한번 끊은 것은 다시 돌릴 수 없다 즉, 시집가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어, 결혼한 여성들의 제 1 정장이다. 종류는 쿠로토메소데黒留袖와 이로토메소데色留袖가 있고, 5개의 가문의 문양(가슴 좌우에 2개, 등에 1개, 좌우 소매에 2개)이 있다.

결혼식의 나코오도仲人 부인, 신랑신부의 모친, 기혼의 자매는 반드시 쿠로토메소데를 입어야 하고, 피로연의 다른 출석자는 쿠로토메소데 또는 이로토메소데를 착용한다. 이로토메소데는 색깔이 있는 옷이지만, 5개의 가문의 문양이 있으면, 어떤 격식이 있는 자리에서도 통용되는 정장이다.


‣ 혼후리소데本振袖

미스의 최고 정장인 혼후리소데本振袖는 소매의 길이가 1m10㎝로 복사뼈까지 내려오며, 

 
 
겹옷을 입게 되어 있다. 모양이 화려하고 금은의 자수나 금박을 사용하는 등, 격조가 높은 의상이다. 현재에는 신부의 의상으로 결혼피로연 등에서 착용한다.


‣ 모후쿠喪服

상복의 정장인 검정 모후쿠喪服는, 결혼 여하에 관계없이, 검정색의 천에 5개의 문양이 있는 옷을 말한다. 오비도 검정색이며 각종 소도구도 검정으로 통일을 한다.  


■ 약식 정장

정장만큼은 격식은 높지 않지만, 정장에 준하는 품격을 가진 복장. 결혼피로연, 맞선, 사은회, 차도 등에서 착용한다.


‣ 이로토메소데色留袖
 

이로토메소데는 원래는 정장이나, 가문의 문양이 3개 혹은 1개일 경우에는 약식 정장이 된다. 또 문양이 5개 있어도 덧옷을 입지 않으면 약식 정장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로토메소데는 미세스의 약식 정장 중에는 가장 격식이 높은 것이다. 또, 미혼일 경우에는 나이가 많아도 토메소데, 이로토메소데는 입지 않는다.


‣ 후리소데振袖, 츄우후리소데中振袖

미혼 여성의 정장인 혼후리소데도 덧옷을 생략하고 입으면 약식 정장이 된다. 가장 많이 입혀지는 것은 츄우후리소데中振袖로, 소매의 길이가 95- 106㎝ 정도로, 손을 내렸을 때 소매가 정강이 위치까지 내려온다. 성인식, 차도 등 미스의 예복으로는 가장 일반적인 옷이다.


‣ 호오몽기訪問着

글자 그대로 방문할 때 입는 옷이란 의미의 키모노로, 의외로 역사가 짧은데 메이지明治 시대에 ‘visiting dress'에 해당하는 키모노로써 고안되었다. 정장의 하나로 당초에는 등과 양 소매에 3개의 가문의 문양을 넣는 것이 관례였으나, 점차 문양을 넣지 않게 되었다.

용도로서는 결혼식의 출석(친척 이외의 경우), 다도, 파티 등 화려한 행사에는 대체로 착용할 수 있다. 또 기혼, 미혼에 관계없이 착용할 수 있다.

‣ 이로무지色無地

무늬가 없는 검정색 이외의 키모노를 가리킨다. 가문의 문양을 넣음으로써 호오몽기와 같이 정장으로서 입을 수도 있고, 문양이 없으면 평상복으로 입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검은 오비를 매면 약식의 상복으로 활용할 수 있는 편리한 키모노이다. 

특히 화려함을 지양하는 다도에서는 이로무지의 착용이 바람직하다.

 
 
 
 


■ 외출복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입는 키모노로, 격식을 차리지 않으나 상대방의 입장이나 방문 목적을 고려해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의 옷을 말한다. 용도로는 주로 연극 관람, 음악회, 각종 파티 참석 등에 착용한다.


‣ 에도코몽江戸小紋

에도시대, 각 지방 영주들이 착용한 카미시모에 무늬를 넣었던 것이 시초가 되었다. 그 후, 영주들은 서로 경쟁하듯 무늬를 화려하게 수놓았는데, 그 도가 지나치자 막부가 제제를 가하였다. 그러자 멀리서 보았을 때는 무늬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무늬를 아주 세밀하게 넣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더욱 고도의 염색기술을 요하는 고급 제품이 탄생되고, 무늬도 각 지방 영주의 고유문양으로 고착화되어 갔다. 대표적인 무늬로서는 사메, 교오기行儀, 카쿠토오시角通し 등이 있다.

 
 
 

 
 




 

■ 그 외의 키모노


‣ 우치가케打掛

나가기長着 위에 걸쳐 입는 춤이 긴 옷으로, 원래는 부유한 무사부인들이 가을에서 봄까지 걸쳐 입는 옷이었다. 에도시대의 후기에 들어오면서, 유복한 쵸오닌町人 가정의 딸이 결혼식의 혼례의상으로 입게 되었고, 또한 요시와라吉原의 최고 기녀들의 정장으로도 입었다. 현재는 화려한 신부의상의 대명사로, 결혼식, 결혼피로연에서 신부가 입는다.


‣ 쥬우니히토에十二単

정식명칭은 이츠츠기누 카라기누 모五衣唐衣裳이나, 쥬우니히토에十二単란 명칭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실제로는 반드시 12겹을 입지는 않는다. 보통은 8겹에서 10겹을 입는데, 10겹에 무게가 20㎏이나 된다고 한다. 

일상복은 아니었고, 조정의 부인들이나 상류 귀족 여성들의 정장이었다. 현재는 황실의 결혼식,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






 
 













‣ 하카마

허리 아래에 입는 품이 넓은 하의이며, 앞에 주름이 아랫단까지 있는데 한국의 통치마 같은 것과 바지처럼 가랑이가 갈라진 것이 있다. 헤이안平安 시대 이후에는 관직에 따라서 하카마를 입는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근세 시대에는 주로 남자가 입는 정장이었는데, 메이지明治 시대에는 여학생들의 교복이었다. 최근에는 졸업식에 여학생들이 많이 입는다.

예전에는 감색이나 어두운 적갈색이 일반적이었으나 최근에는 그린이나 황금색과 같은 연한 색깔로 바뀌고 있으며 멋을 낸 것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위에 입는 옷은 5문양의 이로무지가 정식인데, 후리소데를 입으면 화려하고, 야가스리矢絣의 코몽과 함께 입으면 학생 분위기가 연출된다.

 
 
 
 










‣ 하오리羽織

일본어의 동사 ‘걸쳐 입다’(羽織る)에서 유래된 하오리는, 처음에는 방한용의 외투 역할을 하였으나 에도시대에 여러 형식의 하오리가 생기고, 몬츠키하오리紋付羽織는 예장용 복장으로 정착되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에는 에도시대에도 거의 하오리는 입지 않았으며, 우치가케를 입었었다. 예외적으로 후카가와深川의 게이샤는 여성임에도 하오리를 입어 명물이 되었는데, 이것이 점차적으로 화류계로 확산이 되었고, 일반 여성도 하오리를 입게 된 것은 메이지 이후였다. 이런 연유에서인가 우치가케는 결혼식에서도 사용되는 여성의 정장이나, 하오리는 정장으로서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 유카타ゆかた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시대부터, 목욕 후 몸의 수분을 흡수하기 위해 
 
유카타비라
湯帷子란 옷을 많이 입었는데, 이것이 에도江戸시대에 들어와 서민들이 애호하는 옷의 한 종류로 정착되었다. 유카타는 유카타비라의 줄임말이다. 보통 면으로 만든 홑옷으로, 키모노 중에서 가장 간편하고 단순한 구조이다. 착용은 안에 아무 것도 입지 않거나 간단한 속옷을 입는 정도이고, 천이 얇고 개방적이기 때문에, 여름이나 목욕 후 또는 잠옷으로 사용된다.

현대 일본에서 유카타가 사용되는 것은 주로 하나비花火, 마츠리, 봉오도리盆踊り 등의 여름의 행사에서 여성들이 입는 경우가 많다.



 
 
 



‣ 캇뽀오기割烹着

캇뽀오기는 일본에서 고안된 주로 키모노에 걸치는 앞치마의 일종이다. 원래 키모노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키모노의 소매가 충분히 들어갈 정도의 폭과 무릎정도까지 오는 길이로 만들어진다.

 

 



 핫피法被

원래 武家의 하인들이 덧옷으로 착용한 것으로, 주인집의 家紋을 넣어 소속을 표시하였다. 한편, 한텐半纏은 민간에서 퍼지게 된 것으로, 서민들의 작업복으로 발달하였다. 원래 더러움 

방지나 방한용으로 사용하였는데, 이윽고 시루시한텐印半纏으로 발전하여 소속된 조직의 이름이나 가게 이름을 넣어 유니폼으로 사용하였다. 에도시대에는 서민은 하오리를 입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한 옷이라고 추정된다. 서민들이 한텐半纏을 입자 武家의 하인들은 일부러 칼라를 뒤집어 하오리처럼 착용하였다고 한다. 

현재 입고 있는 핫피나 한텐은 마츠리 때나, 음식점 직원, 상점 점원, 이벤트 도우미, 작업복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