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근대문학의 이해














목차


제 1 장  일본의 근대와 근대문학

제 1 절  明治維新

1. 명치유신과 문학

2. 일본 근대문학


제 2 장  명치 전기의 문학

제 1 절  戯作 문학의 계승

1. 江戸시대의 戯作 문학의 계승

2. 仮名垣魯文카나가키로분의 戯作문학

제 2 절  계몽사상의 등장 

1. 계몽사상의 등장배경

2. 明六社메이로쿠샤의 결성

3. 福沢諭吉의 활약 

제 3 절  번역문학의 등장


제 3 장  명치 중기의 문학

제 1 절  정치소설

1. 정치소설 등장의 배경과 정치소설

2. 北村透谷의 근대문학의 정의와 정치소설

제 2 절  사실주의 문학

1. 사실주의 문학 등장의 배경

2. 坪内逍遥츠보우찌쇼오요의 小説神髄쇼오세츠신즈이

3. 二葉亭四迷후타바테이시메이의 小説総論쇼오세츠소오론

제 3 절 硯友社의 등장

1.  硯友社 등장의 배경

2. 尾崎紅葉

3. 幸田露伴코오다로한

제 4 절 浪漫主義

1. 森鴎外모리오오가이의 계몽활동

2. 「文學界분가쿠카이 동인 

3.  高山樗牛타카야마쵸규우의 사상편력

4.  泉鏡花이즈미쿄오카의 신비 · 낭만

제 5 절  청일 · 러일 戰後 문학

1. 청일 러일 전쟁 후의 사회적 동향과 문학

1)樋口一葉 

2)広津柳浪, 

3)川上眉山

2. 자연묘사의 계보

1)徳富廬花

2)国木田独歩


제 4 장  명치 후기의 문학

제 1 절 자연주의

1. 자연주의

2. 일본의 전기자연주의

3. 후기자연주의

1) 일본자연주의의 출발

2) 일본 자연주의의 성격

3) 일본 자연주의의 작가

①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

② 田山花袋타야마카타이

③ 徳田秋声토쿠다슈우세이

제 2 절  반자연주의의 대두

1. 여유파

1) 夏目漱石나츠메소오세끼

2) 森鴎外모리오오가이

2. 탐미파

1) 永井荷風

2) 谷崎潤一郎 

3. 白樺派

1) 武者小路実篤

2) 志賀直哉

3) 有島武郎

4.新現実主義

1) 신사조파

① 芥川竜之介

② 菊池寛

③ 久米正雄

2)기적파

①  広津和郎

② 葛西善蔵


제 5 장  大正 · 昭和초기의 문학

제 1 절  프롤레타리아 문학

1. 조직의 형성

2. 조직의 확립

3.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성과

제 2 절  예술파

1. 신감각파

1)横光利一요코미츠리이찌

2)川端康成카와바타야스나리

2. 신흥예술파

1)井伏鱒二이부세마스지

제 3 절  昭和 10년 이후 문학

1. 전향문학

2. 기성작가의 활약

3. 전시하의 문학

제 4 절  전후문학

1. 기성작가의 부활

2. 신戯作파

1)太宰治다자이오사무

3. 전후파문학

1)三島由紀夫미시마유끼요

4. 제3의 신인


부록


참고문헌










제 1 장  일본의 근대와 근대문학


제 1 절  明治維新


1. 명치유신과 문학

 

명치유신은 봉건제에서 벗어나서 일본이 근대를 출발하는 시발점이었다. 徳川토쿠가와막부의 쇄국정책에 의해 긴 세월을 폐쇄적으로 살아왔던 일본은, 종래의 봉건적인 생산관계를 유지하고, 또 일본고유의 사회적 · 문화적 전통을 온존하고 순화한 공은 있었지만, 세계적인 시점에서 보면 근대를 향한 발걸음은 엄청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문명개화의 새바람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단지 양적인 진보에 그치지 않고 질적인 변혁이 필요하였다. 명치유신의 변혁을 추진한 주된 요인은, 정권을 쥐고 있었던 徳川막부의 내부붕괴와 새로운 세대의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이었다. 그 시점에서 간단없는 해외로부터의 자극은 명치유신을 추진하는데 엄청난 역할을 하였다.

명치유신이 일어나고 일본은 급속도로 해외의 신문화를 받아들여 서양열강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이러한 동향에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근세문학에 이르기까지 배양되어온 문학의 전통적 유산은, 쇄국 시절을 거치면서 퇴폐적 경향이 절정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의 창조적 가치를 생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약점은 체계적

인 이론을 가지지 못한 점이었다. 물론 종래의 문학유산과 완전히 절연하면서 근대로 이행한 것은 아니고 종래의 문학 토양 위에서 꽃을 피운 것이지만 어느 시대보다도 외국문학의 강한 영향 하에 발전한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2. 일본 근대문학


근대문학은 당연한 말이지만 근대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근대사회는 시민사회인데, 시민사회의 특질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를 움직이는 경제이념은 자본주의이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서식하는 근대인은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자유평등,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근대적 자아에 각성하게 되었다. 

근대사회는 20세기에 들어와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자연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사회의 구조나 기구가 복잡 · 다양해지게 되자 그 속에서 살아가는 근대인의 사고 · 감정도 더 복잡하고 다양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더 이상 근대문학은 그 전 시대의 유희적이고 정적인 문학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삶의 모습의 탐구가 요구되었다. 









제 2 장  명치 전기의 문학


명치유신 이후 약 20년간의 문학을 통상 계몽기의 문학이라고 말한다. 이 기간은 전통문학과 새 시대의 문학이 뒤섞인 혼돈의 시대였다.


제 1 절  戯作게사쿠 문학의 계승


1. 江戸시대의 戯作 문학의 계승


명치유신에 의해 세상이 바뀌었지
 
만,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문학이 바로 등장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명치 초년에는 에도시대부터 향유되어 온 戯作문학이 그대로 계승되어 읽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명치유신 이후에 문명개화의 물결이 밀물처럼 흘러들어와 세상은 미증유의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문학작품도 새 시대의 부응한 작품을 요구하게 되어 문명개화의 세태를 반영한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2. 仮名垣魯文카나가키로분의 戯作문학


문명개화(文明開化)는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서양의 문명이 들어와 제도와 관습이 크게 변화된 현상을 말한다. 심지어는 “서양의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는 생각조차 가지고 있었다. 근대화 즉, 서구화 자체는 메이지 신정부의 일관된 과제였지만, ‘문명개화’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메이지 초기의 세태 풍속이 그때까지의 봉건 사회에서 크게 바뀐 시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시대의 흐름이 이런 상황인 가운데, 戯作 작가인 仮名垣魯文
 
카나가키로분
도 그 흐름에 동조하여,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문학을 내놓았다. 명치기에 접어들자 그는 十返舎一九짓펜샤잇쿠의『東海道中膝栗毛』토오카이도츄우히자쿠리게를 풍자하여 『西洋道中膝栗毛』세이요오도츄우히자쿠리게를 발간하였다. 이어서 당시 문명개화의 상징이기도 한, 소고기 전골 전문점을 둘러싼 풍물을 그린 『安愚楽鍋』아구라나베를 내놓았다.

그 당시 다른 戯作 작가들에 비해 비교적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 仮名垣魯文의 작품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유행을 하였으나, 그 현상도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제 2 절  계몽사상의 등장


1. 계몽사상의 등장배경

 

명치 초기 신정부 입장에서는 새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여 신정부의 청사진을 펼치고 싶었다. 이에 신정부는 외국에서 선진문물을 습득한 유학파의 존재와 활약이 필요하였고, 그들의 귀국을 종용하였다. 이 요구에 의해 많은 유학파 지식인들이 귀국하였고 신정부의 부름에 호응하는 활약을 하게 된다.


2. 明六社메이로쿠샤의 결성


1873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森有礼모리아리노리가 福澤諭吉후쿠자와유키치・中村正直나까무라마사나오・西周니시아마네 등과 함께 계몽활동을 목적으로 결성한 단체가 明六社이다. 

귀국한 森有礼는 명치 신정부의 슬로건이기도 한,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우선 인재육성이 시급하다고 판단하고 또한 국민 개개인이 지적으로 향상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미국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학회 성격의 조직을 
 
창립하고자 주위에 널리 알리고 협조를 구했다. 초대회장에 
福澤諭吉후쿠자와유키치를 적극 추대하였으나 본인의 고사로  森有礼모리아리노리가 초대회장을 맡고 적극적인 계몽활동을 펼치게 되었다.이듬해 1874년부터 기관지 『明六雑誌』메이로쿠잣시를 발행하고 개화기 계몽에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3. 福沢諭吉후쿠자와유키치의 활약 

 

하급무사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살 때 아버지를 여위고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게 된다.  소년시절에는 한학을 습득한 諭吉유키치지만, 19세 되는 해 長崎나가사끼에 가서 네덜란드어를 공부하게 된다. 당시 외국 함대의 출몰으로 함포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자, 그의 형이 네덜란드식 함포를 배우기 위해서는 원어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권하여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大阪오오사까를 거쳐 江戸에도에 진출하게 되나, 1859년 일미수호통상조약에 의해 외국인 거류지가 된 横浜요코하마를 구경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오로지 영어만 통용되고 자신이 습득한 네덜란드어로는 간판도 읽지 못해,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영어의 필요성을 통감한 諭吉유키치는 영·네 사전을 통해 독학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한다. 1859년 겨울, 일미수호통상조약 비준교환을 위한 사절단의 일행으로 도미 사절단에 동행한다. 그 후 런던 만국박람회를 구경하

고 귀국 길에 홍콩을 들러 영국인이 중국인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충격과 분노를 느낀다.

정부에서는 諭吉유키치를 중용하려고 하나, 그는 고사하고 교육과 저작 활동에 전념하였다. 慶応義塾케이오기주쿠대학과 일간신문인『時事新報』지지신뽀(산케이신문의 전신)의 창설자이다. 1882년에 방일한 김옥균과 박영효와 친분을 가지게 된 諭吉유키치는 조선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일본의 군비는 일본 일국을 위한 것은 아니고, 서양제국의 침략으로부터 동양제국을 보호하기 위함이라 생각. 이를 위해서는 조선에 있어서의 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일본이 조선의 근대개혁을 도울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로서 諭吉유키치는일본 국내에서 가장 강경한 대청 주전론자가 되었다.

특히 그의 저서 『학문의 장려』(원제『学問のすすめ』)는명치 5년부터 9년까지 연속 출간되었는데, 초편의 권두에 너무나도 유명한 말로「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고, 사람 밑에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였다」고 서술하고 인간은 평등하며, 천하고 귀함을 정하는 것은 학문의 있고 없음에 따른다고 주장하였다. 에도 시대의 신분제도하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차별을 받았던 청년들에게는 이야말로 구세주와 같은 글로 이로 인해 청년들의 향학열을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 3 절  번역문학의 등장


명치유신 후, 신시대의 대중들에 있어서 그들을 만족시킬만한 신문학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종래의 戯作문학에는 흥미가 떨어져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문학의욕을 충족시켜줄 작품을 바라마지 않았다. 이런 시기에 나타난 것이 번역 문학이었다. 
 

번역소설은 명치 초기에 로빈슨크루소를  번역한 「魯敏孫全伝」로비손젠덴,  아라비아나이트를 번역한「暴夜物語」아라비아모노가타리 등이 간행되었지만, 아직 그 수는 많이 부족하였다. 

명치 10년대가 되자 그 수도 비약적
 
으로 증가해, 번역소설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 중에도 「80일간 세계일주」「해저2만리」를 중심으로 한 과학 · 모험물과 리튼의 「花柳春話」카류우슌와 등의 정치물이 각광을 받았다.

이런 번역소설은 戯作문학의 반성을 촉구하게 되고 새로운 문학의 탄생을 촉구하였다.






제 3 장  명치 중기의 문학


제 1 절  정치소설


1. 정치소설 등장의 배경과 정치소설

 

번역소설에 의해 종래에 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소설이 등장하고, 당시의 사회적 기운과 연동하여 이윽고 정치소설이라고 하는 일종의 경향소설이 유행하게 되었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과 또 활발한 활동을 지향하는 자유민권운동의 기운이, 문학에 있어서도 정치의 이상과 정견을 소설로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접목되었다. 따라서 작자의 대부분이 문학자라기보다는 정치가라 할 수가 있었다. 矢野龍渓야노류우케이의「経国美談」케이코쿠비담과 東海散士토오카이산시의 「佳人の奇遇」카진노키구, 宏末鉄腸히로스에텟쵸오의 「雪中梅」셋츄

우바이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2. 北村透谷의 근대문학의 정의와 정치소설


北村透谷키타무라토오코쿠는 문학을「上の文学」(상류계층의 문학)과「下の文学」 (서민의 문학)
 
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다.  「上の文学」(상류계층의 문학)이란 사서삼경과 같은 사람이 사는 도리를 다룬 것을 지칭하고, 「下の文学」 (서민의 문학)이란 서민들이 추구하는 돈, 쾌락과 같은 서민들의 현실의 즐거움을 그린 것을 말한다. 

근대 이전의 문학에서는  上 ‧ 下의 문학이 수레의 양바퀴처럼 길항하여 서로 따로 존재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근대문학이란 서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上 ‧ 下의 문학이 그 터울을 터고 유기체처럼 서로 어울러져 하나의 문학으로 통합하여야 비로소 근대문학의 형태를 갖춘다고 정의하였다. 

정치소설의 흔한 소재로 등장하는 우국지사와 게이샤의 사랑을 예로 들면, 우국지사란 「上の文学」를 상징하고, 게이샤란 쾌락의 대상이었던 「下の文学」을 상징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사랑을 빠진다고 하는 것은 형식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두 가지 요소가 융합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즉 근대문학이 갖추어야 요소를 충족하였다는 말이다. 물론 정치소설은 자신의 정견과 정략을 담아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점

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 소설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즉 공리주의를 배제하여야 하지만 그렇지가 못하는 점이다. 또 완성도 측면에서도 문학적으로 훌륭한 작품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정치소설은 근대문학이라고 할 수가 없지만 위에서 언급한  上 ‧ 下의 문학이 융합된 점을 고려하면, 문학사적으로 근대문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제 2 절  사실주의 문학


1. 사실주의 문학 등장의 배경


번역소설, 정치소설과 같은 종래에는 볼 수가 없었던 새로운 형식의 문학이 유행을 하였지만 이는 일시적인 과도기적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새 시대를 대변할 새로운 문학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를 뒷받침할 문학론의 제시가 필요하였다. 이런 요구에 호응하여 등장한 것이 사실주의 이론의 제창이었다.

근대문학의 특징은 사실주의에 의해, 새로운 인생해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구시대의 문학이념인 戯作게사쿠의 태도나, 문학을 권선징악의 수단으로 보는 종래의 문학관을 부정하는 이론을 펼쳤다. 이는 외국문학의 연구에서 다져진 지식의 구현이기도 하였다. 사실주의이론은 진정한 근대문학의 기초를 이루어낸 이론이라고 할 수가 있고, 또 이 이론이 단순히 이론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실제 소설을 적

는 작가에 의해 주장되어서, 창작과 연결이 된 점에 그 특색이 있다.


2. 坪内逍遥츠보우찌쇼오요의 小説神髄쇼오세츠신즈이


명치 18년에서 19년에 걸쳐 坪内逍遥에 의해 간행된 「小説神髄」는, 진정한 근대문학의 여명을 알리는 효종에 비유될 수가 있다. 새로운 소설의 방향으로 그는 사실주의의 규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소설의 주안은 人情이다. 세태
 
풍속은 그 다음이다. 人情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욕정 즉 백팔번뇌가 그것이다.’ 백팔번뇌 즉 인간심리를 분석해서 사실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히 사물의 피상적인 면을 그리는 것이 아닌 골수를 그려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작자는 심리학자와 같이, 인간을 표리 양면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작자의 태도까지 언급을 하였다. 또 종래의 권선징악과 같은 공리주의 문학은 전근대적, 봉건적인 것이라 비난하였다. 이러한 문학이론은 逍遥의 영문학 지식부터 얻어진 산물이었다. 

이론을 발표한 逍遥는 「当世書生気質」토오세쇼세이카타기를 창작해 이를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 소설은 한 서생을 중심으

로 그를 둘러싼 많은 서생들의 생활이나 성격 등을 묘사해 당시의 서생들의 모습을 그려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자신의「小説神髄」에서 서술한 이론만큼 철저하지 않았고, 종래의 소설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다.



3. 二葉亭四迷후타바테이시메이의 小説総論쇼오세츠소오론


逍遥의「小説神髄」에 이어 한층 더 그 입
 
장을 철저화한 것이 二葉亭四迷의 「小説総論」이었다.

「小説総論」은 명치19년 4월에「中央学術雑誌」에 게재되었는데, 「小説神髄」보다 시기적으로 뒤에 출발하였기에 「小説神髄」를 뛰어넘어야할 숙명을 지니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러시아의 베린스키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핵심을 이루고 있는 관점은 「小説神髄」와 같이, 권선징악소설을 부정하고 사실소설의 리얼리즘을 주장이었다. 주장의 태도는 「小説神髄」의 절충적인 태도를 훨씬 철저화하였다. 전체적인 내용은 짧지만, 응축된 표현 속에 소설이론의 체계와 창작의 지침이 담겨져 있고 내용도 더욱 풍부하였다.

「小説神髄」와 함께 문학사에 있어서 그 지위는 확고하다고 하겠다. 

二葉亭는 이론을 실천하기 위해 소설「浮雲」우끼구모를 창작하였다.



제 3 절 硯友社켄유우샤의 등장


1.  硯友社 등장의 배경


서양의 문물, 제도의 유입을 너무나도 서둔 나머지, 극단적인 서양 일변도에 대한 비판과 반성하는 분위기가 사회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열화와 같은 서양에 대한 관심과 모방은 명
 
치 20년의 鹿鳴館로쿠메이칸 가장무도회를 정점으로, 이윽고 반성기로 접어들었다. 게다가 그 반동으로 점차 보수적인 사상이나 국수주의적인 풍조가 되살아났다. 극단적인 것은 예외로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자국의 전통이나 고전의 훌륭함을 존중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기에 사회적인 정서도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국수주의적인 모임이 확실히 단결하여 활동을 시
작한 것은 명치 20년대에 들어서였다. 명치 21년에 三宅雪嶺미야케세츠레이 ‧ 志賀重昂시가시게타카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政敎社세이쿄오샤가 그 시발점으로 그들은 기관지 「日本人」을 중심으로 천박한 문명개화의 세상을 비난하고 국수주의를 옹호하며, 서양에 대해 비굴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을 공격하였다.
문학에 있어서도 외국문학의 도입에 의해 근대문학이 가야
 
할 길이 어떠한 것인가라는 방법을 배운 이상, 그 방법론을 이용해 자국의 고전을 되돌아보고, 그 가치를 새롭게 발견해보자는 단계로 한 단계 진보가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우선 떠오르는 것이 井原西鶴이하라사이카쿠, 近松門左衛門치카마츠몬자에몽이었다.

특히 西鶴의 문학은 인간을 유형적으로 그린 戯作문학과는 달리, 새로운 인간의 형태를 그리고 있다는 점을 재발견해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렇게 문단에는 의고전주의 경향이 풍미하게 되었는데, 그 

중심에 선 것이 硯友社의 동인들이었다. 硯友社는 명치 18년에 尾崎紅葉오자끼코오요오를 중심으로 山田美妙야마다비묘오, 石橋思案이시바시시안 등이 만든 문학결사단체였다. 기관지로 처음에는 필사 회람인 「我楽多文庫」가라쿠타분코를 시작으로 뒤에는 인쇄하여 시판까지 하게 되었다. 도중에 岩谷小波이와야사자나미, 川上眉山카와카미비잔, 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오도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硯友社는 점차 문단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고 존재감을 자랑하며 명치 20년대를  이끌었다. 특히 紅葉는 幸田露伴코오다로한과 더불어 소위 말하는 紅露코오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다.

 

2. 尾崎紅葉


紅葉는 「二人比丘尼色懺悔」니닌비쿠니이로잔게를 출세작으로 문단에 등장했다. 이 작품은 문체를 당시 주목받고 있던 지문을 문어체로, 회화를 구어체로 적은, 일종의 
 
雅俗절충체를 취했다. 이 형태는 당시의 
새로운 형태로 山田美妙의 단편집 「夏木立」나츠코다찌를 의식해서 적었다고 한다. 이어서 구상이나 문장에서 완전히 西鶴사이카쿠를 모방해서 적은 「伽羅枕」캬라마쿠라「二人女房」니닌뇨오보「三人妻」산닌츠마 등을 적어 화제를 모았다. 그리고 신시대의 풍속에도 관심을 보여 「多情多恨」타죠오타콘「金色夜叉」콘지키야샤를 적어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은 심리묘사에도 일보 전진한 작품이라 평해진다. 

紅葉는 이렇게 당시의 문단에 거장으로서 절대적인 세력을 과시하게 되었지만, 새 시대를 개척할 작가로는 성장하지 못한 채 끝나버렸다. 하지만 문하생으로는 신문학을 이끌어갈 우수한 작가로서 泉鏡花이즈미쿄오카, 小栗風葉오구리후우요오, 徳田秋声토쿠다슈우세이 등이 배출되었다.


【『金色夜叉』】尾崎紅葉가 적은 명치시대의 대표적인 소설. 読売新聞에 1897년1월1일 -  1902년5월11일까지 연재. 間貫一하자마칸이찌의 약혼녀 鴫沢宮시기사와미야는 결혼을 앞두고 부호 富山唯継토미야마타다츠구에게 시집을 간다. 이 사실에 격노한 貫一는, 熱海아타미에서 宮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힐난하나, 본심을 내놓지 않는다. 이에 貫一는 宮를 뿌리치고, 복수를 위해 고리대금업자가 된다. 연극과 영화로 상영된 熱海의 

장면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수일과 심순애」란 제목으로 신파극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 소설은 문예평론가 北嶋廣敏키타지마히로토시에 의하면 間貫一의 모델이 巖谷小波이와야사자나미라고 하며, 그에게는 고급요정에서 일하는 須磨스마라는 연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3. 幸田露伴코오다로한

 

紅葉와 함께 명치 20년대는 紅露코오로 시대라 불릴 정도로 일세를 풍미한 露伴이지만, 그의 문단에의 등장은 완전히 혜성과 같은 존재였다. 유년 시절부터 문학을 좋아하고, 또 일찍이 西鶴사이카쿠를 즐겼으나, 아버지의 반대로 전신학교를 들어갔고, 졸업해 전신기사로 北海道홋카이도오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늘 마음은 東京의 문단에 있었다. 그러던 중, 당시의 紅葉를 비롯한 작가들의 활동에 자극을 받아, 퇴직 후 상경하여 「露団々」츠유단단을 잡지 「都の花」미야코노하나에 실어 호평을 얻었다.「露団々」에서는 한자어, 불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그의 언어 능력
 
을 마음껏 발휘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의 人情소설이 유행하는 가운데 확실히 이색적인 작품이었다. 이어 발표한 「風流仏」도 露伴의 명성을 더욱 높인 작품으로, 예술적 삶을 추구하는 주인공의 이상주의를 잘 나타낸 작품이었다. 露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一口剣」잇코오켄「五重塔」고쥬우토오도 예술의 
길을 정진하는 남성적 이상형을 그리고 있다. 

露伴은 紅葉와 자주 비교되는데, 예를 들어 두 사람 다 소재를 시정의 평범한 사람의 세계를 그려도,  紅葉는 그 가운데에서 인간의 특질을 구석구석 남김없이 그려내고자 하는 풍속소설 풍의 태도를 취하고 있는 반면, 露伴은 같은 소재라도 그 속에서 호흡하는 인간의 신념이나 삶의 가치 등을, 특히 부각시켜서 그리고자 하는 이상소설 풍의 태도를 취했다. 또한 紅葉가 여성의 동작이나 태도를 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그를 능가할 자가 없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반면, 露伴은 남성의 기골이나 정신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다. 

露伴은 이어서 「対髑髏」타이도쿠로「風流微塵蔵」후우류우미진조오「天うつ波」소라우쯔나미 등을 적으면서 작풍은 점차 사실적으로 가까워졌지만, 어쨌든 모두가 걸작으로, 문단에서는 특이한 존재이긴 하지만 부동의 지위를 확보하였다.

소설 외에도 수필, 역사연구 등에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고, 특히 「芭蕉七部集」의 해석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五重塔』】  1892년 신문『国会』에  연재되었다. 

솜씨는 있으나 우둔한 성격으로 세상은 별로 인정하지 않는 十兵쥬우베이. 그런데 感応寺칸노오지에 오중탑이 건립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朗円로오엔上人에게 부탁을 하러 간다. 

원래 感応寺의 일을 도맡았던 源太겐타가 하여야 하는 일이라 평소 源太에게 신세를 지고 있는 十兵衛는 내심 괴롭지만 워낙 하고자하는 열망이 커,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上人은 十兵衛의 열의에 감동해, 十兵衛와 源太 두 사람 다 불러서는 둘이서 의논해서 결과를 말하라고 두 사람에게 결정을 위임한다. 源太는 十兵衛 집에 가 두 사람이 같이 하자고 제안을 하나 十兵衛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源太는 처음에

는 자기가 하여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나, 집에서 다시 생각해보고는 上人에게 결정해 줄 것을 부탁한다. 上人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源太의 행동을 칭찬한다. 上人은 十兵衛에게 탑을 부탁한다. 탑은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나, 폭풍우가 몰아친다. 폭풍우가 그치고 난 뒤, 탑은 위용을 자랑한 채 무사히 서있었다. 上人은 十兵衛와 源太를 부르고는 탑에「十兵衛 이것을 만들고, 源太 이것을 이루다」라는 휘호를 쓰고 두 사람을 칭찬하였다. 十兵衛에 의해 구현되었던 예술지상주의사상은, 일체의 세속적인 고려를 무시하고 오직 예술을 향해 직진하는 예술가의 영혼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露伴의 이름을 드높인 불휴의 명작.


제 4 절 浪漫主義


18세기말부터 19세기전반에 유럽에서 시작되어, 유럽의 영
 
향을 받은 그 이외의 지역에서 일어난 정신운동의 하나. 그전까지 이성편중인 합리주의에 대해,  감수성이나 주관에 중점을 둔 일련의 운동을 지칭한다. 이는 고전주의와는 대극을 이룬다. 연애찬미, 민족의식의 고양, 중세에 대한 동경 등의 특징을 가지고, 근대국민국가의 형성을 촉진하였다.

이런 움직임은 문예・미술・음악・연극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 파급되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주의・자연주의의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에서는 명치중기(1890년 전후) 이후, 서양의 낭만주의 

문학의 영향을 받아, 森鴎外모리오오가이의『舞姫』마이히메(1890년)에 의해 낭만주의문학이 시작되었고, 「文学界」동인 島崎藤村시마무라토오손・北村透谷키타무라토오코쿠에 의해 추진되었다. 透谷는『内部生命論』(1893년)에서 ‘나는 인간의 근본인 생명에 중점을 두고자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사실주의에 대한 반동에서 泉鏡花이즈미쿄오카의 관념소설이 탄생하였고, 청일전쟁 후의 사회적 불안이 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오의 비참소설(심각소설)로 등장하게 하였다.

일본의 낭만주의문학의 주요작품을 들자면, 연대순으로 樋口一葉히구찌이찌요오의 단편소설『たけくらべ』타케쿠라베(1895년),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의 시집『若菜集』와카나슈우(1897년), 国木田独歩쿠니키다돗뽀의 수필조의 소설『武蔵野』무사시노(1898년), 徳冨蘆花토쿠토미로카의 사회적시야를 가진 가정소설『不如帰』호토토기스(1899년), 泉鏡花이즈미쿄오카의 환상소설『高野聖』코오야히지리(1900년), 与謝野晶子요사노아끼꼬의 가집『みだれ髪』미다레가미(1901년), 高山樗牛타카야마쵸오규의 평론『美的生活を論ず』비테키세이카츠오론즈(미적 생활을 논함)(1901년) 등이 있다. 国木田独歩은 이윽고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적인 작풍으로 변화해 갔으며, 島崎藤村은『破戒』(1906년)에 의해 낭만주의에서 자연주의문학으로 완전히 이행하였다. 일본의 낭만주의 문학은 서양에 비해 매우 단명하였다. 그리고 참고로 「浪漫」이란 단어는 夏目漱石나츠메소오세끼에 의해 최초로 고안되었다. 




1. 森鴎外모리오오가이의 계몽활동


森鴎外는 유년 시절부터 한학・네덜란드어・독일어를 배우고, 20살의 젊은 나이로 동경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다녀와서는, 독일에서 습득한 외국문학・예술・미학・철학 등의 광범위한 지식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계몽활동을 펼쳤다. 그는 서양미학 특히 하트만(Hartmann Nicolai)의 미학에 입각하여 시학의 법칙을 적용함으로써 유치하고 혼란 속의 문단에 확고한 지표를 수립하고자 결심하고, 『しがらみ草紙』시가라미소오시를 창간하여 계몽적 논진을 펼쳤다.

평론이 문학의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은 鴎外의 활약에 크게 힘입었다. 당시의 평론가로서는 石橋忍月이시바시닌게츠가 있었는데, 「幽玄論」유우겐론「罪過論」자이카론등으로 鴎外와 논쟁을 펼쳤다.

또한 『しがらみ草紙』지상에서 坪内逍遥츠보우치쇼오요를 비판하여 没理想보츠리소오 논쟁을 펼쳤다.

鴎外는 독일 유학 삼부작 「舞姫」마이히메를 蘇峰소오호오의 의뢰로 『国民之友』코쿠민노토모에 발표하고 이어서 「うたかたの記」우타카타노키「文づかひ」후미즈카이를 발표하였다.  청
춘의 낭만적인 향기를 물씬 풍기는 비련의 사랑이야기였다. 특히「舞姫」는  鴎外의 내면에 숨겨진 청춘의 비극을 봉인한 채로, 구구절절 독자의 심금을 울렸다. 주인공이 서양의 자유스런 공기를 접하고, 진정한 자아에 눈을 뜨지만 의지가 약한 자신, 또 관료제도의 중압에 패배하는 비극은, 근대 일본의 비극의 상징이었다. 이 작품이 二葉亭후타바테이의 소설「浮雲」우끼구모와 함께 근대지식인의 고뇌의 모습을 문학에 정착시켜 높은 평가를 받았다. 
 

鴎外는 또 서양의 낭만주의 소설을 번역, 소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명치 25년부터 34년까지 9년을 걸쳐 작업한 안데르센의 번역「興詩人」은 원작 이상의 완성도라고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작품은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낭만적 풍조를 일으키게 하였다.


2. 「文学界」분가쿠카이 동인 


낭만주의 운동은 鴎外의 계몽활동에 의해 촉진되었는데, 명치 26년 창간의 잡지 「文学界」의 출현에 의해 더욱 가속되었다. 잡지 「文学界」는 기독교 잡지 「女学雑誌」죠가쿠잣시를 모태로 세상에 나왔는데, 뒤에 문학만을 위한 잡지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 색채가 강한 「女学雑誌」죠가쿠잣시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동인으로는 에머슨, 바이런 등의 영향을 받은 北村透谷키타무라토오코쿠를 중심으로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 平田禿木히라타토

 

쿠보쿠, 戸川残花토가와잔카, 馬場孤蝶바바코쵸오 등이 모였고, 뜻은 같이 했으나 아직 무명이었던 田山花袋타야마카타이, 上田敏우에다빈, 樋口一葉히구찌이찌요오, 柳田国男야나기다쿠니오 등이 기고하였다.

동인의 중심적 존재였던 北村透谷는 낭만적이나 격렬한 정열을 논문에 쏟아 부으며 선두에 서서 활약을 하였다. 「人生に相渉るとは何の謂ぞ」진세이니아이와타루토와난노이이조(인생을 산다것은 무엇인가)에서는 인생의 사실을 객관적 실재로 보지 않고 주관적 실재로 보는 것에 관해 山路愛山야마지아이잔과 논쟁하였고, 「内部生命論」나이부세이메이론을 발표하고, 사회적 모순에 의해 일어나는 인간의 불행에 대해 인간을 내부생명의 신앙에 의해 정신적인 세계로 승화시켜 영혼의 안녕을 꾀하는 것으로 구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인 정신은, 육체의 혹사와 정신의 과로로 인해 점차 광적으로 치달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잡지 「文学界」는 透谷의 훌륭한 평론 외에도, 一葉이찌요오

의 「たけくらべ」타케쿠라베, 뒤에 「若菜集」와카나슈우에 수록된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의 시 등 독특한 작품들을 게재하여 특징 있는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3.  高山樗牛타카야마쵸규우의 사상편력


명치 27년 「読売新聞」요미우리신분의 
 
현상 역사소설에 익명으로 응모해서 2등으로 당선한 낭만적 역사소설 『滝口入道』
타키구찌뉴우도오로 재능을 인정받은 樗牛쵸오규우는 당시는 아직 대학 재학 중이었다. 이후로 소설을 창작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해 「帝国文学」의 편집위원이 되어 평론을 발표하는 한편, 「太陽」타이요오의 문예평론을 담당하면서 평론을 발표하였다. 일시적으로 2高의 교수직을 하였지만, 「太陽」의 주간을 맡으면서 鴎外오오가이처럼 미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왕성한 평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생애는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생전 그의 사상은 3종류의 사상에 지배되어 또 그를 강력히 주장한다. 

최초는 일본주의였다. 명치 30년경부터 주장한 일본주의에서는 낭만적인 국가지상주의를 내걸고, 기독교나 불교를 비국민적인 종교로 배척하고 神道를 믿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

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청일전쟁 후의 국민의식의 대변이라고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치 34년경부터 이 일본주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바뀌었다. 니체의 영향에 의한 것인데, 니체가 주창하는 개인주의, 초인주의를 예찬하고 34년에 「美的生活を論ず」비테키세이카츠오론즈(미적 생활을 논하다)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이도 얼마가지 못하고 같은 해 니체로부터 日蓮신앙으로 전환하였다. 건강이 여의치 못하다는 것을 자각한 樗牛가 종교에 의지해 보고자하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그의 사상편력은 당시의 현실 사회를 비추어 볼 때 낭만적 자아가 모순이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상을 모색하는 과정의 표출이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4.  泉鏡花이즈미쿄오카의 신비 · 낭만


硯友社켄유우샤의 紅葉코오요오의 가장 충실한 제자이기도 한 
 
鏡花는 스승의 지도와 알선으로 점차 작가로서 성장을 하였다. 처음에는 『夜行巡査』야코오쥰사『外科室』게카시츠등의 관념소설을 적어, 현실의 모순을 파헤치는 문제의식을 가진 작풍을 표출하였다. 이는 硯友社의 선배 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
나 川上眉山카와카미비잔 등의 작풍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鏡花의 본령은 원래 이러한 사상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 있었다. 명치 30년대에 접어들자 점차 독자적인 신비적이고 낭만적인 작풍을 확립해 갔다. 즉『照葉狂言』테리하쿄오겐『高野聖』코오야히지리『婦系図』온나케이즈『歌行燈』우타안동 등의 걸작을 발표하면서 작가적 지위는 더욱 견실해졌다. 

鏡花는 여성미를 그리는데 그의 장점이 있었고, 청순한 연애나 사회 암부와의 투쟁을 주제로 작품을 그렸는데, 『照葉狂言』테리하쿄오겐에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은 작자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연상의 여성과의 순애보를 그렸고, 『婦系図』『歌行燈』의 일련의 게이샤 소설에서는,  鏡花의 독자적인 여성의 이상화가 엿보인다. 여성의 미화는 때로는 여성의 마성으로 승화되어, 초현실적인 신비의 세계로 표출되었다. 『高野聖』는 그런 의미에서 대표적인 작품이다.


【『高野聖』】단편소설. 당시 28세였던 鏡花가 작가로서의 지위를 구축한 작품으로, 환상소설의 명작으로 유명한 작품.高野山의 한 승려가 여행 도중 길동무가 된 젊은이에게 그가 경험한 괴기담을 들려주는 이야기. 뱀과 거머리가 득실거리는 길을 빠져나와 겨우 다다른 곳에는 요염한 미녀가 사는 집이었다. 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하룻밤을 무사히 넘긴 승려는 마을로 돌아가나, 그 여인을 잊지 못해 다시 그집으로 돌아가는 중, 그 여인의 정체를 알게 되는 이야기.

승려가 체험한 초현실적인 유현세계가 鏡花 특유의 풍부한 어휘력과 시각적이고 독특한 문체에 의해 잘 묘사되어 있다.

제 5 절  청일 · 러일 戰後 문학


1. 청일 러일 전쟁 후의 사회적 동향과 문학


청일전쟁(명치27∼28)부터 러일전쟁(명치37∼38)에 이르는 약 10년간은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그 모순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이도 하다. 그 모순점이 여러 형태로 문학 작품에 반영되었는데, 비참소설과 관념소설이 그  형태의 하나였다. 

원인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들 수가 있으나, 

첫 번째로는 명치20년대를 제패하고 있었던 紅葉를 비롯한 硯友社 일파의 천박하고 피상적이었던 사실소설을 들 수가 있다. 

두 번째로는 청일전쟁에서의 승리가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저널리즘의 확대에 따라 발표의 장이 넓어짐에 따라 문운의 기상이 상승한 점도 그 요인이다. 

세 번째로는 자본주의 발전의 반대급부로 사회의 모순이 심화되어, 빈민문제 등이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원인으로 종래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젊은 대학생과 여학생의 연애 이야기 뿐 아니라, 그 제재가 확대되어, 비참하고 심각한 사건이 소설에 등장할 수가 있었다. 広津柳浪의 『変目伝』헤메덴,『黒蜥蜴』쿠로토카게는 심각한 사건을 다룬 소설이었다. 이렇게 비참한 사건을 제재로 다룬 

소설을 비참소설이란 명칭이 붙었다. 樋口一葉의『にごりえ』니고리에도 일종의 비참소설로 볼 수가 있다. 

한편 鏡花의 『夜行巡査』야코오쥰사『外科室』게카시츠, 川上眉山의 『うらおもて』우라오모테『書記官』쇼키칸 등은 비참, 심각한 제재를 다루면서 작가의 관념이 부가되었기에 관념소설이라 불렸다. 이렇게 비참소설, 관념소설은 평론가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유행하며 硯友社의 사실주의를 제재적으로 확대, 심화시켰으나, 진정한 리얼리즘의 경지에는 달하지 못하였다.


1)樋口一葉 히구찌이찌요오


露伴의 작품에 매료되어 작가로 뛰어들어 명성을 떨친 여류작가에 一葉가 있다. 처음에는 中島歌子나까지마우타꼬의 문
 
하에 들어가 和歌를 배웠었다. 그 뒤, 「朝日新聞」의 기자로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半井桃水나까라이도오스이와 교류를 통해 소설을 적게 되었다. 따라서 초기의 소설에는 半井桃水의 영향으로 戱作적인 경향이 있었으나, 점차 독자적인 색채를 띠며 신경지를 개척하였다. 대표작으로는『たけくらべ』타케쿠라베『にごりえ』니고리에『十三夜』쥬우산야가 있는데, 이는 一葉의 3부작이라 불리는 명작
들이다. 특히 『たけくらべ』는 一葉가 살던 下谷龍泉寺町시타야류우센지쵸오 부근의 어린이들의 생활을 그린 것으로, 吉原요시와라라고 하는 유곽을 눈앞에 둔, 특수한 환경에서 사춘기를 맞는 소년, 소녀의 미묘한 심리를 아련하게 그린 一葉의 대표걸작 소설이다.

一葉는, 봉건적 사회에서 살아야 하는 여성의 고뇌를, 작자의 생동감 넘치는 필치에 의해 독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었으며, 그 결과 이색적이고 비애감이 넘치는 一葉 독자적인 문학을 탄생시켰다.

다만, 이 여류작가는 불과 25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서 혜성처럼 지고 말아, 문단 및 독자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たけくらべ』】단편소설. 1895년부터「文学界」분가쿠카이에 단속적으로 연재. 1896년4월10일 「文芸倶楽部」분게이쿠라부에 일괄게재.

吉原의 遊女언니가 있는 美登利미도리는 풍부한 용돈으로 인해 아이들의 여왕적인 존재였다. 그에 비해 龍華寺류우게지 주지의 아들인 信如신뇨는 속물적인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는 내향적인 소년이었다. 둘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 운동회날 美登利가 信如에게 손수건을 준 모습에 모두가 놀린다. 信如는美登利에게 험악하게 대하고 美登利도 信如를 싫어하게 된다.

吉原의 아이들은 도목수의 아들 長吉가 대장인 뒷골목파와 고리대금집 아들인 正太郎가 대장인 큰길파로 대립되어 있었다. 마츠리날 正太郎가 없는 틈을 타 큰길파의 三五郎가 뒷골

목파 아이들에게 얻어맞는다. 이에 美登利가 화를 내지만 오히려 長吉에게 모욕을 당한다.

비가 오는 어느 날, 심부름을 가던 信如는 美登利의 집 바로 앞에서 게타의 끈이 떨어져 낭패를 본다. 美登利는 상대가 信如인 걸 알고 몸을 감추지만, 주저하면서 끈을 던져준다. 마침 지나가던 長吉의 게타를 빌려 신고 가 버린다.

大鳥神社의 마츠리날, 正太郎는 머리를  島田로 올리고 아름답게 꾸민 美登利에게 말을 거나,
 
美登利는 슬픈 표정으로 正太郎를외면한다. 이후 다른 아이들하고도 어울리지 않는다. 어느 날 누군가가 집의 문에 수선의 조화를 끼워둔 것을 본 美登利는 島田에 장식한다. 그날은 信如가 승려학교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소년소녀의 심리를 묘사한 소설은 당시 전례가 없던 시도였고, 이후 이소설로 인해 一葉의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게 한 명작이다. 



2)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오

 

의사 広津俊蔵히로츠슌조오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배우고 고서적을 탐독하였다. 9살 되는 해 폭행을 한 것에 대해 아버지의 심한 질책과 함께 숙모에게 맡겨져서는 2년 후에나 집으로 돌아온다. 1874년 일가가 東京으로 이주하고, 소학교를 거쳐 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공부하고는, 東大 医学部予備門에 입학한다. 그러나 1878년에 폐결핵에 

걸려 바로 퇴학한다. 아버지의 친구 五代友厚고다이토모아츠의 권유로 大阪로 가서 그 밑에서 일을 배우고, 農商務省의 관리가 되었지만, 고전 서적을 탐독하던 그는 문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퇴직을 한다.

1883년에 부모가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방랑을 하게 된다. 1887년 친구인 화가 山内愚仙야마우찌구센의 권유로 처녀작 「女子参政蜃中楼」죠시산세이신츄우로란 정치소설을 『東京絵入新聞』토오쿄오에이리신붕에 연재한다. 1888년 蒲池鎮厚카마찌시게아츠의 딸 寿美子스미꼬와 결혼, 博文館에 들어가 尾崎紅葉를 알게되어, 硯友社 동인이 되고 「残菊」잔기쿠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 후, 동경의 여러 신문사를 전전하다가 1895년 무렵부터 객관묘사에 눈을 뜨고, 「変目伝」헤메덴을 読売新聞에 연재하고, 이어서「黒蜥蜴」쿠로도카게를 발표해, 하층사회의 비참한 실태를 그리는 독자적인 작풍을 구축해서는 川上眉山이나 泉鏡花의 관념소설과는 또 다른 심각소설, 비참소설 작가로 이름을 떨친다. 그리고 사실적인 심리묘사를 한층 강화해  「今戸心中」이마도신쥬우(1896년)등으로 호평을 받고, 樋口一葉와 함께 인기작가가 된다.

그 후, 고난에 찬 작가 생활을 보내다 1928年 오랜 폐결핵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3)川上眉山카와카미비잔


가족과 함께 大阪에서 상경해, 東京府 제일중학, 進文学舎신분가쿠샤를 거쳐 大学予備門에서 尾崎紅葉오자끼코오요오, 山
 
田美妙야마다비묘오를 알게 되고, 硯友社켄유우샤의 창설에 참가 한다. 1888년, 『我楽多文庫』가라쿠타분코에 처녀작 「魂胆秘事枕」콘탄히지마쿠라를 게재, 그 후 여러 가지 글을 올려 인기를 얻게 된다. 같은 해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石橋思案이시바시시안, 尾崎紅葉오자끼코오요오의 뒤를 이어 제국대학 문과대학을 중퇴. 그 후, 硯友社와는 거리를 두고 『文学界』의 멤버들과 교우를 가진다. 사회의 모순을 제재로 관념소설이라고 불리는 「書記官」「うらおもて」를 발표하고 인기작가로 부각된다. 1896년에 오랜 여행길에 오르고, 三浦미우라 반도의 모습을 그린「ふところ日記」후토코로닛키도 수려한 문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95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세가 기울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1906년에는 염세관을 엿보이는『ゆふだすき』유후다스끼를 발표. 1908년6월15일 새벽, 문학적으로 한계를 느낀 그는, 면도칼로 목을 그어 자살을 하고 만다. 향년 40세.


2. 자연묘사의 계보

청일 전쟁 후, 사회적 모순을 그린 관념소설, 심각소설이 유행을 하는 한편, ‘자연’에 대한 문학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二葉亭四迷후타바테시메이의 번역이 선구가 되어 근대적 자연묘사의 계보로부터 徳富廬花토쿠토미로카의 自然と人生시젠도진세이, 国木田独歩쿠니키다돗뽀의 武蔵野무사시노등의 산문시적인 자연문학이 탄생되었다.


1)徳冨廬花토쿠토미로카

 

「徳冨」의 표기에 집착을 보이며, 각종 문학사전, 문학관, 기념공원 등에도 「冨」란 글자를 채용하고 있다. 이는 국가주의적 경향이 점점 더 심해지는 친형 蘇峰소오호오와 사이가 벌어지고 결국 1903년 「告別の辞」코쿠베츠노지(고별사)를 발표하고 절연을 선언하면서, 형 蘇峰와 같은 성을 쓰는 것이 불쾌하다고 「徳冨」란 성을 고집하였다.

徳富一敬토쿠토미잇케이의 차남으로 肥後国히고노쿠니葦北郡아시키타군水俣村미나마타무라에서 출생. 熊本バンド쿠마모토반도의 멤버의 한 사람으로서 同志社도오시샤 영어학교를 다니며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톨스토이에 매료된다. 후년 부인과 같이 여행을 할 때, 톨스토이가 사는 마을을 방문해 톨스토이와 회견을 하였다. 그 때의 기록『順礼紀行』쥰레이키코오는 오스만제국 치하의 예루살렘 방문기도 포함해, 귀중한 기록이다.

형인 사상가・져널리스트인 徳富蘇峰토쿠토미소오호오의 밑에서 일을 배운 뒤, 자연시인으로 출발을 하고, 소설『不如帰』호토토기스는 베스트셀러로 각광을 받았다. 또 수필 『自然と人生』시젠토진세이는 수려한 문장으로 절찬을 받고 단숨에 인기작가로 부각되었다.

『不如帰』는 神奈川県三浦郡田越村(현재 逗子市)의 柳屋 

여관에서 집필하였는데, 당시 근처에 살던 육군의 거물 大山巌오오야마이와오가 후처 大山捨松오오야마스테마츠와 재혼하고, 大山巌와 전처의 딸이 몸이 허약한 사실 등을 허구로 각색을 하여 완성한 작품이 『不如帰』였다.

1907년, 현재의 東京 世田谷区세타야쿠粕谷카스야에 이전을 하고, 사망할 때까지 20년간을 이 지역에 머문다. 1910년大逆事件 때, 幸徳秋水 등의 사형을 저지하기 위해 蘇峰를 통해 수상인 桂太郎에게 탄원을 넣고자 했으나, 시기를 놓쳐 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 직후, 제일고등학교의 강연을 외뢰 받는데, 『謀叛論』의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때 강연을 의뢰한 학생 두 명이, 전후 사회당위원장이 되는 河上丈太郎카와카미죠오타로오와 문부대신이 되는 森戸辰男모리토타츠오이었다.

1919년 자신의 출세작 『不如帰』에서 大山捨松오오야마스테마츠를 악인으로 만들어, 힘든 삶을 살게 한 사실에 대해 사죄를 하였지만, 이미 捨松는 임종 직전의 몸으로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1927년 병에 걸려 요양지인 伊香保 온천에서 蘇峰와 재회하고 화회한 후, 뒤를 잘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협심증으로 사망. 향년 58세.

蘆花의 사후, 저택은 부인이 東京시에 기증하여 현재는 蘆花恒春園로카코오슌엔(면적 약7만평방미터)으로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不如帰』】1898년부터 1899년에 걸쳐 国民新聞에 게재되어진 소설. 뒤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중장의 딸, 浪子나미꼬는 친정의 냉혹한 계모, 그리고 까다로운 시어머니의 사이에서 괴롭지만, 해군소위 川島武男카와시마타케오 남작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武男가 청일전쟁에 출진한 사이, 浪子의 결핵을 이유로 이혼을 강요당하고 남편을 그리면서 죽어간다. 浪子의 

‘아아, 인간은 왜 죽을까요? 살고 싶어요! 천년도 만년도 살고 싶어요!

아아 괴로워! 괴로워! 이제 여자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란 대사는 일본근대문학을 대표하는 명대사로 남았다.

가정내의 신구사상의 대립과 알력, 전염병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등 당시의 일반 대중의 취향에 합치해 많은 독자들을 얻었다.

작중 인물에는 실제 모델이 존재하였다. 그런데 베스트셀러가 된 탓에 당시 소설이 그대로 진실이라고 오해한 독자들에 의해 모델의 인물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2)国木田独歩쿠니키다돗뽀

 

아버지 専八는 龍野의 무사로 榎本武揚토벌후, 銚子 앞바다에서 난파해, 吉野屋란 여관에서 요양하던 중, 종업원으로 있던 만이란 여성과 친해져 独歩가 탄생하였다. 소년기의 独歩는 학업성적은 우수하였으나 상당한 악동으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상당한 고뇌를 하였고, 이런 사실들이 그의 성격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논해진다.

1887년, 학제 개편으로 인해 퇴학을 한 후,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今井이마이의 권유로 상경하여 다음해 동경전문학교(현재의 早稲田와세다대학)영어보통과에 입학을 한다. 吉田松陰요시다쇼오인, 명치유신에 강한 흥미를 가지고 학생운동에도 참여한다. 徳富蘇峰토쿠토미소오호오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고는 문학의 길로 진로를 정하고 처녀작 「アンビシヨン안비숀」(야망론)을『女学雑誌』죠가쿠잣시에 발표하는 한편 『青年思海』세이넨시카이 등의 잡지에도 기고를 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어 일본 기독교회의 지도자 植村正久를 숭배하게 된다. 1889년7월10일, 哲夫테츠오로 개명을 하고, 1890년9월에는 영어정치과로 전과를 한다. 워즈워스(Wordsworth), 투르게네프, 칼라일 등을 좋아하고 탐독하였다. 1891년1월4일에 植村正久우에무라마사히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이 해, 학교개혁과 교장 鳩山和夫하토야마카즈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동맹휴업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퇴학을 한다.

1894년,『青年文学』세이넨분가쿠에 참가. 民友社민유우샤에 들어가 徳富蘇峰토쿠토미소오호오의『国民新聞』코쿠민노신분의 기자가 된다. 이해 발발한 청일전쟁에 종군기자로 참가해, 동생 収二슈우지에게 보내는 형식의 「愛弟通信」아이테이츠우신을 

르포르타주로 발표해 일약 유명하게 된다. 귀국 후, 청일전쟁 종군기자 초대만찬회에서 일본 기독교 교풍회의 간사이자 여성운동가인 佐々城豊寿사사끼토요쥬의 딸 信子노부꼬를 알게 된다.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되나, 信子의 양친은 반대를 할뿐 아니라 信子를 감금하고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강요한다.

1895年11月, 信子는 佐々城 집안으로부터 절연을 당하고 徳富蘇峰의 주선 하에 결혼. 逗子즈시에서 두 사람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으나, 너무나도 빈곤한 생활에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듬해 信子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협의 이혼. 이 과정에서 独歩는 크나큰 충격을 받고 만다. 사건의 전말은 뒤에 有島武郎아리시마타케오에 의해 『或る女』아루온나로서 소설화된다. 한편 信子 측에서는 信子의 친척 相馬黒光소오마콧코오가 수기 「国木田独歩と信子」쿠니기다돗뽀또노부꼬를 적어, 独歩가 이상주의적인 반면 상당히 독선적이고 남존여비 사상을 가진 인물이라고 서술하였다. 상심에 빠져있는 独歩에게 蘇峰와 内村鑑三우찌무라칸조오는 미국행을 권유하나 실현은 되지 못했다.

1896년 渋谷시부야에 집을 구하고, 작가생활을 재개. 동년 11월 田山花袋타야마카타이, 柳田國男야나기다쿠니오와 교류를 시작하였다. 1897年「独歩吟」돗뽀긴을『国民之友』코쿠민노토모에 발표. 5월에는 소설「源叔父」겐오지를 발표.

1898년, 하숙집의 딸 榎本治에나모토하루와 결혼. 治하루는 후일 国木田治子쿠니키다하루꼬의 이름으로 独歩社돗뽀샤의 해체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소설「破産」하산을『萬朝報』요로즈쵸오호에 기고하는 한편,  『青鞜』세이토오의 창간에도 참가를 한다.

1907년에 独歩社는 파산을 한다. 独歩는 폐결핵에 걸려 병상에서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전년도에 

간행된 작품집 『運命は』운메이와가 인기를 끌며, 独歩는 자연주의 운동의 중심적존재로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神奈川県카나가와켄茅ケ崎치가사끼에 있는 결핵요양소 南湖院난코인에서 요양생활을 하며며 「竹の木戸」타케노키도「窮死」큐우시「節操」셋소오 등을 발표하나 병상은 악화되고, 1908년6월23일 사망한다. 향년 38세.






















제 4 장  명치 후기의 문학


제 1 절 자연주의


1. 자연주의


자연주의는 예술과 철학분야에서 자연과학의 영향으로 나타난 사상이자 운동이다. 자연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은 실제의 사물과 현상을 자연 세계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초자연적인 존재나 힘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했다. 특히 연극 및 영화, 문학 분야에서 자연주의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상을 작품 속에 담으려고 하였다. 주체들이 고도로 상징적이고 이상적이며, 심지어 초자연적이기까지 한 낭만주의 또는 초현실주의와는 정반대의 운동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주의는 사실주의(realism)의 파생물이라 할 수 있으며, 19세기 프랑스 지역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였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들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그들은 인간의 성격을 유전과 사회적 환경이 결정한다고 믿었다. 사실주의가 주체를 정말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추구한 반면에, 자연주의는 사실적인 묘사뿐만 아니라 주체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환경이나 유전 같은 수면 하의 보이지 않는 힘들을 ‘과학적으로’ 구현함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과학적이며, 또 백과사전을 통째로 머릿속에 넣은 듯한 정밀함을 자신들의 소설에 도입하려고 애썼다. 예를 들어, 에밀 졸라는 그의 소설 「제르미날」(Germinal)을 쓰려고 여러 석탄 광산을 몇 달에 걸쳐 방문했고, 플로베

르는 당대에 역사적인 세부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고증 및 사전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자연주의 작품들은 거칠고 욕망에 가득한 문제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에밀 졸라는 그의 작품에 비관주의와 함께, 성적 욕망에도 솔직함을 드러낸다. 
 
그 외의 작가들에게서도 자연주의 작품들은 도덕적 타락을 비롯하여 배신, 질병, 편견, 인종 차별, 빈곤 같은 인생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경향이 많았다. 

자연주의로 분류되는, 다른 작가로는 알퐁스 도데, 쥘 발레스(Jules Vallés), 조리 위스망스(Joris- Karl Huysmans),  콩쿠르형제, 폴 부르제(Paul Bourget) 등이 있다.


2. 일본의 전기자연주의


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들 중, 특히 에밀 졸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졸라는 일찍이 번역 소개된 베이런의 작품 속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었으며, 森鴎外모리오우가이에 의해 ‘의학적 가설로 접근한 문학론’이라고 논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명치 3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小杉天外코스기텐가이 · 永井荷
 
나가이카후우에 의해 작품에 이식되기 시작했다. 小杉天外코스기텐가이는 작품 「はつ姿」하츠스가따에서, 졸라의 ‘실험소설론’을 밑바탕으로 한 작품임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독자에게 부자연스런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시인의 공상한 사실’에 선악미추의 판단을 부가하는 것이야 말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라 강조하였다. 

또한 永井荷風나가이카후우는 졸라의 본질을 파악하여, 그의 주장을 수용하고 소개하였다. 실험소설의 영향으로 적었다고 말해지는 작품 「地獄の花」지고꾸노하나의 서문은 그런 연유로도 유명하다. 즉 완전한 인생을 조형하기 위해서는, 욕정·완력·폭력 등의 사실을 여과 없이 활사해야한다는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명치 30년대 말에는 자연주의 전성기가 도래하게 된다.




3. 후기자연주의


1)일본자연주의의 출발


청년시절 낭만적인 시를 적었던 30대의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자연스럽게 일어난 이 문학운동은 봉건적인 구습에 대한 반발심이 바탕을 이루고, 硯友社의 소설관을 부정하는 비기교, 비이상을 통한 객관묘사의 주장과 극심한 자기고백을 향한 욕구라고 하는 2가지의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이 특징이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상황은 천황제 국가권력이 점점 더 강해져 가는 시기이기도 하여 일본의 자연주의는 구습에 대한 비판이 사회와의 대결이라는 방향으로 진전될 수가 없었고, 오히려 초기에는 잠깐이나마 볼 수 있었던 반항의 정열은 금방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작가의 신변주위로만 시야를 좁혀 ‘관조’의 리얼리즘이 주류를 이루게 되어버렸다.


2) 일본 자연주의의 성격

일본 자연주의 시대의 도래를 결정지어버린 작품은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의 「破戒」하카이와 田山花袋타야마카타이

의 「布団」후통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 후 藤村은 「春」하루에서 「家」이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둘러싼 내면고백을 중심으로 한 소위 말하는 ‘私小說’을 적게 되고, 花袋 또한 「生」세이 이후의 3부작에서 역시 작가 자신의 주변을 그리는 등, 두 사람은 마치 입을 맞춘 듯 보조를 같이 한다.

그리고 주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작품을 묘사하는 徳田秋声토쿠다슈우세이의 작품이 각광을 받게 되는 단계에 이르러서는 일본자연주의의 기본적인 성격은 거의 정해졌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 외에도 ‘토박이 자연주의 작가’로 불리며 주관성이 강한 작품을 적은 正宗白鳥마사무네하쿠쵸오도 일본자연주의의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3) 일본 자연주의의 작가


①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


文學界」로 출발해 「若菜集」와카나슈우의 낭만적 서정시
 
인으로 이름을 알린 藤村은 4권의 시집을 낸 뒤, 산문으로 전향하여, 小諸
코모로의 교사시절부터 계속 적어온 「千曲川치쿠마가와의 스켓치」를 발표하였다.
자연주의와 작가 島崎藤村의 탄생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
 
품 「破戒」하카이는, 그간의 작품들을 적어오면서 축척된 착
상에 의해 집필되어 자비로 1906년에 출판된 장편소설이다. 일본의  小諸코모로를 무대로, 피차별 部落 출신인 청년교사 瀬川丑松세가와우시마츠의 이야기. 그는 부락 출신임을 밝히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지켜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나, 부락출신 해방사상가의 영향으로 자신의 행동이 비겁한 것임을 자각하고 항상 마음속에서 갈등을 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출신에 관해 학생들에게 고백을 하는데 냉혹한 사회는 그를 수용하지를 못하고, 결국 그는 편협한 이 지역을 떠나 외국으로 떠나게 되는 과정을 청신한 문체로 그린 작품이다. 부락민 차별이라는 어두운 현실을 그린 사회소설적인 요소와, 「若菜集」와카나슈우 시절부터의 테마인 자기고백에 대한 두려움과 욕구를 주인공에 가탁한 내면소설의 요소가 공존하고 있다. 

「破戒」에서 부락문제에 대한 인식이 완전하게 정립이 되지 못한 채, 藤村은 다음 작품으로 「文学界」시절의 청춘의 고뇌를 제재로 한 「春」하루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家」이에에서 자신을 포함한 자신의 집안 얘기를, 리얼리즘으로 풀어나가는 방법으로 묘사한 대작이었다. 하지만 藤村은 그 대가로 「破戒」에서 보여주었던 사회소설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② 田山花袋타야마카타이


졸라이즘에 대한 경도와 서정시인적 자질을 병행하면서 명치 30년대를 보낸 花袋카타이가 藤村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연주의의 기수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것은 「布団」후통의 발표(1907년)에 의해서였다.

아름다운 여제자를 향한 아련한 연정을 그린 이 작품은 사실, 실생활 그대로의 고백은 아니었고 오히려 ‘노골적인 묘사’론의 창작실천으로 그려진 작품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의 문단 사람들이나 독자들이 이 작품을 花袋 자신의 ‘대담한 참회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주위의 반향이 오히려 작자에게 새로운 진로를 제시해, 이 작품 이후의 花袋의 작품세계는 ‘박리의 고통’을 견디며 자신과 주위의 이야기를 ‘평면묘사’로 서술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어, 3부작 「生」세이(1908- 09)「妻」츠마(1908- 09)「綠」미도리(1910)가 완성되었다.


③ 徳田秋声토쿠다슈우세이


秋声슈우세이는 자연주의 작가 중에서는 드물게 硯友社 ‧ 紅
 
葉의 문하생 경력의 소유자이다. ‘천성적으로 타고난 자연파’라고 말해지던 작가적 자질이 개화한 것은, 藤村과 花袋의 작품들이 발표되고 자연주의가 정착되고 난 이후였다. 평범한 서민 부부의 무미한 일상생활을 그린 「新所帯」아라죠타이(1908)가 호평을 얻자, 자신의 아내를 소재로 한 「足跡」아시아토(1910)와, 속편적인 성격을 띤 신변소설「黴」카비(1911)를 발표하고는 작가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 후에도 
 
「あらくれ」아라쿠레(1915) 등의 걸작도 계속 발표하였다.

秋声슈우세이의 작풍은 그야말로 ‘두서도 없고, 결론도 없는’ 서민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작품은 극적인 구성을 경원하고 무채색으로 관통하고 있지만, 그의 문학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리얼리티는 바로 그 점에서 이루어 진 것이라 하겠다.




제 3 절  반자연주의의 대두


자연주의 문학은 많은 평론가를 배출하고, 또 수많은 우수한 작가를 탄생시켰다. 그들은 리얼리즘 수법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평탄한 묘사로 근대문학을 풍요하게 한 업적도 남겼다. 그러나 그들의 결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즉 공상의 배제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상에 빠져버렸고, 현실폭로나 노골적인 묘사의 실천은 왜소한 인간의 추악한 심상을 파헤치는 결과에만 머물렀다. 그러다보니 스케일이 작은 문학, 재미없는 문학, 어둡고 침울한 문학이란 혹평도 받게 되었다.

자연히 반동적으로 탐미적인 경향의 문학, 여유를 가지고 인생을 관조하는 문학, 또한 인간의 고매한 이상을 추구하는 문학, 이지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해석해보자 하는 문학들이 나타나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 여유파


근대문학의 두 거봉이라고 불리고, 문학사적으로도 많은 걸작을 남긴 夏目漱石나츠메소오세끼와 森鴎外모리오오가이는 자연주의가 문단을 풍미하던 시대에도 초연한 입장에서 반자연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은 독일에 또 한 사람은 영국으로 건너가 유학을 통해 풍부한 경험과 교양을 체득하여, 세계적 관점에서 사물을 판단할 시야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현실을 평탄하게 묘사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연주의 문학이 성에 찰리가 없었다. 

그들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라는 커다란 명제를 내걸고 여유를 가지고 대상을 파악하며 또한 풍부한 교양을 발판으로 하여 새로운 문학세계를 추구하였다. 

근대문학은 적잖이 이 두 문호의 영향을 받으면서 발달해 왔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사람이 남긴 족적은 거대하였다.


1) 夏目漱石나츠메소오세끼


여유파 ‧ 고답파라고 불리며, 반자연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漱石는 慶應케이오오 3년(1867)에  江戸에도의 牛込우시고메馬場下바바시타(현재 東京 新宿신쥬쿠)에서 夏目小兵衛直克나츠메코헤이나오카츠 ‧ 千枝치에의 5남으로 태어났다. 慶應 4년이 明治 1년이니까 漱石의 삶은 明治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아버지 直克는 牛込우시고메에서 高田馬場타카다노바바 

일대를 관할하는 名主나누시로 생활은 비교적 풍요로웠다. 하지만 明治維新후 가세가 기울어져 태어난 후 바로 四谷요츠야의 고물상에 양자로 보내졌지만, 밤늦게까지 상품 옆에 방치되어 울고 있는 것을 본 누나가 불쌍하게 여겨 바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漱石의 유년 시절은 이 일화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그 후 1868년(明治1年)11월, 塩原昌之助시오바라쇼오노스께한테 양자로 간다. 塩原시오바라는 아버지 直克나오카츠 밑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直克가 결혼까지 시켜서 뒤를 봐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塩原의 가정불화로 9세 때 다시 본가로 돌아온다. 하지만 塩原와의 대립으로 21세까지 복적은 미루어졌다. 이처럼 漱石의 유년 시절은 파란만장했다고 볼 수가 있다. 塩原는 漱石가 朝日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고, 돈을 요구하는 등 죽을 때까지 둘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양부모와의 관계는 뒤에 그의 자전적 소설 「道草」미찌쿠사에서도 볼 수 있다.

몸이 약해 대학을 중퇴하고 경시청에서 번
 
역 일을 하고 있던 큰형은 공부를 잘한 막내 동생을 대학까지 보내 출세를 시켜 夏目 집안을 부흥시키고자 했다. 그런 집안의 배려도 있어 1884년 大学予備門予科(1886년 第一高等中学校로 개칭)에 무사히 입학을 하였다. 大学予備門 시절 같이 하숙을 한 친구로 후에 満鉄 총재가 된 中村是公나까무라요시코토가 있었다.

予備門 시절의 漱石는 충수염으로 予科 2급의 진급시험을 치지 못해 是公요시코토와 함께 낙제를 한다. 이후에는 학업에 전념하여 대부분의 교과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특히 영어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받았다.

1889년 동기로 漱石에게 문학적, 인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正岡子規마사오까시키와 알게 된다. 이후 子規시키와의 교류는 漱石가 영국 유학중인 1902년 子規가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1890년 창설 직후인 帝国大学(뒤에 東京帝国大学)영문과에 입학. 이 무렵부터 염세주의, 신경쇠약에 빠졌다고 말해진다. 이런 증상을 앓게 된 것은, 직전인 1887년에 큰형 大助다이스께가 사망, 같은 해 6월에 둘째형 
 
栄之助에이노스께도 사망, 또 1891년에는 셋째형 和三郎와사부로의 아내 登世토세도 사망하여 연이은 가까운 가족을 잃은 영향이기도 하다. 특히 登世토세의 죽음은 江藤淳에토오쥰이 漱石가 登世를 사모하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고, 登世를 기리는 마음을 담은 시를 수십 편이나 남기기도 하였다.

1893년 漱石는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사범학교의 영어교사가 되나, 사직을 하고 愛媛에히메의 松山마츠야마의 중학교로 간다. 松山는 子規의 고향인지라 子規도 2개월 정도 휴양을 하였다. 이때 漱石는 子規와 함께 俳句하이쿠에 정진을 하여 수많은 가작을 남겼다.

1896년 熊本쿠마모토의 제 5 고등학교(熊本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 후, 가족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 中根重一나까네시게카즈의 장녀 鏡子쿄오꼬와 결혼. 결혼 후 鏡子는 낯선 환경과 유산이 원인으로 히스테리 증상이 심해서 강에 투신을 기도하는 등 평탄한 부부생활은 영위하지 못하였다.

1900년 5월, 문부성으로부터 영어교육법 연구를 위해 영국유학을 명받고 유학을 떠난다. 처음에는 대학의 강의를 듣고자 했으나, 곧 대학은 포기하고 세익스피어 연구가인 William James Craig의 개인교습을 받는다. 또 한편으로「문학론」의 연구에 전념하기도 한다. 이 무렵 또 다시 신경쇠약에 걸려 고생을 한다.

1901년 화학자 池田菊苗이케다키쿠나에와 2달 정도 같이 하숙을 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고, 하숙집에 혼자 칩거하면서 연구에 몰두한다. 그 결과 漱石가 발광하였다는 소식이 문부성에 까지 흘러들어가,  漱石는 급거 귀국을 명받고, 1902년12월5일 귀국길에 오른다. 

1903년 제1 고등학교와 동경제국대학의 강사로 부임. 동경
 
제대에서는 小泉八雲코이즈미야쿠모의 후임으로 교편을 잡았으나, 학생들이 八雲야쿠모 유임 운동을 일으키는 등, 漱石의 분석적이고 딱딱한 강의가 호평을 받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제1 고의 담임으로 있던 학생 중에 藤村操후지무라미사오가 있었는데, 매사에 너무나도 의욕이 
없는 그의 모습에 漱石가 질책을 하고 난 며칠 후, 日光닛코오의 華厳滝게곤노타키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 이런 연유로 漱石는 신경쇠약이 더욱 심해지고 아내와도 2달 정도 별거를 한다.

1904년 高浜虚子타카하마쿄시의 권유로 신경쇠약을 완화할 목적으로 적은 처녀작 「吾輩は猫である」와가하이와네꼬데아루(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여 호평을 얻는다. 1905년1월,『ホトトギス』호토토기스에 1회 예정으로 게제 되었으나, 호평으로 인해 속편을 집필. 이때부터 작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어서 『倫敦塔』론돈토오,『坊つちやん』봇짱을 연이어 발표하고 인기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 시기부터 漱石의 작품은 세속을 잊고, 인생을 관조하며 산책하듯 하는 저회취미(漱石의 조어)적 요소가 강해, 당시의 주류였던 자연주의와 대립하는 여유파로 불리기 시작한다.

1906년, 漱石의 집에는 小宮豊隆코미야토요타카, 鈴木三重吉
 
즈끼미에키찌
, 森田草平모리타소오헤이 등이 드나들고 있었는데, 鈴木가 매주 목요일을 면회일로 정하는 것을 제안해 「목요회」가 탄생한다. 문하에는 内田百閒우찌다햐쿠분, 野上弥生子노가미야에꼬, 또 뒤에 신사조파에 속한 芥川龍之介아쿠다가와류노스께, 久米正雄쿠메마사오 등의 소설가 외에도, 寺田寅彦테라다토라히꼬, 阿部次郎아베지로, 安倍能成아베요시나리 등의 학자들도 참가하였다.

1907년 2월 모든 교직생활을 사직하고 朝日아사히 신문사에 입사를 한다. 당시 京都쿄오토帝国大学 문과대학 초대학장으로 있던 친구 狩野亨吉카노코오키치 의 권유도 거절하고 본격적인 직업작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같은 해 6월,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虞美人草』구비진소를 연재. 집필도중에 신경쇠약, 위장병으로 고생을 한다.

1909년 친구 満鉄 총재인 中村是公나까무라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조선을 여행한다. 이 여행의 기록은 『朝日新聞』의 「満韓ところどころ」만칸토꼬로도꼬로에 연재되었다.

1910년 6월,『三四郎』산시로『それから』소레까라에 이어 전기 3부작의 마지막 작품 『門』을 집필하는 도중에 위궤양으로 입원. 8월에는 요양을 위해 伊豆이즈의 修善寺슈우젠지에 가나 병상이 악화되어, 대량의 토혈을 하고 생사를 다투는 위독상태에 빠진다. 이를「修善寺の大患」슈우젠지노타이칸이라하는데, 이때의 임사체험이 그 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

만년의 漱石는 「則天去私」를 이상으로 생각하는데, 이때의 심경이 많은 작용을 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병상이 조금은 호전되나 東京의 長与병원에 재입원. 그 뒤에도 위궤양 등의 병으로 고생을 반복한다.

1911년 8월, 관서지방에서의 강연회가 있은 직후, 위궤양이 재발하고 大阪의 병원에 입원. 東京에 돌아와서는 치질에 걸려 통원. 

1912년 9월, 치질 때문에 수술. 12월, 집필 중이던『行人』코오진도 병상이 악화되어 중단된다.

1913년은 신경쇠약, 위궤양으로 전반기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낸다. 

1914년 9월, 위궤양으로 또 자리에 눕게 된다. 작품은 인간의 에고이즘을 해부하고 탐구하는 방향으로 지속된다. 

후기 3부작이라 불리는 『彼岸過迄』히간스기마데『行人』코오

『こゝろ』코코로의 작품은 에고이즘의 추구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1915년 3월, 京都로 여행을 가나 또 위궤양으로 쓰러진다. 6월에는 『吾輩は猫である』(나는 고양이다)의 집필 당시의 환경을 회고하면서, 『道草』미찌쿠사의 연재를 개시.

1916년에는 당뇨병에도 시달린다. 辰野隆타츠노유타카의 결혼식에 참가한 그날 자택에 돌아와 대량의 각혈과 함께 운명을 달리한다. 집필 중이던『明暗』은 미완에 그친다.(49세 10개월)

묘소는 東京都토오쿄오토豊島区토시마쿠南池袋미나미이케부쿠로의 雑司ヶ谷조오시가야霊園.


【『それから』】1909년6월27일부터 10월14일까지 東京朝日新聞・大阪朝日新聞에 연재. 다음해 1월에 春陽堂슌요오도오에서 간행. 『三四郎』산시로오(1908년)・『それから』소레까라(1909년)・『門』(1910년)으로 전기 삼부작을 구성

직업도 없이 매월 본가에서 돈을 받아 유복한 생활을 보내는 長井代助나가이다이스께가 친구 平岡常
 
次郎히라오까죠오지로오의 아내인 三千代미찌요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기까지를 그린 소설.

작중 세계는 1909년으로 東京高等商業 분쟁,『それから』연재하기 직전에 연재된『煤煙』바이엔언급, 日糖 사건 등 사회소설적인 측면도 있다.

1985년에 森田芳光모리타요시미츠 감독, 

 

松田優作마츠다유우사쿠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


【『こゝろ』】 장편소설. 漱石의 대표작의 하나. 1914년(大正3년)4월20일부터 8월11일까지『朝日新聞』에서「心 先生の遺書」로 연재되고, 같은 해 9월에 岩波書店이와나미쇼텐에서  간행. 자비출판이란 형식이긴 하였지만, 이 작품이 岩波書店에 의해 출판사로 발간된 최초의 소설이었다.
 

漱石가 乃木希典노기마레스께장군의 순사에 영향을 받고 집필한 작품이었다. 후기삼부작 『彼岸過迄』『行人』과 함께 인간의 심부에 있는 에고이즘과 인간으로서의 윤리관과의 갈등이 표현되어있다. 明治天皇의 서거, 乃木大将의 殉死에 象徴되는 시대의 변화에 의해 「明治의 정신」이 비판될 것을 예측한 漱石는, 大正이란 새로운 시대를 살아나가기 위해「先生」을「明治의 정신」과 함께 순사시킨 것이다.


上 先生と私

화자는「私」. 시대는 明治 말기. 여름방학에 鎌倉에 해수욕을 간 「私」는 「先生」과 만나 교류를 가지고 동경에 돌아와서도 「先生」의 집에 출입하게 된다. 先生은 부인과 조용히 살고 있었다. 매달 雑司ヶ谷에 있는 친구의 묘에 성묘를 한다. 先生은 私에게 몇 번이고 수수께기와 같은 교훈과 같은 말을 한다. 私는 아버지의 병의 경과가 좋지 못해 귀향한다. 동경으로 돌아온 나는 先生에게 과거를 캐묻지만 미래를 기약할 뿐 말을 아낀다.

中 両親と私


화자는「私」. 신장병이 심해진 아버지를 두고 좀체 귀경을 못하고 있던 나에게 先生으로부터 두터운 편지를 받고 바로 기차에 뛰어들 듯이 동경을 향한다.

下 先生と遺書

「先生」의 편지. 「先生」의 편지에는 수수께끼 같았던 「先生」의 과거가 적혀있었다.「K」와「お嬢さん」(아가씨)의 관계와 전말이 밝혀져 수수께끼 같았던 「先生」의 말의 진상이 밝혀진다.


2) 森鴎外모리오오가이
 


1862년2월17일 島根시마네県에서 출생. 대대로 津和野藩츠와노한의 典医를 담당하던 森모리집안에서는 할아버지, 아버지가 데릴사위였던 관계로  鴎外오오가이의 출생은 경사스런 일이었다.

어릴 때부터 사서삼경 뿐 아니라, 네덜란드어를 배우는 등, 집안의 기대와 함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1872년 명치 신정부의 행정개혁을 
 
계기로 아버지와 함께 상경.(10세)東京에서는 관립의학교가 독일 교관이 독일어로 수업을 하였기에 입학을 대비해 進文学社에서 독일어를 배운다.

1873년 11월, 第一大学区医学校(現・東京大学医学部)예과에 실제나이보다 2살 더 부풀려 12세 나이로 입학. 정원30명

의 본과에 진급해서는 독일교관들의 강의를 듣는 한편, 佐藤元長사토오겐쵸오에게서 한방의서를 배우고, 또 문학서적을 탐독한다.

1881년 7월4일, 19세 나이로 본과를 졸업. 문부성파견 유학생으로 독일에 갈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아버지의 병원에서 일을 하였다. 이런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한 동기 小池正直코이께마사나오는 육군군의본부차장인 石黒忠悳이시구로타다노리에게 장문의 추천장을 보내었고,  또 小池와 함께 육군 군의로 일본의 이비인후과학의 창시자로 알려진 친구 賀古鶴所카코츠루토는 鷗外에게 육군 군의를 권유하였다. 결국 鷗外는 주위의 권유와 협조로 그해 12월 육군 군의부(중위에 해당)가 되고, 동경육국병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여동생 小金井喜美子코가네이키미꼬의 회상에 의하면, 젊은 시절의 鷗外는 사군자를 그리고, 정원을 스케치하기도 하며, 근무가 끝나면 자주 연극이나 만담을 보러 가기도 하였다고 한다.

입대한지 반년 후인 1882년, 동경대학의학부 졸업동기 8명 
 
중에 제일 빨리 진급을 하고, 프로이센 왕국의 육군위생제도에 관한 문헌조사를 한다. 1884년 6월, 위생학의 연구 및 독일제국 육군의 위생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독일 유학을 명받고 독일로 향한다. 
 

처음 1년간 체재한 라이프치히(Leipzig)대학에서는 좋은 선생님들과 동료들을 만나 소기의 성과를 얻을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체재지인 드레스덴(Dresden)에서는 주로 군의학 강습회에 참가하기 위해 5개월가량 체재를 하였다. 왕실관계자, 군인들과의 교제가 많았고, 왕실의 무도회나 귀족들의 파티, 궁중극장 등에도 출입을 하였다. 뮌헨에서는 뮌헨대학의 페텐코퍼(Max Josef von Pettenkofer)의 지도를 받는 한편, 드레스덴과는 달리 일본인이 많아서 같은 또래의 原田直次郎하라다나오지로나 近衛篤麿코노에아츠마로 등의 명사의 자제들과 교류를 가졌다.

카르스루헤(Karlsruhe)에서 개최된 제4회적십자국제회의에 일본대표로 참가한 石黒忠悳를 수행해 통역관으로 출석. 회의를 마친 일행은 빈(Wien)으로 이동해 만국위생회에 일본정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1888년7월5일, 鷗外는 石黒와 함께 베를린을 출발해 귀국한다. 9월8일 横浜요코하마항에 도착해 귀경. 귀국하자마자 육군대학교교관으로 임명된다. 귀국 직후, 소설「舞姫」마이히메의 

소재가 된 독일인 여성이 방일하는 사건이 있었다. 후년에 이르기까지 편지를 주고받는 등 평생 잊지 못한 여인이었다고 말해진다. 

1889년1월3일,『読売新聞』요미우리심분의 부록에 「小説論」을 발표. 또 読売新聞에 동생인 三木竹二미키타케지와 함께 칼데론(Pedro Calderón de la Barca)의 희곡 「調高矣津弦一曲」(원제:사라메라의 촌장)을 발표했다. 이 번역희곡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 徳富蘇峰토쿠토미소오호로, 8월에는 蘇峰가 주필로 있는 잡지『国民之友』코쿠민노토모에 역시집「於母影」오모카게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일본근대시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於母影」의 원고료 50円을 발판으로 竹二 등의 동인들과 일본 최초의 평론 중심의 전문지 『しがらみ草紙』시가라미소오시를 창간하였다.

이처럼 외국문학의 번역을 시작으로 열심히 계몽활동을 계속하였다. 당시로서는 정보가 적었던 유럽의 독일을 무대로 한 「舞姫」마이히메를 蘇峰의 의뢰로 『国民之友』에 발표하고 이어서 「うたかたの記」우타카타노키「文づかひ」후미즈카이를 발표하였다. 특히 일본인과 외국인의 연애관계를 다룬「舞姫」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독일 유학 3부작을 둘러싸고 石橋忍月이시바시닌게츠와 논쟁을 벌였고, 또『しがらみ草紙』지상에서 坪内逍遥츠보우치쇼오요를 비판하여 没理想 논쟁을 펼쳤다.

1894년 여름, 청일전쟁이 일어나 8월29일에 東京을 출발하여 9월2일에 広島히로시마를 출발해 요동반도로 갔다. 청일전쟁이 끝났지만 鷗外는 일본에 할양된 대만 근무를 명받고 초

대 대만총독 樺山資紀카바야마스케노리와 함께 대만으로 출발한다. 4개월의 대만 근무를 끝내고 10월4일에 귀국.

1899년6월에 군의감(소장상당)으로 승진해서 小倉코쿠라에 있는 제12사단에 군의부장으로 간다. 여기에서 그는 그의 역사관과 근대관을 표출한 일련의 수필을 다수 남기고 있다. 

1900년1월에 전처 赤松登志子아까마츠토시꼬가 결핵으로 사망하여 어머니의 권유로 1902년1월, 18세 연하
 
의 荒木志げ아라키시게와 중매결혼을 한다.

1902년3월, 제1사단 군의부장으로 임명을 받고 새 부인과 함께 동경으로 부임. 

1904년2月에서 1906년1월까지 러일전쟁 발발으로 인해 제2군 군의부장으로 출정.

1907년10월, 육군군의총감(중장상당)으로 승진하고 육군성 의무국장(인사권을 가진 군의의 최고위)으로 취임하였다.

1909년에『スバル』스바루가 창간되자, 이 잡지에 매번 기고하여 창작활동을 재개하였다. 「半日」한니찌「ヰタ・セクスアリス」이타・세쿠스아리스「鶏」니와토리「青年」세이넨 등을 동지에 게재. 같은 해 7월, 鷗外는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ヰタ・セクスアリス」가 발매금지처분을 받고, 게다가 내무성의 경보국장이 육군성을 방문해 鷗外는 육군차관・石本新六이시모토신로쿠로부터 근신처분을 받는다.

1910년, 慶應義塾케이오오기쥬쿠 대학의 문학과 고문으로 취임하고(교수직에 永井荷風나가이카후우를 추천) 石田新太郎이시다신타로의 주도로 上田敏우에다빈을 고문으로 모시고 永井

荷風를 주간으로 하여 「三田文學」미타분가쿠를 창간하였다. 1910년은 5월에 대역사건의 검거가 시작되었고, 9월에 東京朝日新聞이 「危険なる洋書」(위험한 서양서적)를 연재하였는데 6회째에 鷗外와 그의 아내의 이름이 거론되는 등, 시국이 폐쇄적으로 치닫는 상황에도 「ファスチェス」파스체스에서는 발매금지 문제, 「沈黙の塔」친모쿠노토오「食堂」쇼쿠도오에서는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에 대해 언급하는 등 정치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11년에도「青年」세이넨을 완결하고, 「雁」(기러기)「灰燼」카이진(잿더미) 장편 2작품을 동시 연재를 시작한다.

1912년8월、‘실제 인물을 자료에 의거해 사실을 토대로 서술하는 鷗外 독자적인 소설 작품의 최초의 작품’이라 평한 
 
「羽鳥千尋」하토리치히로를 발표. 9월13일, 乃木希典노기마레스께의 순사에 촉발되어 5일 후에 「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오끼츠야고에몽노이쇼(초고)를 탈고한다. 이 소설을 계기로 역사소설로 전환하는 한편 현대 소설도 병행해서 집필을 한다.

1916년4월, 8년 반 집무했던 육군성 의무국장을 퇴관하고 예비역에 편입된다. 1918년12, 제실박물관(현 동경국립박물관)총장에 취임. 또 1918년9월에, 제국미술원(현일본예술원)초대원장에 취임. 

1922년7월9일 오전7시, 가족과 친구들이 자리를 지킨 가운데 신위축, 폐결핵으로 사망. 향년 60세.


『雁』】문예잡지『スバル』스바루에 1911년부터 1913에 걸쳐 연재.

고리대금업자 末造스에조오의 첩 お玉타마가 의학도  岡田오까다에 연정을 느끼고 末造가 오지 않는 날 혼자서 집에서 산책을 하는 岡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언제나 혼자서 산책하던 岡田가 그날따라 친구와 같이 산책을 하는 탓에 お玉타마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만다. 산책을 하던  岡田오까다와 친구는 不忍池시노바즈노이께에서 장난처럼 던진 돌팔매질에 기러기가 맞아 죽고 만다. 

岡田오까다는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다음날 유학을 떠난다.

불운하게 목숨을 잃고 만 기러기에 빗대어, 덧없는 여성의 심리상태를 묘사한 작품.


2. 탐미파


眞 · 善 · 美 의 항목 중, ‘眞’만을 강조하는 자연주의의 유행은, 그 반대자로서 예술의 ‘美’에 중점을 두는 작가들의 등장을 초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잡지 「スバル」(1909년 창간)나 「パンの会」팡노카이를 중심으로 모인 청년 시인들과 ‘탐미파’라 불리는 문학자들이 자연주의의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유미주의 경향의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그룹을 대표하는 소설가는, 졸라이즘의 신봉자 시절을 거쳐 외국생활 후 귀국하여, 명확한 반자연주의자로서 활약을 한 永井荷風나가이카후와 荷風의 추천에 의해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谷崎潤一郎타니자끼쥰이찌로오가 있다.


1) 永井荷風나가이카후


永井久一郎나가이큐우이찌로오와 恒츠네의 장남으로 東京 小石川区코이시카와쿠 金富町킨토미쵸오(현재 文京区분쿄오쿠春日카스가)에서 출생. 아버지 久一郎는 프린스톤대
 
학, 보스톤대학에서 유학을 한 엘리트로, 내무성 위생국에 근무를 하였다. 어머니 恒츠네는 久一郎의 스승인 유학자 鷲津毅堂와시즈키도오의 차녀.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어머니의 영향으로 歌舞伎나 邦楽에 친숙해졌으며, 한학자 岩渓裳川이와타니쇼오센한테 한학을, 화가 岡不崩오까후호오로부터 일본화를, 내각서기관 岡三橋오까산쿄오로 부터는 서도를 배운다.

1894년 병에 걸려 일시 휴학을 하는 동안 『水滸伝』『八犬伝』핫켄덴『東海道中膝栗毛』토오카이도오츄우히자쿠리게 등을 탐독했다. 후일 荷風는 ‘만일 이 시기가 없었다면 나는 평범한 한 시민으로 평생을 보냈을 것이다’라고 서술한 것처럼 문학에 눈을 뜨게 한 시기였다.

1897년, 神田칸다에 신설된 관립고등상업학교(현재 一橋히토츠바시 대학)부속외국어학교 중국어과에 입학해서 99년에 중퇴한다.

1898년, 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오 문하에 입문. 1899년 清나라 유학생 羅蘇山人의 소개로 巌谷小波이와야사자나미의 목요회에 들어간다. 1900년 『文藝倶楽部』분게이쿠라부의 三宅青軒미야

케세이켄의 소개로 歌舞伎座에 전속작가로 들어간다. 

1901년、暁星교오세이 중학의 야학에서 프랑스어를 배우기 시작해 에밀졸라의『大地』와 다른 작품을 읽고는 매료된다. 1898년부터 습작을 발표하기 시작하여 1902년에서 그 다음 해에 걸쳐 『野心』야신『地獄の花』지고쿠의하나『夢の女』유메노온나『女優ナナ』죠유나나 등을 간행한다. 특히 『地獄の花』는 森鴎外모리오오가이의 절찬을 받고, 그의 출세작이 된다. 한편으로는 江戸 문학의 연구를 위해 落語家 朝寝坊むらく아사네보오무라쿠의 제자로 들어가 夢之助유메노스께라 명명해 활동을 하기도 한다.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는 荷風에게는 권력에 대한 반골정신을 엿보인 작품도 있었다. 1902년 발표한『新任知事』는 福井県후쿠이켄知事였던 숙부 阪本釤之助사까모토센노스께를 모델로 그린 작품인데, 이 작품으로 인해 숙부와는 의절을 하였다.

1903년(24세),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실업가의 공부를 위해 도미, 1907년까지 뉴욕, 워싱턴 등에서 일본대사관, 横浜요꼬하마 正金쇼오킨 은행에서 근무를 하였다. 하지만  荷風에게는 미국의 생활은 성에 차지 않았고, 그의 동경의 대상인 프랑스행을 부친의 인맥을 통해 실현하고 1907년부터 1908년에 걸쳐 10개월간 프랑스에 체재한다.

横浜요꼬하마 正金쇼오킨 은행, 리용 지점에서 8개월 근무한 후, 퇴직하고 파리로 가서, 모파상 등의 문인들의 유적을 탐방하고 그곳에서 上田敏우에다빈과 친교를 가진다.

1908년(29세),『あめりか物語』아메리카모노가타리를 발표. 1909년의 『ふらんす物語』후란스모노가타리와『歓楽』칸라쿠는미풍양속을 저해한다하여 발매금지를 당한다.(퇴폐적인 분위기와 일본에 대한 모욕적인 표현 등이 원인이었다고 전해짐) 
 
그렇지만 夏目漱石의 의뢰로 東京朝日新聞에『冷笑』레이쇼오가 연재되는 등 신진작가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1910년, 森鴎外와 上田敏의 추천으로 慶應義塾大学 문학부의 주임교수로 부임한다.

교육자로서의 荷風는 보헤미안 넥타이를 매고 강의를 하는 멋쟁이교수로, 내용은 불어, 불문학평론이 주전공으로, 시간은 매우 엄격하게 지켰으나, 강의는 재미있었다고 佐藤春夫사토오하루오가 회상하고 있다. 

이 시기의 荷風는 다방면에 활약을 하는데, 木下杢太郎키노시타모쿠타로오들의 「パンの会」팡노카이에 참가해서谷崎潤一郎타니자끼쥰이찌로오를 발굴하기도 하고, 역시집『珊瑚集』산고슈우를 발표하는 한편, 『三田文学』미타분가쿠를 창간해서는 谷崎나 泉鏡花이즈미쿄오카의 작품을 세상에 알리는 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 문학자들의 스폰서 역할을 하였던 西園寺公望사이온지킨모찌에게도 총애를 받아, 西園寺저택에서 개최된 雨聲会우세이카이에 夏目漱石, 鴎外, 鏡花, 広津柳浪, 島崎藤村, 田山花袋 등의 대선배들과 함께 참가를 하였다.

교수직을 충실하게 수행한 荷風였으나, 사생활은 그렇게 순탄하지가 않았다. 많은 게이샤와 무희들과의 교류를 가져 주위와의 알력이 끊이지가 않았다.
 

1912년 사업가의 딸과 결혼을 하였지만, 1913년 부친이 사망하자 가독을 이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을 하였다. 

1914년 新橋신바시의 게이샤 八重次야에지를 호적에 올려, 동생 威三郎이사부로오, 친척들과의 사이가 멀어졌다. 게다가 八重次와의 생활도 이듬해에 별거를 하고, 荷風는 築地츠키지에 집을 얻어 이사를 하였다. 그 뒤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1910년에 일어난 大逆事件에 의해 荷風는 전환기를 맞이한다. ‘일본은 미국과 같이 개인존중도, 프랑스와 같이 전통존중도 없이 겉모양만 서양화에 전념하는데 그치고, 또 체제파는 반항하는 시민을 박해를 가할 뿐이다. 드레퓌스 사건을 규탄한 에밀졸라와 같은 용기가 없으니, 戯作를 적을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는 이후 작풍이 완전 달라져 소위 말하는 화류계소설에만 전념하게 된다.

1916년경,『三田文学』미타분가쿠의 운영을 둘러싸고 慶應義塾 과의 의견 대립이 심각해져 荷風는 대학교수직을 사임한다. 이후에는 창작에 전념하는 한편 잡지『文明』분메이를 친구 井上唖々이노우에아아와 재건시키고자 노력한다. 

이 무렵 중기의 명작 『腕くらべ』우데쿠라베『おかめ笹』오카메사사등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다.
 

1926년(47세)무렵부터 銀座의 카페에 출입하면서 荷風의 창작의 흥미는 종래의 게이샤로부터 카페여급이나 창부로 넘어가 1931年『つゆのあとさき』츠유노아토사끼, 1934年『ひかげの花』히카게노하나 등 새로운 경지의 작품을 창작한다. 이 무렵 각 출판사에서 荷風의 전집이 발매되면서 다액의 인세

가 들어오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겨 더 왕성한 창작활동을 전개할 계기가 된다. 왕성한 집필활동을 하는 한편, 친구들과 銀座긴자를 활보하거나 환락가, 사창가 등을 배회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1937년『濹東綺譚』보쿠토오키담을 朝日아사히新聞에 연재한다.

시국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 가운데, 신작의 창작은 어려워졌지만, 荷風는『浮沈』후친『勲章』쿤쇼오『踊子』오도리코 등의 작품과 『断腸亭日乗』탄쵸오테이니찌죠오의 집필은 계속하였다. 이런 작품의 초고는 여러 편 필사를 하여 지인들에게 맡겨 만일을 대비하였다. 전쟁의 영향은 사정없이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어 식료품이나 땔감은 항상 부족하였다.

1945년3월10일의 동경대공습으로 살고 있던 偏奇館헨키칸은 소실되고, 荷風는 초고를 가슴에 안고 몸을 피했지만, 엄청난 장서는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이 끝났지만 荷風의 생활은 전혀 나아지지가 않고 지인들을 의지하며 방랑생활을 하며 지낸다.

1959년3월1일 오랜 기간 단골이었던 浅草아사쿠사의 아리조나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중,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어, 그 후 자택에서 가까운 식당 大黒屋다이코쿠야에서 식사를 하는 외에는 쓰레기더미와 같은 자택에 파묻혀 지냈다. 4월30일 아침, 자택에서 주검이 된 荷風를 파출부가 발견하였다. 위궤양으로 인한 각혈과 심장마비가 사망원인이었다. 시체 옆에는 항상 지니고 다니던 보스톤백 안에 토지 권리증과 예금통장, 문화훈장 등의 전 재산이 들어있었다.


腕くらべ】장편소설. 1916년 8월부터 1917년 10월까지 잡지『文明』에 연재. 駒代코마요 · 菊千代키쿠치요 · 君龍키미류우라는 제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게이샤 사이에서 벌어지는 색정을 둘러싼 힘겨루기를 그린 소설.

남편이 죽은 후 다시 게이샤로 복귀한 駒代는 옛날 단골이었던 吉岡요시오까를 우연히 만나 재결합하게 된다. 吉岡는 그녀를 독점하고 싶었으나, 駒代는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 싶어 한다. 그녀는 카부끼 배우인 瀬川세가와에게 푹 빠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吉岡는 그녀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菊千代에게 가게를 내어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瀬川는 전남편의 유산을 상속받은 君龍에게 빼앗기고 만다. 상심에 울고 있던 駒代에게 그녀가 속해 있던 여주인이 죽어 가게를 볼 사람이 없던 여주인의 남편이 가게를 물려준다. 여주인의 영정 앞에서 駒代는 엎드려 울고 만다.

작자가 18년이나 공들인 끝에 화류사회의 치정세계를 그렸다고 하는데, 인간의 표리, 심리의 특징을 빠짐없이 그려나간 가작. 절묘한 구상, 노련한 필치로 그려진 명작으로 작가의 대표작.


2) 谷崎潤一郎 타니자끼쥰이찌로


谷崎倉五郎타니자끼쇼오고로와 関세끼의 차남으로 東京 日本橋니혼바시에서 출생. 장남 熊吉쿠마키치가 생후 3일 만에 죽어서 潤一郎쥰이찌로는 장남으로 출생신고를 하였다. 차남으로 태어난 동생 谷崎精二타니자끼세이지는 작가, 영문학자(早稲田와세다대학 교수)로 활약한다.

외할아버지 谷崎久右衛門타니자끼큐우에몽은 자수성가를 한, 
 
사업수완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었다. 아버지 倉五郎는 데릴사위로 들어와 할아버지의 사업의 일부를 맡았다. 1896년 엄마 세끼와 歌舞伎카부끼『義経千本桜』요시츠네센본자꾸라의 관람은 그의 문학과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거듭된 사업의 실패로 아버지의 집안에서의 위치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환경은 그의 여성상과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부의 사후, 가세가 기울어 谷崎가 중학교로 진학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성적이 뛰어나 신동이라고 불릴 정도인 그를 아까워한 선생님들의 배려로 제일중학교를 다닐 수가 있었다. 

1902년9월 16세 때, 그의 재능을 높이 산 勝浦鞆雄카츠우라토모오 교장선생님이, 일단 퇴학을 해서 2학년에서 3학년으로 편입시험을 치도록 권유하여, 시험을 친 결과 합격을 했을 뿐 아니라 학년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1908년, 일고 영법과 졸업 후에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 국문과에 진학하고, 재학중 和辻哲郎와츠찌테츠로오 등과 제2차 『新思潮』신시쵸오를 창간하고 처녀작인 희곡『誕生』탄죠오와 소설 『刺青』시세이(1909年)를 발표. 발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永井荷風나가이카후로 부터『三田文学』미타분가쿠 지상에서 격찬을 받고 谷崎는 문단에서 신진작가로서 지위를 확보하였다. 이후 『少年』쇼오넨『秘密』히미쯔 등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자연주의 문학 전성기 시대에, 스토리를 중시하는 반자연주의적인 작풍으로 문단의 총아로 부상하였다. 1911년에 『新思潮』가 폐간되자, 일시적으로『スバル』스바루 동인에 참가를 한다. 수업료 미납으로 퇴학.

1912년1월에 첫사랑 穂積フク호즈미후쿠가 폐렴으로 사망하자 

京都쿄오토를 시작으로 각지를 방랑한다. 이때 신경쇠약 증세가 재발한다. 악마주의자란 별칭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 작품『悪魔』를 발표. 

1915년에 石川千代이시카와찌요와 결혼.『お艶殺し』오쯔야코로시『法成寺物語』호오죠오지모노가타리『お才と巳之介』오사이또미노스께 를 발표.

1916년 장녀 鮎子아유꼬의 탄생. 『神童』신도오『恐怖時代』쿄오후지다이를 발표.

1917년 어머니 関세끼가 유명을 달리함.『人魚の嘆き』닌교오노나게끼『異端者の悲しみ』이탄샤노카나시미를 발표. 芥川龍之介아쿠다가와류노스께, 佐藤春夫사토오하루오와의 교류가 시작된다. 부인 千代의 여동생 せい子와의 미묘한 기류가 시작됨.

1918년에는 조선, 만주, 중국으로 여행한다. 『小さな王国』찌이사나오오코쿠를 발표.

1919년 아버지 倉五郎쇼오고로가 사망. 神奈川県카나가와켄 小田原오다와라로 이전.『母を恋ふる記』하하오코후루키를 발표.

1920년 横浜요꼬하마의 大正活映타이쇼오카츠에이 주식회사 각본부 고문으로 취임. 처제 せい子를  葉山三千子하야마미찌꼬란 예명으로 여배우로 데뷔시킨다.『鮫人』코이진을 발표.

1921년 아내 千代를 佐藤春夫에게 양도한다는 말을 번복하여 佐藤와 절교한다. 유명한「小田原오다와라 事件」으로 문단뿐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한다.


大正 시대에는 당시의 자유스런 사회분위기를 여러 작품에 그려내었고, 또 탐정소설 분야에 신경지를 도출하고, 영화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여러 분야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등 의욕적으로 보낸다.


 

관동대지진 이후 谷崎는 관서지방으로 이주해 또 다시 왕성한 집필을 하고 연이어 걸작들을 탄생시킨다. 장편『痴人の愛』치진노아이에서는 요부 ナオミ나오미에게 농락당하는 한 남자를 그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어서『卍』만지『蓼喰ふ虫』다테쿠우무시『春琴抄』슌킨쇼오 등을 차례로 발표하고, 大正시대의 모더니즘과 중세적인 일본의 전통미를 교차시키며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의 谷崎의 미의식에 대한 사상은 『文章読本』분쇼오요미혼과『陰翳禮讚』인에이라이산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佐藤春夫사토오하루오와의 부인 양도 사건 이후 2번째의 결혼, 이혼을 거쳐, 1935년 森田松子모리타마츠꼬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는 사생활도 안정되어 충실한 가정생활 및 작가 생활을 이어나간다. 


태평양 전쟁 중, 谷崎는 松子마츠꼬 부인과 그 동생들 4 자매의 생활을 제재로 한 대작『細雪』사사메유끼에 착수하고, 
 
군부에 의한 발행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집필을 계속해, 전후 그 전편을 발표한다.(每日마이니찌출판문화상, 朝日아사히 문화상 수상). 이 작품의 등장인물이 둘째 「幸子」사찌꼬는 松子, 3녀「雪子」유끼꼬는 松子의 여동생 重子시게꼬가 모델이었다. 


패전 후, 고혈압이 악화 되어 평생의 숙원 작업이었던 『源
 
氏物語』의 현대어 번역작업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말년의 谷崎는『過酸化マンガン水の夢』카산카망간스이노유메(1955年)를 시작으로, 『鍵』카기『瘋癲老人日記』후우텐로진닛키등의 걸작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알려진 것만 1958년, 1960년부터 1964년까지 합계 7번, 특히 1960년과 1964년에는 최종후보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1965년 동경의과치과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해서 퇴원 후, 京都 여행을 간다. 7월30일 신부전에 심부전이 같이 와, 79세 나이로 사망. 


明治・大正期부터 일본근대문학의 주류는 私小説이었다. 작가의 사생활을 그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 가를 추구하는 모습을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 분위기는 너무나도 암울하고, 또 그 암울한 분위기야말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谷崎의 작품은 ‘사상이 없다’ ‘세상과의 대결이 없다’ 등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런 방식의 사소설중심의 문학관에서 조금만 떨어져 생각을 해보면, 谷崎의 소설세계의 풍요함, 그리고 넓은 시야로 본 사상, 18세기 프랑스 문학과 같은 가혹한 인간인식과 추상주의를 보여 준 작품들이 이전과는 달리 독자들에게 다양하고 풍요로운 읽을거리를 제공하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刺青】단편소설. 1910년11월 제 2차『新思潮』3호에 게재. 谷崎 본인이 처녀작으로 말하는 단편으로, 다리에 집착하는 페티시즘과 여성숭배, SM 등 谷崎 작품세계에 공통으로 보여지는 모티브가 모두 내재되어 있는 작품.

清吉라고 하는 솜씨가 뛰어난 문신사의 
 
숙원은 자기가 원하는 다리를 가진 여인에게 문신을 하는 것이었는데, 우연히 그 여인을 만나고 그 여인에게 두 폭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 순간 그 여인의 표정에 스치는 마성을 보고 확신을 하고 최음제를 먹여 혼절한 여인에게 자신의 혼을 담은 문신을 한다.

마취에서 깨어난 여인은 마성의 여자로 변신하고 눈을 반짝이며 ‘너는 제일 먼저 나의 비료가 되었구나’라며 미소를 지낸다. 돌아가기 전에 한 번 더 문신을 보여 달라는 清吉의 부탁에 고개를 끄떡이며 옷을 벗는다. 때마침 비치는 아침 햇살에 여인의 등의 여왕거미는 살아서 움직이는 듯 꿈틀거렸다.


3. 白樺派시라카바하


명치라고 하는 하나의 거대한 시대가 끝남과 함께 자연주의는 정체, 퇴조기에 들어갔다. 여기에 대신할 새로운 세력으로 대두한 것이 武者小路実篤무샤노코오지사네아츠, 志賀直哉시가나오야, 有島武郎아리시마타케오 등의 잡지 「白樺」시라카바(1910년 창간) 그룹이었다. 멤버의 대부분이 특권, 상류계급의 가정에서 자란 学習院가쿠슈우인 출신이었고, 자신의 출신과 사회정의와의 모순에 번뇌하는 청춘 속에서 ‘자신을 살리고, 또 
 
표출할’ 방향으로 문학을 선택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이 동인들은, 주관을 배제하는 자연주의와는 달리, 강렬한 자기주장을 펼침으로써 大正 초기를 이끈 주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노동운동과 연결된 사회주의의 영향이 문학에도 미치면서, 白樺派의 세력은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상가로서의 고뇌의 지속성이란 점에서 동인 중 이색적인 존재였던 有島武郎아리시마타케오가, 절망의 끝에 자살의 길을 선택한 1923년, 「白樺」의 폐간이 결정되었다.


1)武者小路実篤무샤노코오지사네아쯔

 

東京 千代田찌요다에서 江戸 시대부터 公卿쿠교오 가계였던 武者小路무샤노코오지 가문의 武者小路実世무샤노코오지사네요 자작과 勘解由小路카데노코오지 가문 출신의 秋子나루꼬 부부의 8번째로 태어났다. 먼저 태어난 5명은 요절하여 누나 伊嘉子이카꼬 형 公共킨토모와 함께 자랐다. 2살 때 아버지가 결핵으로 사망. 

1891년 学習院 초등과에 입학. 중등학과 6학년 때, 유년하였던 2살 연상의 志賀直哉시가나오야와 친해진다. 고등학과 시절은 톨스토이에 매

료되고, 성서나 불전도 탐독하였다. 1906년 동경제국대학 철학과사회학전공에 입학, 1907년 学習院 시절부터 동기였던 志賀直哉시가나오야, 木下利玄키노시타리겐 등과 같이 만든「十四日会」쥬우욧카카이에서 창작활동을 한다. 같은 해 대학을 중퇴하고, 그 다음 해 처녀 작품집 『荒野』코오야를 자비 출판하였다. 1910년 志賀直哉, 有島武郎아리시마타케오, 有島生馬아리시마이쿠마 등과 문학잡지『白樺』를 창간하며, 実篤는 白樺派의 사상적 지주역할을 하였다. 1913년 竹尾房子타케오후사꼬와 결혼.

이상적이고 조화로운 사회, 또 계급투쟁이 없는 사회, 이상향을 실현하기 위해, 1918년에 宮崎県미야자끼켄 児湯郡코유군 木城村키죠오무라에 「新しき村」아타라시키무라를 건설하였다. 実篤는 농작업을 하면서 문필활동을 이어가, 大阪毎日오오사까마이니찌新聞에『友情』유우죠오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마을이 댐건설에 의해 수몰되었기에, 1939년 埼玉県사이타마켄 入間郡이루마군 毛呂山町모로야마마찌에 새로운「新しき村」를 건설하였다. 実篤는 1924년에 이 마을을 떠나, 회비만을 납부하는 촌외회원이 되고 실제로 마을에 거주한 것은 6년간이었다.

1922년 房子후사꼬와 이혼하고 飯河安子이고야스꼬와 재혼. 관동대지진에 의해 생가가 소실되었다. 또 이해 『白樺』도 폐간된다. 이 무렵부터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리고 또 유화도 그리기 시작해 1929년에는 개인전시회도 개최하였다. 집필 의뢰가 거의 들어오지 않아 「실업시대」가 이어진다. 톨스토이, 二宮尊徳니노미야손토쿠, 井原西鶴이하라사이카쿠, 一休잇큐, 석가 등의 전기소설을 집필하였

 

다.

1936년4월27일 유럽여행을 위해 출국하여 12월12일 귀국. 여행 중 체험한 황색인종에 대한 인종차별의 굴욕감을 느끼고는 전쟁을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선다.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 후, 実篤는 톨스토이의 사상의 공감에서 출발한 개인주의나 반전사상을 완전히 버리고, 전쟁찬성의 입장으로 변해서 전쟁에 대해 협력을 하였다.

1946년 귀족원의원에 선출되었지만, 9월에 태평양 전쟁 중의 전쟁협력으로 인해 공직 추방되었다. 1948년 『心』코코로를 창간해 주간을 맡고, 『真理先生』신리센세이를 연재. 1955년 70세 되는 해, 調布市쵸오후시 仙川센가와로 이주해서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거주한다.

1976년4월9일, 동경 자혜회 의과대학 부속 제삼병원에서 요독증으로 사망. 향년 90세.


2)志賀直哉시가나오야


1883년2월20일, 宮城県미야기켄 牡鹿郡 
 
오시카군
石巻町이시노마끼쵸에서 부 志賀直温시가나오아츠와 모 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直温는 당시 제일은행 石巻 지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2세 때, 제일은행을 사직한 아버지와 함께 동경으로 돌아온 直哉는 할아버지 와 할머니 밑에서 키워졌다. 直哉의 형直行나오유끼가 죽은 것은 며느리의 책임이라 생각한 조부모가 志賀家의 가계를 끊이지 않게 하기 위

해서 자신들의 손으로 키우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1889년9월 学習院에 입학하고, 초등과를 졸업한 1895년에 생모 銀이 사망하였다. 같은 해 아버지 直温는 재혼. 

1895년9월, 学習院 중등과에 입학. 이 무렵의 直哉는 문학 
 
지망이 아니고, 해군군인이나 실업가를 장래희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등과 재학 중인 1901년7월, 집의 書生이었던 末永馨스에나가카오루의 권유로 新宿신쥬쿠에서 内村鑑三우찌무라칸조오의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直哉는 ‘진정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술회처럼 엄청난 감명을 받고, 内村의 매력에 빠져 이후 7년간, 内村의 가르침을 받는다. 内村의 가르침을 받고 5개월이 지난 무렵, 直哉는 足尾아시오 광산의 중독사건을 비판하는 内村의 연설을 듣고 충격을 받고는 현지 시찰을 계획한다. 그러나 조부 直道가 예전에 古河市兵衛후루카와이찌베와 足尾 광산을 공동 경영한 적이 있어, 아버지 直温는 반대를 한다. 이에 두 사람은 크게 충돌하고, 오랜 불화의 원인이 된다.

1903년 学習院 고등과에 입학. 이 무렵 直哉는 女義太夫온나기다유에 빠져있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설가지망의 의지를 굳혔다. 

1906년7월, 学習院 고등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동경제국대학영문학과에 입학. 대학에서는 夏目漱石나츠메소오세끼의 강의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나, 수업은 거의 출석하지 않았다. 1910년에는 대학을 중퇴.

동경제대 재학 중인 1907년4월, 武者小路実篤무샤노코오지사네아츠 · 木下利玄키노시타리겐 · 正親町公和오오기마찌킨카즈와 문학동호회 「十四日会」를 조직하고, 다음 해에는 4명이 동

인지 『暴矢』보오야(뒤에『望野』)를 발행. 그 후1910년 直哉는『望野』의 멤버와,『麦』무기(里見弴사토미톤등이 소속)멤버,『桃園』토오엔(柳宗悦야나기무네요시등이 소속)와 함께 잡지『白樺』를 창간한다. 그리고 창간호에 『網走まで』아바시리마데를 발표한다. 이후 이 잡지에『范の犯罪』한노한자이,『城の崎にて』키노사끼니떼『小僧の神様』코조오노카미사마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07년 동경제대에 재학 중이던 直哉는 집에서 일하던 식모와 깊은 사이가 되어 결혼을 하고자 하나, 아버지의 강한 반대로 좌절한다. 足尾광산때부터 좋지 못했던 사이가 이 사건으로 더욱 더 악화된다. 1912년9월 直哉는『大津順吉』오오츠쥰기치를『中央公論』츄우오오코오론에 발표한다. 이 작품은 식모와의 결혼문제를 제재로 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으로 直哉는 처음으로 원고료 100円을 받는다. 이 무렵 直哉의 첫 단편집을 출판하기로 하고 그 비용을 아버지에게 부탁하러 갔으나, 소설가를 지망하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꾸중을 듣고 격한 언쟁을 하고는,  10월25일 집을 나와 여관에서 2주간정도 체재한 후, 広島県히로시마켄尾道오미찌로 이사를 한다. 尾道 이사 후, 1913년1월 첫 단편집 『留女』루메가 간행된다. 같은 달, 読売요미우리新聞 지상에『清兵衛と瓢箪』세이베에또효오탄을 발표한다. 이 작품은 표주박을 좋아하는 소년과 그 가치를 이해해 주지 못하는 어른들의 이야기인데, 直哉는 자신이 소설을 적는 것에 엄청 불만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에서 이 소설을 적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直哉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時任謙作』토키토오켄사쿠의 집필에 착수한다. 자신을 時任謙作에 가탁해서, 아버지와의 불화를 제재로 한 작품이었다. 생각보다 진척이 없어 집필을 일시 중단한다. 집필이 잘되지 않은 점도 있고, 直哉는 1913년4월, 尾道

체재를 반 년 만에 접고 귀경한다.

1913년8월15일 동경에 체재하고 있던 直哉는『出来事』데끼고토를 탈고하고 그날 밤, 里見弴사토미톤과 함께 스모를 보러갔다가 귀가 길에 전차에 치어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한다.

東京の下大井町시타오오이쵸오에 집을 빌려 일단은 그곳에서 
 
생활을 한다. 그런데 이 무렵 武者小路実篤를 매개로 夏目漱石로부터 東京朝日新聞에 소설의 연재를 의뢰받는다. 直哉는『時任謙作』을 연재하고자 결심하고, 마음을 다잡고 집필에 집중할 수 있게, 1914년5월에 里見弴과 함께 島根県시마네켄 松江마쯔에로 떠난다. 松江의 大山오오야마에 간 直哉는 그 경치를 보고 큰 감명을 받는다. 이 大山에서 본 조망은『暗夜行路』안야코오로의 결말의 장면에 채용되었다. 그런데 소설이 생각대로 진전이 없자 상경을 해, 漱石를 방문하여 연재 사퇴의사를 전달한다. 漱石에게 미안함을 가진 直哉는 자책감에 번뇌를 하고 결과적으로 3년간 소설을 적지 못한다. 1914년9월, 直哉는 京都쿄오토로 이주한다. 같은 해 12월 武者小路実篤의 사촌 여동생 勘解由小路康子카데노코오지야스꼬와 결혼. 康子는 화족여학교를 중퇴한데가 재혼이어서, 아버지가 원하는 결혼은 아니어서, 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결혼한 다음 해, 直哉는 스스로 아버지의 호적에서 이적을 하였다. 결혼 후, 신경쇠약에 걸린 康子를 위해 1915년 5월에 鎌倉카마쿠라로 이주한다. 하지만 이사한 鎌倉가 康子의 신경쇠약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여, 1주일 후 群馬県군마켄의 赤城山아까기야마로 다시 이주. 이곳의 생활은 두 사람 다 만족을 하였고, 康子의 신경쇠약도 회복을 하였다.

거주지를 자주 옮기던 直哉는, 1915년9월 柳宗悦야나기무네요시의 권유로 千葉県찌바켄我孫子아비코의 手賀沼테가누마로 이사한 후, 1923년까지 이곳에서 정주한다.

1916년12월, 夏目漱石가 사망. 漱石를 경모한 直哉에 있어, 漱石의 죽음은 매우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漱石에게 대한 사죄의 마음에서라도 ‘좋은 작품을 적어 『朝日新聞』에 게재하기 전까지는 다른 매체에 게재하는 일은 사양한다’는 심리적 속박에서는 해방되었다. 武者小路実篤의 응원에 힘입어 1917년 直哉는 집필을 재개한다. 5월『白樺』지상에『城の崎にて』키노사끼니떼를 발표. 이 작품은 城崎에서의 요양 체험을 그린 것으로, 작은 동물들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의 생과 사를 고찰한 작품이었다. 그의 대표작임과 동시에 「심경소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어서 6월에 『佐々木の場合』사사끼노바아이를『黒潮』쿠로시오에 발표. 이 작품은 漱石에게 헌정한 작품인데, 3년 전의 죄송함을 사죄하는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直哉는 이해 아버지와의 화해를 실현한다. 이 기쁨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이 경험을 그린 『和解』와카이를 단숨에 적어, 10월 『黒潮』에 발표하였다.

1917년부터 我孫子를 떠나는 1923년까지는 작가 志賀直哉에 있어서 가장 충실한 시기였다. 평생 작품을 그렇게 많이 적지 않았던 그이지만, 直哉는 이 기간 동안 『小僧の神様』코조오노카미사마 『焚火』타키비 『真鶴』마나즈루등 대표작이 되는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잡지『改造』카이조오에 장편『暗夜行路』안야코오로(『時任謙作』에서 제목을 변경)의 연재 개시도 이 시기였다. 또『留女』루메 이외에는 없었던 작품집이 이 기간에만 9권 출판되었다.

我孫子에서 충실한 작가 생활을 보내고 있던 直哉였으나, 

1922년 말경에, 장편집필의 진척이 없는 탓도 있었던지, ‘나는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싫다’고 일기에 적을 정도로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상실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탈출하는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直哉는 1923년 我孫子를 떠나 京都로 이주를 한다.

1925년4월, 学習院 초등과 시대부터의 친구인 九里四郎쿠노리시로오의 권유도 있어, 이번에는 奈良나라로 이주. 1926년6월 미술도감『座右宝』자우호오를 간행한다. 尾道오미찌・松江마쯔에 시절부터 동양의 고미술에 관심을 가졌던 直哉가 눈앞에 두고 고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집을 원해 간행한 것이었다. 그 후 자신이 설계한 저택이 奈良나라의 上高畑카미타카바다케에 완성되어, 1929년에 그곳으로 이사를 한다. 이곳 奈良에서는 直哉는 많은 문화인들과 교류를 가졌다. 교류가 가능한 것도 直哉를 따라 奈良에 이주해 온 瀧井孝作타키이코오사쿠, 武者小路実篤무샤노코오지사네아츠, 網野菊아미노키쿠, 小林秀雄코바야시히데오, 尾崎一雄오자끼카즈오를 비롯해 奈良에 거주하고 있던 上司海雲카미츠카사카이운, 直哉를 흠모해 저택을 방문한 小林多喜二코바야시타키지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直哉의 上高畑카미타카바다케 저택에는 항상 문화인들이 모여들었기에 어느 샌가 「高畑サロン」타카바다케사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창작 면에서는, 잡지『改造』카이조오에 연재하고 있었던『暗夜行路』안야코오로가 1928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게다가 1929년부터 1933년까지는,『リズム』리즈무 등의 수필을 제외하고는 휴식기에 들어갔다. 당시의 문단에 프롤레타
 
리아 문학을 중시하는 경향에 대한 불만도 한 원인이었다. 이 휴식기 동안 直哉는 里見弴사토미톤과 함께 만주, 천진, 북경을 여행하였다. 直哉에게 있어 처음으로 갖는 해외여행이었다. 이 여행의 에피소드를 소설로 적은 것이『万暦赤絵』반레끼아까에였고, 이 작품을 계기로 창작활동을 재개하였다. 1934년에는『日曜日』니찌요오비『朝昼晩』아사히루방『菰野』코모노『颱風』타이후우 와 같은 작품을 연이어 발표했다. 1937년에는 중단하고 있었던『暗夜行路』를 완결 지었다.
 

1938년3월, 東京의 淀橋区요도바시쿠諏訪町스와쵸오로 이사를 한다. 奈良의 생활이 맘에 들었지만,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동경 이사를 결심한 것이었다. 2년 전, 直吉나오키치는 学習院에 편입해 고모 집에서 통학을 했었고, 이번에는 가족 모두가 동경으로 옮긴 것이었다. 

1937년9월, 改造社카아조오샤에서 『志賀直哉全集』9권의 간행이 시작되어, 다음 해 6월에 완결한다. 直哉는 최종회 배본의 월보에 작가활동의 폐업을 선언한다. 直哉는 중일전쟁에 대한 불만이 많아, 글을 적고자 해도 불만이 문면에 나타나기에 적을 수가 없었다. 

전쟁이 종국에 치닫고 있을 때, 直哉는 외무대신 重光葵시게미쯔마모루의 의향을 캐치해서 安倍能成아베요시시게, 加瀬俊一카세토시카즈, 田中耕太郎타나까코오타로오, 谷川徹三타니카와테츠조오, 富塚清토미츠카키요시, 武者小路実篤무샤노코오지사네아쯔, 山本有三야마모토유우조오, 和辻哲郎와츠찌테츠로오등과 함께「三年会」산년카이를 결성한다. 패전 후의 국내의 혼란 저지를 목적으로 만든 모임이었다. 이 「三年会」는 전후「同心会」도오신

카이로 발전하는데, 이 「同心会」의 멤버들은 잡지『世界』세카이의 창간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直哉는 작가 활동을 재개하였다. 1946년 자신이 관여했던 雑誌『世界』의 창간호에『灰色の月』하이이로노츠끼를 발표. 이 작품은 패전 직후의 동경의 풍경을 그린 것으로 오랜만에 주목을 받은 화제작이었다. 또한 『天皇制』,『鈴木貫太郎』스즈끼칸타로오,l『国語問題』등의 시사 에세이도 발표하였다.

1948년 잿더미로 변한 동경에서 사는 것이 싫어졌던 直哉는 熱海아타미의 산장으로 이주. 『山鳩』야마하토『朝顔』아사가오를 발표. 1949年에는 아주 가까이 지내던 谷崎潤一郎타니자끼쥰이찌로오와 함께 문화훈장을 받는다.

1952년 고희를 맞이한 直哉는 柳宗悦야나기무네요시, 濱田庄司하마다쇼오지와 함께 유럽여행을 간다. 원래 毎日新聞社가「문화사절단」으로 여비를 부담하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신문사의 간섭을 싫어한 直哉는 자비로 간다. 마침 베니스의 국제미술제에 참가하는 梅原龍三郎우메하라류우사부로오도 합류해 5월31일 羽田하네다 공항에서 출발해 로마에 
 
도착한다. 이탈리아의 유적지, 미술관을 순회하며 19일간 체류. 그 후 파리, 마드리드, 리스본으로 미술 감상 여행을 이어가나, 直哉는 건강을 해치고 런던에서는 심하게 앓고 자리에 눕는다. 북유럽과 미국에도 갈 예정이었으나, 梅原와 함께 8月12日 귀국을 하였다. 

1955년, 渋谷시부야常盤松토키와마츠로 이사를 한다. 岩波이와나미 서점에서『志賀直哉全集』의 刊行이 시작되었으나, 常盤松 시절의 直哉는 좀체 붓을 들지를 않았다. 1969년의 수필

『ナイルの水の一滴』나이루노미즈노잇테키(2월23일朝日新聞)이 마지막 작가활동이었다.

1971년11월21일 오전11시58분, 폐렴과 노쇠로 관동중앙병원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志賀直哉는 사실의 달인이며, 예리하고 정확하게 파악한 대상을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에 따를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군더더기가 없는 문장은, 문체의 이상이라고 말해져,  直哉의 작품은 문장 연습을 하는데 좋은 교과서가 되기도 한다. 당시의 많은 문학청년들의 숭배의 대상이었던 直哉는 「小説の神様」쇼오세츠노카미사마(소설의 신)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대변된다.

芥川龍之介아쿠다카와류우노스께는 문학평론『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문예적인, 너무나도 문예적인)에서, ‘통속적 흥미가 없는’ ‘가장 시에 가까운’ ‘가장 순수한 소설’을 적는 일본의 소설가는 志賀直哉밖에 없다고 서술하였다.


『小説の神様』】 단편소설. 1920년(大正9년)잡지「白樺」발표. 이 작품을 계기로 志賀는「小説の神様」라 불릴 정도로 지명도를 높이게 된다.

神田의 저울가게에서 견습 사원을 하고 있는 仙吉. 지배인들이 얘기하고 있는 초밥집을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어느 날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그 집을 들리나 돈이 부족해 초밥을 먹지 못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귀족원 A는 주위의 시선에 사주고 싶어도 못 사주고 만다. 딸의 생일 선물로 저울을 사고자 우연히 들린 가게에 그 때의 仙吉를 보고는 초밥을 맘껏 먹게 해준다.

초밥을 얻어먹은 仙吉는 ‘어떻게 해서 내가 초밥을 먹고 싶

어하는지, 또 지배인들이 말한 그 초밥 집을 그분이 알고 있었을까? 라는 의문에서 그분은 神様가 틀림없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본문 마지막에 추서를 달고, ‘그분이 남긴 주소를 가보니 집이 아니고 신사가 있어 꼬마는 놀라고 말았다’ 고 적고 싶었으나, 그러면 꼬마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해서 여기서 붓을 놓는다. 라고 서술했다.

直哉의 작품 중에 白樺派의 근본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인본주가 가장 잘 나타난 작품 중의 하나.


3)有島武郎아리시마타케오


東京 小石川코이시카와에서 대장성 관료, 실업가인 有島武아리시마타케시와 幸子사찌꼬의 장남으로 출생한다. 武郎타케오가 4세 때, 아버지가 横浜요코하마 세관장으로 취
 
임하여 일가가 모두 横浜로 이주한다. 아버지의 교육 방침에 의해 미국인가정에서 생활을 하며 横浜 英和에이와 학교를 다녔다.

10세에 学習院가쿠슈우인 예비과에 입학하고, 기숙사에 들어가 19세에 学習院 중등 전과를 졸업한다. 그 후 札幌삿뽀로 농학교에 입학. 新渡戸稲造니토베이나조오가 당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内村鑑三우찌무라칸조오, 森本厚吉모리모토코오키찌의 영향

으로 1901년 기독교에 입문을 한다. 농업학교 졸업 후에 군대생활을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포드대학(Haverford College)에서 역사・경제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에서도 1년 정도 공부를 하였다. 재미 중, 같은 일본인 유학생 金子카네꼬의 영향으로 사회주의에 이끌리게 되었으며,  휘트만(Walter Whitman) 입센(Henrik Johan Ibsen)등의 서양문학을 탐독하였고, 또  베르그손(Henri- Louis Bergson)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등의 서양철학에도 심취하였다. 유럽에도 건너가 견문을 넓히고 1907년에 귀국을 한다. 귀국 후, 미국에서의 좋지 못한 경험과 신앙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기독교에서 멀어진다.

귀국 후 동북제국대학 농과대학에서 영어강사로 재직하였는데, 동생 生馬이쿠마를 통해 志賀直哉시가나오야, 武者小路実篤무샤노코오지사네아츠를 알게 되고 『白樺』시라카바에 참가한다.『かんかん虫』캉캉무시『お末の死』오스에노시등을 『白樺』에 발표하면서, 白樺派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으로 활약을 했다.

1916년(大正 5년)아내인 安子야스꼬가 폐결핵으로 27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같은 해 아버지가 사망한다. 安子는 육군대장출신의 남작 神尾光臣카미오미츠오미의 
 
차녀로 아버지 有島武아리시마타케시가 정략적으로 결혼시킨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처음에는 安子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安子가 폐결핵에 걸려 자리에 눕자, 有島는 모든 일을 정리하고 아내의 간호에 전념하였다.

어쨌든 有島는 자신에게 평생의 큰 벽이었던 아버지와 아내를 동시에 잃어버려 상심도 컸겠지만, 한

편으로는 큰 짐을 내려놓은 면도 있었던 것인지, 이해부터 의욕적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에 들어갔다.『カインの末裔』카인노마츠에이『生まれ出づる悩み』우마레이즈루나야미『迷路』메이로등의 자신의 대표작이라 할 가작들을 연이어 발표하고, 1919년에는 『或る女』아루온나를 발표한다.

창작력이 점점 쇠퇴해지기 시작하고, 『星座』세이자를 도중에 중단하고 만다. 1922年 『宣言一つ』센겐히토츠를 발표하고 北海道홋카이도오狩太村카리후토무라의 有島 농장을 소작인 모두에게 공동명의로 무상 양도해서 개방한다.

1923년『婦人公論』후진코오론의 기자로 유부녀였던 波多野秋子하타노아끼꼬와 극장에서 우연히 알게 되고, 서로 연애감정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秋子의 남편 春房하루후사가 이를 알고 협박을 한다. 그리고 6월9일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실종이 되었으나, 7월7일에 長野県나가노켄軽井沢카루이자와의 별장에서 관리인에 의해 유체로 발견된다. 장마시기에 1달이나 유체가 발견되지 않았기에 상당히 부패가 심했고, 유서의 존재로 겨우 신원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유서를 여러 장 남겼는데, 그 중 하나는 ‘사

 

랑 앞에서 죽음이 이렇게 무력한 것인지는 이 순간까지 몰랐다.’ 라는 내용이다.


カインの末裔】 1917년(大正 6년)7월 발표된 단편소설. 일본의 北海道홋카이도오를 무대로 험난한 자연 속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개척지의  모습을 그린 소설.  仁右衛門닌우에몽은 지인의 소개로 아내와 젖먹이 아이, 말 1마리를 끌고 松川 농장에 도착한다. 그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만류하는 주민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굴복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확보한다. 그리고 간통, 술, 도박 등 모든 죄업을 지으며 안하무인의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작은 공동체이지만 지켜야만 룰이 있고, 연대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었다. 마지막 모두를 잃고 아내와 쓸쓸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에는 모든 것을 짊어진 카인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흉악한 인물의 조악한 행동을 그린 작품이지만, 문장은 치밀하고 완벽한 구성을 자랑한다. 등장인물의 배치도 말할 나위가 없고, 말 조차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인공은 다시 보기도 싫을 정도로 흉악한 인물이지만, 다 읽고나면 그에게 공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작자의 의도에 걸리게 되는 것일까?

카인은 구약성서 창세기 4장에 등장하는 인류의 조상이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을 추방당한 후 2명의 자식 카인과 아벨을 놓는데, 농부인 카인이 양치기인 동생 아벨과 함께 신에게 공물을 바치나, 동생 아벨 것만 받게 되자 질투에 눈이 멀어 아벨을 죽이고 만다.

성서는 인류는 모두가 이 카인의 후예이고 우리들 인간은 태어나면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신앙의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4.新現実主義


大正 문학을 형성하는 큰 흐름으로 탐미파와 白樺派 외에, 또 하나의 흐름이 존재하였다. 탐미파와 白樺派가 주관적・공상적이고, 너무 이상주의에 치우쳐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문에서,  현실을 명석한 지성에 의해 새로운 시점에서 다시 재조명하자고 주장한 흐름이 바로 신현실주의이다. 

신현실주의에 포함되는 작가는 광범위하고 또 작풍도 모두가 달랐으나, 작가들이 활동한 잡지에 의해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新思潮」신시쵸오에 참가한 芥川龍之介아쿠타가와류우노스께, 菊池寛키쿠찌칸, 山本有三야마모토유우조오, 久米正雄쿠메마사오를 新思潮派라 하고, 「奇蹟」키세끼에 참가한 広津和郎히로츠카즈오, 葛西善蔵카사이젠조오, 宇野浩二우노코오지 등을 奇蹟파라 한다. 


1) 新思潮派


신사조파는 東京帝国大学의 학생들의 동인지 「新思潮」신시쵸오에 의해 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을 말
 
한다. 芥川龍之介
아쿠타가와류우노스께, 菊池寛키쿠찌칸, 山本有三야마모토유우조오, 久米正雄쿠메마사오, 豊島与志雄토요시마요시오등이다. 그들은 사회의 어두운 현실이나 인간의 모습을 멀리서 관찰하고, 이지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해, 섬세한 기교로 소설을 그리고자 하였다.


① 芥川竜之介


東京 京橋쿄오바시에서 우유 제조 판매업을 하는 新原敏三니이하라토시조오、フク후꾸의 장남으로 출생. 누나가 2명 있었으나, 큰 누나는 龍之介류우노스께가 태어나기 1년 전, 6세에 병사를 하였다. 생후 7개월 무렵 엄마가 정신에 이상을 보여 엄마의 친정인 芥川아쿠타家에 맡겨져 큰 이모 フキ후끼에 의해 양육되었다. 11세 때 엄마가 사망하고 이듬 해 외삼촌 芥川道章아쿠타가와도오쇼요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어, 芥川아쿠타가와성을 가지게 되었다. 士族 출신인 芥川아쿠타가와 집안은江戸에도 시대 대대로 徳川토쿠가와 집안의 잡무를 담당하였다. 집안 모두가 예술, 연극을 좋아했고, 江戸 시대의 문인 취미가 남아있었다.

제일고등학교 제1부 을류에 입학. 1910년부터 중학교 성적우수자는 무시험입학 제도가 시행되어, 龍之介는 이 제도에 의해 입학하였다. 동기로는 久米正雄구메마사오, 松岡讓마츠오까유즈루, 佐野文夫사노후미오, 菊池寛키쿠찌칸, 井
 
川恭이가와쿄오, 土屋文明츠찌야분메이, 渋沢秀雄시부자와히데오 등이 있었다. 2학년이 되자 전학생 기숙사 의무 입사 제도로 인해 기숙사에 들어가나, 적응하는데 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던 井川는 평생 동안 가장 친한 친구의 한 명이었다. 井川는 제일고등학교 일람에 의하면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항상 성적이 芥川 위에 있었다. 

1913년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 영문학과에 진학. 참고로 영문학과는 당시 한 학년에 몇 명밖에 합격자를 뽑지 않는 아주 어려운 학과였다.

동경제대 재학 중인 1914년2월, 일고 동기인 菊池寛・久米正雄와 함께 동인지『新思潮』(제3차)를 간행.「柳川隆之助」야나기카와류노스께란 필명으로 아나톨 프랑스의 발타자르, 예이츠의 「春の心臓」의 일본어 번역을 기고고, 10월에 『新思潮』가 폐간 될 때까지 동 지상에 처녀소설 「老年」로오넨을 발표하였다. 이 무렵 青山아오야마 여학원 영문과를 졸업한 吉田弥生요시다야요이란 여성과 친해지고 결혼을 생각하나, 芥川家의 맹렬한 반대로 단념한다.

1915년 대표작의 하나인 「羅生門」라쇼오몽을「芥川龍之介」아쿠타가와류우노스께이름으로『帝国文学』테이코쿠분가쿠를 발표, 동기 松岡譲마츠오까유즈루의 소개로 夏目漱石나츠메소오세끼 문하에 들어간다. 

1916년 제4차『新思潮』(멤버는 菊池・久米와 松岡譲・成瀬正一나루세쇼오이찌의 5명) 창간호를 발간하고 「鼻」하나를 게재해 漱石에게 극찬을 받았다. 이해 동경제국대학 문과대학 영문학과를 20명 중 2등의 성적으로 졸업. 졸업논문은「윌리엄 모리스 연구」. 같은 해 12월, 해군기관학교 영어교관을 오랫동안 담당한 浅野和三郎아사노와사부로오가 종교 문제로 사직해서 후임에 芥川가 추천(内田百間우찌다핫켄에 의하면 夏目漱石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받아, 해군기관학교의 촉탁교관으로 교편을 잡게 된다. 그리고 창작에도 힘을 쏟아, 이듬 해 5월에 첫 단편집『羅生門』라쇼오몽을 간행한다. 그 뒤에도 단편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여, 11월에는 제2단편집『煙草と悪魔』타바코토아쿠마를 발간하였다.

1919년3월, 해군기관학교의 교직을 사임하고 大阪오오사까 毎日마이니찌 신문사에 입사하여 창작에 전념한다. 스승인 漱石도 1907년 같은 방식으로 朝日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였다.

1919년3월12일 친구 山本喜誉司야마모토키요시의 누나의 딸, 塚本文츠카모토후미와 결혼. 

1921년 해외 시찰원으로 中国을 방문하고 北京을 방문했을 때 胡適를 만나 検閲 문제에 관하여 토론을 하였다. 여행 후 점차 심신이 쇠약해지고, 신경쇠약, 장염 등을 앓는다. 

1923년 湯河原町유가와라마찌에 온천요양을 간다. 작품 수는 줄어들었지만, 이 무렵부터 사소설적인 경향의 작품이 등장하고, 이 흐름은 만년의 「歯車」하구루마「河童」갓빠 등으로 이어진다.

1927년1월 자형 西川豊니시카와유타카가 방화와 보험사기 혐의로 추궁을 당하자, 철로에 뛰어들어 자살. 西川가 남긴 빚과 유족들의 뒤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4월 「작품의 재미」를 주장하는 谷崎潤一郎타니자끼쥰이찌로오에 대해「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문예적인, 너무나도 문예적인)에서「작품의 재미」가 소설의 질을 결정하지는 않는다고 반론하고, 전후의 스토리에 비판적인 문단의 흐름을 예상할 수 있는 문학사상 유명한 논쟁을 펼쳤다. 이 논쟁 중에 芥川는 「이야기다운 이야기가 없는」순수한 소설의 명인으로 志賀直哉시가나오야를 들었다. 이 무렵 비서 平松麻素子히라마츠마스꼬와 제국호텔에서 자살 미수 사건이 있었다.

7월24일 새벽「続西方の人」죠쿠세이호오노히또를 적은 후, 斎

藤茂吉사이토오모키찌로부터 얻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하였다.


芥川龍之介의 작품 추이

<초기>

설화문학을 바탕으로 한 「羅生門」라쇼오몽「鼻」하나「芋粥」이모가유등의 역사계통소설, 그리고 기독교계통의 소설이 주를 이룬다. 日夏耿之介히나츠코오노스께는 초기의 작품이 특히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사계통소설에서는 인간의 내면 특히 에고이즘을 그린 것이 많다.

<중기>

예술지상주의적인 면을 전면에 내세운 「地獄変」지고쿠헨과 같은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만년>

자살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인생을 다시 돌아본다든지, 생사에 관한 작품이 많이 보인다. 초기보다는 만년의 작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하는 견해도 많이 보인다.


奉教人の死】1918년(大正7년)『三田文学』에 발표된 단편소설. 중세 일본의 長崎를 무대로 주위의 오해와 편견으로 교회를 추방당한 로렌조의 모습을 그린,『きりしとほろ上人伝』와 함께 芥川의 기독교물의 걸작이라 평해지는 작품.


② 菊池寛키쿠찌칸


香川県카가와켄高松타카마츠에서 출생. 菊池키쿠찌家는 江戸 시대, 高松藩타카마츠한의 유학자 집안이었다. 高松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로 학비면제를 받고 동경고등사
 
범학교에 진학하였지만, 수업을 들어가지 않아 제적이 되었다. 그런데 고향의 유지가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겨 경제적인 원조를 해주어 明治메이지대학 법과에 입학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한때 법률을 배워 법률가를 희망한 적도 있었지만, 제일고등학교 입학을 목표로 중퇴를 한다. 징병을 피하기 위해 早稲田와세다 대학에 적만 두고, 입시공부를 하는 한편 대학도서관에서 井原西鶴이하라사이카쿠를 탐독하기도 하였다.

1910년 제일고등학교 제1부 을류에 입학. 동기에 그의 평생의 친구이자 그가 창설하는 문학상 이름의 주인공 芥川龍之介아쿠타가와류노스께, 또 井川恭이가와쿄오가 있었다. 그러나 졸업 직전에 망토사건으로 퇴학.

그 후, 친구 成瀬正一나루세세이이찌의 원조를 받아 京都쿄오토 帝国大学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은 하였지만, 고교졸업 자격이 없었기에 본과에서 수업을 받을 수가 없어 선과에 갈 수밖에 없었다. 菊池寛 자신은 고등학교의 졸업자격 검정시험을 쳐서 동경제국대학에 진학하여 친구들과 합류할 의사가 있었으나, 上田萬年우에다카즈토시교수의 거절과 京都를 떠날 수없는 사정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京大에서는 문과대학문학부 교수였던 上田敏우에다빈에게 강의를 들었다. 당시 상황은 실의의 나날을 그린 「無名作家の日記」(무명작가의 일

기)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1916년 京大 졸업 후, 時事新報지지신뽀 사회부기자를 거쳐, 소설가가 된다. 1923년에 사비로 창간한 잡지『文藝春秋』분게이슌쥬우가  대성공을 거두고 많은 돈을 번다. 일본문예가협회를 설립하고, 芥川賞아쿠타가와쇼오 · 直木賞나오키쇼오을 설립한다.

大映타이에이영화사 초대사장, 報知호오치 신문객원을 하면서 이 사업의 성공으로 거둔 자산으로 川端康成카와바타야스나리, 横光利一요코미츠리이찌, 小林秀雄코바야시히데오 등의 신진작가들에게 금전적인 원조를 한다.

1925년 문화학원 문학부장 취임. 1928년 제16대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東京1구의 사회민중당 공인으로 입후보하나 낙선하였다. 그러나 1937년에는 동경시회의원에 당선하였다. 

태평양전쟁 중, 문예총후운동을 발안하여, 翼賛 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기에 전후, 공직추방의 철퇴를 맞았다. 1948년 실의 나날을 보내다 雑司が谷의 자택에서 협심증으로 사망한다. 

‘그 누구라도 전쟁에는 반대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협력해서 승리를 바라는 것이 국민의 당연한 감정이 아니겠는가?’라고 전후 본인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언급하였다.


父帰る】大正 6년(1917)에 発表된 일 막 구성의 희곡. 3번 영화화되었고, 또 무대에서도 상연을 한다. 발표 당시는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한 작품이었으나, 3년 후 大正 9년 (1920)에 市川猿之助에 의해 무대에 올려 져 절찬을 받았다. 이후 본 작품은 菊池寛을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시대는 明治 40년경. 가족을 버리고 가출했던 아버지가 초

라한 모습으로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와 차남, 딸은 따뜻이 맞아들이나, 빈곤과 싸우며 일가를 지탱하고 동생들을 중학교까지 보낸 장남 賢一郎켄이찌로오는 결코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집을 떠난다.

오열하며 애원하는 엄마의 호소에 맘을 바꾸고, 동생을 데리고 미친 듯이 아버지를 쫓는다. 


③ 久米正雄


長野県나가노켄上田市우에다시에서 출생. 아버지 由太郎유우타로오는 江戸출신으로 上田우에다 고등소학교 교장으로 上田에 부임해서, 正雄마사오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1898년 소학교에서 일어난 화재로 명치천황의 사진이 타버려, 그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을 하였다. 그래서 正雄는 어머니의 고향인 福島県후쿠오카켄 安積郡아사카군 桑野村쿠와노무라에서 자랐다. 외가의 할아버지는 中條政恒나까죠오마사츠네와 함께 安積 개척에 공이 큰 사람이었다.

安積아사카 중학교에서 열심히 俳句하이쿠를 공부하였고, 俳句의 세계에서도 유망한 신인이라 주목받았다. 무시험으로 제일고등학교 문과에 추천입학.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재학 중 成瀬正一나루세세이이찌, 松岡譲마츠오까유즈루 등과 제3차「新思潮」를 창간하고 작품을 발표하였다. 희곡「牛乳屋の兄弟」규우뉴우야노쿄오다이(1914年)으로 인정을 받았다. 「新思潮」신시쵸오 폐간 후는「帝国文学」테이코쿠분가쿠 동인이 되었다. 1915년, 夏目漱石의 문하생이 된다. 1916년 芥川龍之介, 菊池寛 등과 제4
 
차「新思潮」를 창간. 동년대학졸업. 久米에게는 中条百合子나까죠유리꼬라는 연애관계에 있는 여성이 있었다. 百合子의 할아버지는 久米의 외할아버지와 함께 安積아사카를 개척한 사이이고, 두 집의 사이는 아주 밀접했다. 百合子의 아버지 精一郎세이이찌로오는 久米가 대학에 들어갈 때 보증인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그해 말, 漱石가 갑자기 죽고 夏目家에 출입하는 사이, 漱石의 장녀 筆子후데꼬에게 사랑에 빠져 漱石의 부인 鏡子쿄오꼬부인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을 한다.

筆子가 동의하면 허락하겠다는 언질을 받았지만, 筆子는 松岡譲마츠오까유즈루를 사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누군가가 久米를 바람둥이, 성적 불능자, 성병환자라고 비방하는 괴문서를 夏目家에 보낸 이가 있었다. 久米는 자신이 筆子와 결혼할 예정인 것처럼 그린 소설 「一挿話」히토소오와를 『新潮』신쵸오지상에 발표 하자, 이에 격노한 鏡子부인은 결혼을 반대하였고, 筆子와의 결혼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되어버렸다.

1918년 久米는 실망한 나머지 일단 고향으로 돌아가나 4일 정도 머문 뒤 다시 상경해서는, 「受験生の手記」쥬켄세이노슈키 등을 발표한다. 대학수험의 실패와 실연의 고뇌를 서술한 것으로 같은 해의 단편집『学生時代』가쿠세이지다이에 수록되어 오랫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4월에 松岡와筆子의 결혼소식을 듣자,「夢現」유메우쯔쯔「敗者」하이샤「和霊」니기미타마 등, 2사람에 대한 증오와 복잡한 심경을 서술한 작품을 여기저기 발표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菊池가 측
 
은해서, 「時事新報」에「蛍草」호타루구사를 발표하게 해주었는데, 이 통속소설은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그는 통속소설을 적는다.

1922년 久米는 筆子와의 실연사건을 그린 소설「破船」하센을 『婦人之友』후진노토모에 연재하여 주로 여성독자들로부터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듬 해 1923년 게이샤출신의 奥野艶子오쿠노츠야꼬와 결혼하였다.

본인 스스로 통속소설의 대가가 되었지만, 예술소설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평론「私小説と心境小説」(1925年)에서 ‘톨스토이도 도스토예프스키도 결국 고급 통속소설이고, 私小説이야말로 진정한 순문학이다’고 논했다. 그렇지만 자신은 아내에 대한 배려 등으로 사소설을 적을 수는 없었다. 

1925년부터 죽을 때까지 鎌倉카마쿠라에서 거주하였다. 1932년 石橋湛山이시바시탄잔의 뒤를 이어 鎌倉카마쿠라의 지역선거에서 1위로 당선되었다.

제2차세계대전중은, 일본문학보국회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1945년5월 鎌倉 문인들의 장서를 바탕으로 川端康成카와바타야스나리들과 시작한 대여책방(전후에 출판사가 된다)「鎌倉文庫」카마쿠라분코의 사장도 맡았고, 문예잡지「人間」닌겐 대중소설지「文藝往来」분게이오오라이를 창간하였다. 鎌倉카마쿠라 펜클럽 초대회장을 맡아 활약. 菊池와의 우정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전후 松岡마츠오카와도 화해하고,『小説と読物』쇼오세츠토요미모노를 발판으로 夏目漱石賞을 창설해서 松岡와 함께 선고위원을 맡았지만 출판사가 도산을 해, 1회로 끝났다.

만년에는 고혈압으로 고생하다가 뇌일혈로 급사하였다.


2) 奇蹟派키세끼하


동인잡지 『奇蹟』(1912년 창간)에 모인 広津和郎히로쯔카즈오 · 葛西善蔵카사이젠조오들은 자연주의를 계승해, 일상생활에 밀착한 소설에 의해「사소설」을 정착시켰다. 『奇蹟』폐간 후는 주로『早稲田文学』와세다분가쿠에 작품을 발표했으므로 신와세다파라 불렸다.


① 広津和郎히로츠카즈오


1891년12월5일 東京 牛込우시고메 출생. 부친은 소설가 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오. 1898년 7세 때  赤城아까기 소학교에 입학. 이 해 어머니 須美스미가 27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사망을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글을 적기 시작하였고, 1905년 14세 때 잡지『女子文壇』죠시분단에 단문「不眠の夜」후민노요루를 투고하여 특별상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1908년 17세 때『微笑』비쇼오가「万朝報」요로즈노쵸오호의 현상소설에 당선, 상금 10円을 획득했다.

1909년 18세 麻布아자부 중학교를 졸업하고 早稲田와세다 대학 문과예과에 입학. 동기로 谷崎精二타니자끼세이지・日夏耿之介히나츠코오노스께 등이 있었다. 아버지 広津柳浪히로츠류우로오는 유행작가가 아니어서, 수입도 많지가 않아 가정형편은 늘 곤궁하였다. 和郎카즈오는 대학재학중에도 번역 등의 일을 하여 돈을 벌어야만 했다.

1910년 19세 早稲田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진학.

1912년 21세 잡지출판의 참고의견을 듣기 위해 舟木重雄후나

키시게오 등과 志賀直哉시가나오야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舟木重雄를 중심으로 葛西善蔵카사이젠조오・光用穆미츠모치키요시・相馬泰三소오마타이조오・峯岸幸作미네기시코오사쿠(후에 谷崎精二타니자끼세이지)를 중심으로 동인잡지『奇蹟』키세끼를 창간한다.

1913년 22세 早稲田 대학을 졸업. 생활이 어려워 살던 집에서 쫓겨나 麻布아자부 本村町모토무라쵸오로 이사를 하였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모파상의 『女の一生』온나노잇쇼오를 번역하여 출판을 하였다.

1914년 23세 보충병교육소집으로 3개월간 소집되었으나, 결핵의 의심으로 입원조치를 당했다. 柳浪류우로오가 결핵으로 새어머니와 함께 名古屋나고야로 요양을 갔고, 생활비를 벌기위해 毎夕마이유우 신문사에 입사를 하였다.

1915년 24세 하숙집 딸 연상의 神山ふく카미야마후꾸와 깊은 관계가 되고 고민을 한다. 毎夕新聞을 퇴사하고, 相馬泰三소오마타이조오의 소개로 植竹우에타케 서원 번역부에 입사했다. 宇野浩二우노코오지와 함께 三保松原미호노마츠하라로 여행을 하고, 톨스토이의 『戦争と平和』센소오또헤이와를 번역하고 퇴사. 広津柳浪의 작품집의 인세를 주기위해 名古屋의 아버지 집에 가서, 아버지를 知多치타 반도의 師崎모로자끼 해안에 전지요양을 하도록 하였다.

東京에 돌아와서 神山ふく카미야마후꾸와 거리를 두기 위해 宇野浩二우노코오지의 집에 기거를 하며, 鍋井克之나베이카츠유끼・沢田正二郎사와다쇼오지로・渡瀬淳子와타세쥰코・江口渙에구찌칸・永瀬義郎나가세요시로・広島晃甫히로시마코오호들과 교류를 가졌다.

 

1916년 25세 예비소집으로 3주간 소집을 당한다. 잡지『新潮』 편집자 中村武羅夫나까무라무라오로부터 문예평론 집필을 의뢰받고『文章世界』분쇼오세카이『時事新報』지지신뽀『読売新聞』요미우리신분등에도 집필하게 되었다.

神奈川県카나가와켄 江ノ島에노지마의 龍口寺류우코오지 부근에 神山ふく카미야마후쿠와 장남 賢樹요시키,  師崎모로자끼에서 부모를 모시고 집을 장만하였다.

1917년 26세 잡지『トルストイ研究』토루스토이켄큐우에「怒れるトルストイ」이카레루토루스토이를 발표, 톨스토이의 도덕・교훈을 강렬히 비판하였다. 잡지『中央公論』에「神経病時代」신케이뵤오지다이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18년 27세 神山ふく카미야마후쿠와 혼인신고. 장녀 桃子모모꼬가 출생하였다.

1919년 28세 잡지『中央公論』츄우오오코오론에「死児を抱いて」시지오이다이떼(죽은 애를 안고)를 발표. 아내 ふく와 별거, 아이들은 아내가 키운다.

1923년 32세 친구와 출판사를 만들고『武者小路実篤全集』을 출판하려하나 실패해서 거액의 부채를 안게 된다.

1924년 33세 「散文芸術の位置」(산문예술의 위치)를 잡지『新潮』신쵸오에 발표, 산문예술은 종래의 미학에서는 제어할 수가 없다고 주장.

1927년 36세 尾崎士郎오자끼시로・宇野千代우노치요의 권유로 伊豆이즈 湯ヶ島유가시마 湯本館유모토칸에 체재하면서 新潮社의 세계문학전집에 넣기 위해 전에 했던 모파상의 『女の一生』번역을 수정. 宇野浩二우노코오지가 정신에 이상을 보여 芥川龍之介아쿠타가와류노스께와 함께 斉藤茂吉사이토오모키찌의 진찰을 받도록 입원시킴. 芥川龍之介가 자살.

1928년 37세 부친 広津柳浪가 사망.

1930년 39세 婦人公論에『女給』죠큐우를 연재. 菊池寛과 中央公論社사이에 분쟁이 일어나 중간에서 조정 역할을 함.

1933년 42세 報知호오치新聞에『風雨強かるべし』(비바람 강해져야)를 연재.

1936년 45세 인민문고 강연회에「散文精神について」(산문정신에 관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암흑과 같은 사회 상황에 지지 않고 살아가는 정신이 산문정신이라고 주장.

1941년 50세 間宮茂輔마미야모스께와 朝鮮・満州를 여행. 朝鮮에서는 金史良을 만났고 満州에서는 개척촌을 시찰했다. 이 무렵부터 같은 世田谷세타야에 사는 志賀直哉시가나오야와 친해졌다.

1951년 60세 宇野浩二우노코오지의 권유로 松川事件의 피고들이 적은「真実は壁を透して」(진실은 벽을 뚫고)를 읽고, 松川事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53년 62세 宇野浩二와 함께 松川事件 제2심 공판방청을 위해 仙台센다이에 가서 사건현장을 시찰하였다. 松川事件 피고들의 무죄를 주장하는「真実を阻むもの」(진실을 저지하는 것)를 잡지『中央公論』에 발표. 松川事件은 2심에서 유죄판결이 나왔다.

1958년 67세 松川事件 대책협의회의 회장이 된다.

1959년 68세 松川事件의 최고재 판결에서 제2심의 판결은 파기되고 仙台高裁로 되돌려졌다.

1961년 70세 松川事件의 仙台센다이高裁 판결에서 피고전원에게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평생의 친구 宇野浩二우노코오지가 사망.

1968년 77세 심장발작을 일으켜 熱海아타미 국립병원에서 

사망. 


② 葛西善蔵카사이젠조오


문학을 지향해 상경해서는, 東洋토오요오대학과 早稲田와세다대학의 청강생으로 공부를 하던 중, 舟木重雄후나키시게오와 広津和郎히로츠카즈오를 알게 되고, 동인잡지 『奇蹟』키세끼의 멤버로 합류하게 된다. 1912년『奇蹟』창간호
 
에 「哀しき父」카나시키찌찌(슬픈 아버지)를 발표해 작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 후 한동안 고향과 동경을 왕복하면서 작품을 적었지만, 생활은 극도로 가난했다. 1919년 창작집『子をつれて』코오쯔레떼(아이를 데리고)를 新潮社신쵸오샤에서 간행하고,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는 있었으나, 가족을 부양하기에는 힘들었다.

1923년 지병인 천식요양을 위해 鎌倉카마쿠라의 建長寺켄쵸오지에 방을 빌려 생활을 한다. 식사는 근처의 음식점에 부탁을 했는데, 그때 배달을 한 사람이 招寿軒쇼오쥬켄의 딸 浅見ハナ
 
아사미하나
였다. 둘은 연애를 시작하고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마흔이 가까워지며 생활이 황폐해졌고, 집필도 거의가 구술필기에 의존하였는데 그 역할은 嘉村礒多카무라이소타가 맡았다.

말년은 동경의 世田谷区세타야쿠에서 보냈는데, 폐병이 심해져 1928년3월23일,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葛西의 작품은 거의가 자신의 체험에서 취재한 사소설이라고 해도 좋은 작품으로, 그곳에 그려진 빈곤과 가정의 문제는 진솔함에 의해 독자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한편 아내를 고향에 둔 채 다른 여성과 동거하고 아이도 낳았다는 것에 대한 비판은 당시에도 끊이지 않았고, 그 비판에 대한 반발이 葛西의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있다.


葛西의 문학에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역으로 그것을 즐기는듯한 묘한 매력이 있어, 그것이 독자들을 끄는 힘이었다.

보기 드문 주란, 생활파탄자라 말해지던 葛西였지만, 장례식에는 끊임없이 조문객이 조의를 표하였고, 영결식에는 200여명이 찾았다. 조사는  徳田秋声토쿠타슈우세이, 谷崎精二타니자끼세이지가 맡았고, 문단에서는 「葛西善蔵 유아양육자금」이 모여졌고, 志賀直哉시가나오야, 佐藤春夫사토오하루오, 室生犀星무로오사이세이라는 쟁쟁한 면면이 그 중심에 있었다. 고향 弘前히로사끼에서는 石坂洋次郎이시자까요오지로, 전후 국회의원이 되었던 津川武一츠가와타게이찌가 葛西 문학을 기리기 위해 진력하였다.










제 5 장  大正 · 昭和초기의 문학


제 1 절  프롤레타리아 문학


大正시대 말기부터 소화 초기에 관동대지진, 세계공황에 의한 경제불황 · 농촌공황이 연이어 일어나고, 사회불안이 더 심해졌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이러한 사회배경에서 태생하였다.『種蒔く人』타네마꾸히또의 창간(1921년)이 그 출발점이었고,『文芸戦線』분게이센센창간(1924년), 일본프롤레타리아 문예연맹의 결성(1925년)으로 점차 세력을 키워갔다.

昭和에 들어가서는 사회혁명이란 정치적 목표에 도움이 되도록 문학에 요구하게 되고, 나르프(일본프롤레타리아 작가연맹)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관헌의 탄압과 정치우선의 창작이론에 작가들이 따라갈 수가 없게 되어, 1934년에는 나르프가 해산되고, 조직적인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은 종식되었다.


1. 조직의 형성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회기구나 경제의 변동에 따라, 데모크라시의 풍조가 강하게 되고, 또 프롤레타리아의 증대에 의해 계급대립이 격하게 되어, 노동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일본도 그 흐름에 예외가 될 수가 없어 노동조합이 결성 되고, 노동쟁의는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상, 혹은 무정부주의 사상의 발달과 함께 ‘민중’이란 단어, 더 나아가 노동자 또는 ‘제4계급’이란 단어가 표면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제4계급이란 제3계급에서 파생된 말이다. 제3계급은 프랑스혁명 때의 부르주아를 말하는데, 혁명 당시 

귀족이 14만, 성직자 8만에 대해 부르주아는 2천4백만에 달했다. 제4계급은 제3계급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분리 형성되어진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1920년부터 개인주의 ·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민중예술이나 제4계급의 문학이 제창되어, 노동자 출신의 작가가 자신의 노동생활을 있는 그대로 그린 노동문학도 탄생하게 되었다. 

노동자의 세계적 연대를 강조하는 잡지『種蒔く人』타네마꾸히또도 창간되고, 구사상 · 구문예에 대한 혁신을 주장했다. 이렇듯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을 때, 1923년의 관동대지진이 일어났고 이를 빌미로 사회불안을 타파하기 위한 탄압이 격심해졌다. 이에 의해 사회주의 문학의 싹은 일시적으로 잘렸으나 점차 뿌리 깊은 문단의 세력으로 자리를 잡아 갔다. 


2. 조직의 확립


『種蒔く人』타네마꾸히또는 일시적으로 좌절되었지만 명맥이 
 
끊어지지 않고 다시 부활하여, 1924년 『文芸戦線』분게이센센으로 출발하였다. 이 잡지의 출현으로 다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발표무대가 생기고, 이듬해 1925년에는 『文芸戦線』그룹을 중심으로 일본프롤레타리아 문예연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1년이 못가서 일본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으로 개칭하고, 사상적인 통일과 진용의 쇄신을 꾀하였다. 그 뒤에도 정치이론이나 예술이론의 대립에 의해 몇 번이고 분열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1928년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3·15사건(3월15일날 행해진 공산당 일제 검거)을 배경으로 전일본무산자 예술연맹(나프)가 결성되어, 『戦旗』센키를 기관지로 좌
익문학의 거점이 되었다. 급진적인 경향은 『戦旗』로, 사회민주주의적인 경향은『文芸戦線』로 모이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戦旗』파와 『文芸戦線』파로 대립되었다. 하지만 운동의 중심은 점차 『戦旗』파로 흘러갔다.


3.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성과


초기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平林初之輔히라바야시하츠노스께 · 青野秀吉아오노스에키찌등의 비평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갔다.

특히 青野秀吉는 「목적의식론」에서 자연발생적인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목적의식을 가지는 문예의 자세에 관해 지표를 제시하였다. 나프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한 사람은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을 위한 길」(1928년5월『戦旗』발표)을 적은 蔵原惟人쿠라하라코레히또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문학을 주장하였다.

초기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작품으로는 黒島伝治쿠로시마덴지『渦巻ける烏の群』우즈마케루카라스노무레(소용돌이치는 까마귀떼),前田河広一郎마에다코오히로이찌로오『三等船客』산토오센캬쿠, 平林たい子히라바야시타이꼬『施療室にて』세료오시츠니떼 (자선치료실에서) 등이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서 戦旗파의 小林多喜二코바야
 
시타키지
의『蟹工船』카니코오센은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전형
적인 작품이다. 개인의 사상이나 심리는 거의 묘사되지 않고, 집단의 움직임이 다이내믹하게 그려져 있다. 그는 또 자신의 정치활동을 테마로 한 『党生活者』토오세이카츠샤를 적었다.
같은 戦旗파의 徳永直토쿠나가스나오의『太陽のない街』타이요오노나이마찌(태양이 없는 거리)도 당시 걸작이라고 평해졌고, 자신의 체험을 좌익사상에 의해 의미부여를 하면서 매우 빠른 템포로 장면 전환을 하여 대중적 효과를 얻었다.

文芸戦線파에서는 『セメント樽の中の手紙』세멘토타루노나까노테가미(시멘트 통 안의 편지)『海に生くる人々』우미니이쿠루히또비또(바다에 사는 사람들) 등을 적은 葉山嘉樹하야마요시키가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다. 『海に生くる人々』는 하급선원이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자신들의 행복을 쟁취하고자 하는 노력을 그리고 있고, 이 시대 초기의 대표작이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작품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는 문학작품이 정치의 우위성에 깔려있기 때문에 계급적 이데올로기만이 노골적으로 표면에 드러나서, 충분한 문학적 연소를 하지 못한 작품도 많았다. 즉 인간이 유형화되든지 혹은 매몰되어, 사건만 

 

두드러지는 그런 결점이 있었다. 사상적으로는 좌익문학에 공명한 사람은 동반자 작가라 불리었다.


【『蟹工船』】중편소설. 1929年『戦旗』에 발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작. 국제적 평가도 높아, 여러 나라에서 번역이 되었다. 1929년3월30일에 완성하여『戦旗』5월호・6월호에 발표하였는데, 검열에 대비해 예민한 부분은 미리 복자를 하였다. 6월호의 부분이 신문법에 저촉된다고 하여 발매금지처분을 받았다. 또 1930년7월에 小林는『蟹工船』으로 不敬罪로 추가 기소된다. 작품 중에 헌상품인 게통조림에 대해 ‘돌멩이 넣어버려! 신경 쓸 것 없어!’란 기술이 문제였다. 전후 1968년 거의 완전한 형태의 내용을 담은 『定本 小林多喜二全集』(新日本出版社)가 간행되었다.

이 소설에는 특정의 주인공이 없고, 蟹工船에서 혹사당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군상으로 그려
 
진 점이 특징이다. 蟹工船 「博光丸」핫코오마루의 모델이 된 배는 실제로 북태평양 게잡이 공선이었던 博愛丸하쿠아이마루(病院船을 개조한 배 )였다.


【『セメント樽の中の手紙』】단편소설. 『文芸戦線』1926년 1월호 발표. 시멘트 공장에서 분쇄기에 실족하여 돌멩이와 함께 갈려버린 애인을 그리워하는 소녀의 이야기. 억압받는 계급에 대한 동정과 의분이 주제인 소설.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듯한 시정이 넘치는 필치로 사회의 밑바탕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과 생존에 대한 의지를 그리고자 하였다. 단편이지만 강한 인상과 여운이 많이 남는 작가의 대표작.


제 2 절  예술파


昭和 초기에 한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또 한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해서 정치를 배제한, 문학 그 자체에 전념한 예술파가 있었다.


1. 신감각파


동인잡지 『文芸時代』(1924년 창간)에 모인 신진작가들을 신감각파라 불리었다. 横光利一요코미츠리이찌 · 川端康成카와바타야스나리 · 片岡鉄兵카타오까텟페이 등으로, 지적으로 재구성된 감각에 의해 현실을 파악하고자 했다.


1)横光利一요코미츠리이찌
 


새로운 문체를 시도한 『日輪』(1923)으로 신인작가로 등장하고『蝿』(1924),『機械』(1930) 등 실험적 수법에 의한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였다. 『紋章』(1934)에서는 자의식 과잉의 지식인과 행동적인 발명가를 대조시켜, 지식인 동요시기에 있어서의 심리를 조명하여 화제작이 되었다.

그 뒤,『旅愁』(1937- 미완)에서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대립을 테마로 하였다.


【『機械』】단편소설. 네임플레이트 공장에서 일하는 ‘나’라는 인물이 다른 2명의 공원과 심리적 갈등을 서술해 가는 형

식으로, 심리주의의 실천이란 면에서 주목을 받았다. 개인의 운명이 개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보이지 않는 ‘기계’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어 간다, 라는 인식이 제시되었다.


2)川端康成카와바타야스나리


横光利一요코미츠리이찌와 함께 신감각파를 대표하는 작가로 
 
川端康成가 있다. 大正시대부터 昭和의 전전・전후에 걸쳐 활약한 근현대 일본문학의 정점에 선 작가의 한명. 大阪 出身으로 東京帝国大学国文学科 졸업. 대학시절에 菊池寛키쿠찌칸에게 인정을 받아 문예시평 등으로 두각을 나타낸 후, 横光利一등과 함께 동인지『文藝時代』를 창간. 서양의 전위문학을 접목한 새로운 감각의 문학을 지향한 「新感覚派」의 작가로 주목을 받고, 시적, 서정적 작품, 심령・신비적 작품, 소녀소설 등 여러 가지 수법이나 작풍의 변천을 보여, ‘마술사’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伊豆の踊子』(1926)에서 청춘의 감상을 신선하고 아름답게 그렸고,『禽獣』(1933)에서는 비정한 시선과 투철한 감각에 의해 허무의 세계를 도출하였다. 그 연장선상에서『雪国』(1935- 37)이 그려졌다. 전후에도『千羽鶴』센바즈루(1949) 등에서 슬프면서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계속 추구하였다.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 것도, 일본적인 미의 세계를 계속 추구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수상강연에서 일본인의 사생관과 미의식을 세계에 소개하였다.

공사다망한 나날을 보내던 川端였으나, 1972년4月16일 밤, 유서도 없이 갑자기 72세의 나이로 가스 자살을 하고 말았

다.


【『伊豆の踊子』】단편소설. 제1고 학생인 20세의 ‘나’는 고아근성을 뿌리 채 뽑아버리기 위해 伊豆이즈로 여행을 떠난다. 유랑극단 일행과 下田시모다까지 길동무가 되고, 14세의 무희와 아련한 연정을 느낀다. 무희의 청순한 마음을 접한 후, ‘나’의 고아근성도  자신도 모르게 책가방에 눈물과 함께 씻겨내려 간다. 청춘 문학의 걸작.


2. 신흥예술파


신감각파의 흐름을 이어, 新潮社 계열의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것이 신흥예술파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할 목적으로 작가들이 결집한 것뿐, 특별히 명확한 문학이념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中村武羅夫나까무라무라오, 龍胆寺雄류우탄지유우 등이 있었지만, 도시생활을 표면적으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오히려 신인으로 참가한 井伏鱒二이부세마스지나 牧野信一마키노신이찌, 梶井基次郎카지이모토지로오들이 개성있는 문학을 개화시켰다.


1)井伏鱒二이부세마스지
 


처녀작『山椒魚』산쇼오우오(1923),『夜ふけと梅の花』요후께또우메노하나(1925),『屋根の上のサワン』야네노우에노사완(1929) 등의 초기의 가작에는 인생의 애수와 유머가 융화되어 있는데, 이것이 井伏의 작품에 일관된 톤이었다.

전후도 『本日休診』본지츠큐우신(1954- 55),『駅前旅館』에끼마에료칸(1959)가 호평을 얻었고, 『黒い雨』쿠로이아메(1965- 66)에서는 원폭에 대한 울분을 토했다.

『山椒魚』산쇼오우오는 1923년『幽閉』유우헤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으나, 수정 보필해서 1929년에『山椒魚』로 제목을 바꾸어 재발표된 단편소설이다. 한 마리의 도롱뇽이 계곡의 웅덩이에서 쾌적하게 지내는 동안, 머리가 너무 커져 나오지 못하게 되어 버린다. 도롱뇽에 가탁해서, 작자 자신의 심정을 그린 가작이다.


제 3 절  昭和 10년 이후 문학


1931년 만주사변이후 사회는 더욱 혼란해졌고, 민중의 불안도 증대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문학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昭和 10년대의 문학은 극심한 동요와 혼미를 더해 갔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으로부터 전향해, 작가로서의 양심의 모색, 일본의 전통으로 회귀 등 여러 가지 현상이 혼재하였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개시 이후는, 문학 그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이 되었고, 작가들은 징용되든지 전쟁협력을 강요받았다. 이런 암흑시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1. 전향문학


1933년에 小林多喜二코바야시타키지가 경찰에 의해 학살되고, 또 일본 공산당의 지도자 佐野学사노마나부가 전향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의 전향이 이어졌다. 전향문학이란 전향자가 적은 문학을 말하는데, 그 내용은 주로 전향에 따른 고뇌를 사소설 풍으로 토로한 것이었다. 

村山知義무라야마토모요시『白夜』뱌쿠야(1959), 立野信之타테노노부유끼『友情』유우죠오(1959)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 중에는 中野重治나까노시게하루『村の家』무라노이에(1959)같이 자기의 신념을 재확인하는 작품이나, 島木健作시마키켄사쿠『生活の探求』세이카츠노탄큐우(1959)처럼 자신을 재생시킬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작품도 있었다. 또 林房雄하야시후사오처럼 점차 파시즘으로 치닫는 작가도 있었다.


【『村の家』】단편소설. 1935년5월『経済往来』에 발표.

좌익작가 高畑勉次타카바타벤지는 치안유지법위반으로 투옥되
 
어, 2녀간 병・발광의 공포, 전향의 유혹과 싸워왔지만, 집행유예로 출소해  귀향하였다. 아버지 孫蔵마고조오는 온화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투옥중인 아들을 위해 마을의 생활을 하나하나 적은 편지를 보내거나, 몇 번이나 상경해서 아들을 면회해서 격려하고 옹호한 인자하지만 강단 있는 노인이었다.

아들을 마주한 아버지는 과거 및 현재의 마을의 상황을 설명하고는, 전향한 이상 붓을 꺾고 농부가 되어라는 말을 한다. 勉次벤지는 ‘잘 알겠습니다만, 역시 글을 적어야겠습니다.’라며 나직이 말을 한다.

「전향」을 자기의 생존의 근원으로 사고를 전환하고, 여기서 재출발의 에너지를 충전한 「전향소설의 백미」로 평가받은 소설.



2. 기성작가의 활약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신감각파의 두 조류가 문단을 2분하며 지배하던 시절, 기성작가는 침묵을 지켰다. 명치문학 이후의 문학을 부정하며 두 조류가 성립하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경향의 문학들이 쇠퇴하기 시작하자, 기성작가들은 기지개를 켜며 등장하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문예부흥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자기 본연의 작풍을 지키며 작품 생활을 계속 이어 온 작가에 谷崎潤一郎타니자끼쥰이찌로오와 島崎藤村시마자끼토오손이 있었다. 谷崎는 『蓼食ふ虫』타데쿠우무시『春琴抄』슌킨쇼오등을 
 
발표, 초기의 농염한 극채색 수법과는 다른, 미묘한 빛에 반사된 고전주의적인 미의 정점을 수렴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평생 사업이 된 『源氏物語』겐지모노가타리의 현대어역을 시작하였다.
한편 藤村은 명치유신 전후의 동란과 전환을 그린 불휴의 역사소설『夜明け前』요아께마에를 완성하였다. 그 후, 문단의 신세력이 쇠퇴함에 따라 침묵을 지키고 있던 대가들이 
 
창작활동을 재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永井荷風나가이카후우의 부활이 가장 빨라, 『つゆのあとさき』쯔유노아토사끼에서『濹東綺譚』보쿠토오키탄에 이르는 일련의 소설에서 농염한 관능의 그림을 펼침과 동시에 신랄한 문명비판을 뒤섞은 작품을 내놓았다. 徳田秋声토쿠다슈우세이는『仮装人物』카소오진부츠를 적어 투철
한 인간관조의 정점을 나타내었다. 志賀直哉시가나오야도『暗夜行路』안야코오로를 완결시켰다.



3. 전시하의 문학


전장에서의 병사의 모습을 그린 石川達三『生きてゐる兵隊』(1938)는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정부는 중일전쟁을 소재로 한 소설에는 엄한 제한을 두었다.

반면 火野葦平의『麦と兵隊』(1938)가, 전장의 실제 모습을 알고 싶어 하던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폭발적인 판매부수를 올렸다. 이런 연유로 정부는 작가들을 전쟁에 종군을 하도록 하였다. 작가들은 전쟁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소설이나 르포를 적었다. 일부 작가는 전쟁정책에 맞춘 내용의 소설을 적었는데, 이런 소설을 국책문학이라고 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이후는 작품을 발표할 장도 축소되어 문학은 거의 질식 상태에 빠졌다.


제 4 절  전후문학


1945년,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패전 후 금방 부활한 
 
것은, 전쟁 중에 발표의 기약도 없이 작품을 계속 적어왔던 노작가들이었다. 또 종전 프롤레타리아 계통의 작가들도 운동을 재출발했다. 문예잡지의 복간이나 창간도 연이어졌고, 전후파의 신인들도 계속 등장해서 전쟁 
중에 억압되었던 문학적 에너지가 일제히 분출되는 것 같은 양상을 보였다. 수년 후에는 제 3의 신인도 등장하였다.


1. 기성작가의 부활


전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志賀直哉시가나오야는 『灰色の月』하이이로노츠끼(1946)를 永井荷風나가이카후우는 전쟁 중 계속 적어서 축척해 둔『踊子』오도리코『勲章』쿤쇼오『浮沈』우끼시즈미(1946) 등을, 谷崎潤一郎타니자끼쥰이찌로오는 전쟁 중에도 원고를 계속 적어온『細雪』사사메유끼를 완성시키고(1948), 이어서『少将滋幹の母』쇼오쇼오시게모토노하하(1949)를 발표하였다. 正宗白鳥마사무네하쿠쵸오는『戦災者の悲しみ』센사이샤노카나시미(1946)를, 川端康成카와바타야스나리는『山の音』야마노오토(1949- 54),『千羽鶴』센바즈루(1949)를 그려 일본의 전통적인 미를 추구하는 자세를 보였다.


2. 신戯作파


전후의 도덕이나 기성의 문학관에 반발해서, 자학적 · 퇴폐적인 태도로 작품생활을 한 작가들을 신戯作파라 불렀다. 무뢰파라고도 한다. 織田作之助오다사쿠노스께는『土曜夫人』도요오후진(1946)을 발표, 또 지금까지의 소
 
설관에 반대하는 평론『可能性の文学』카노오세이노분가쿠(1946)를 적었다. 太宰治다자이오사무는『ヴィヨンの妻』비용노츠마(1947)『斜陽』샤요오(1947)『人間失格』닌겐싯카쿠(1948)를 적어 전후 세계에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坂口安吾는 
『白痴』하쿠치(1946),『桜の森の満開の下』사쿠라노코리노만카이노시타(1947), 평론『堕落論』다라쿠론(1946)에서 독자적인 반속정신을 서술하였다.


1)太宰治다자이오사무


青森県아오모리켄津軽츠가루의 대지주의 6남으로 태어난 太宰다자이는, 그 사실이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고 데카당스한 생활을 보내다, 전후는 다시 반세상적인 자세를 더 강화해, 희곡『冬の花火』후유노하나비(1946)에서 전후의 편승사상을 비판,『ヴィヨンの妻』비용노츠마(1947) · 『桜桃』오오토오(1948)에서 기성도덕에 대한 반발적 태도를 
 
보였다. 『斜陽』샤요오(1947)에서 몰락하는 화족을 통해 太宰 자신의 절망과 윤리적 이념을 그렸고, 『人間失格』닌겐싯카쿠(1948)에서는 인간에 대한 불신과 공포를 서술하고, 1948년6월13일에 玉川上水타마가와죠오스이에서 애인 山崎富栄야마자끼토미에와 투신자살하였다.



【『人間失格』】


1948년3월부터 적기 시작하여 5월12일에 탈고하였다. 太宰는 한 달 뒤인 6월13일에 투신자살하였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재롱꾼, 광대로 보이지만, 진정한 자신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한 남자의 인생을 그린 작품.

연재 최종회의 게재 직전인 6월13일 심야에 자살한 이유로 

이 작품은 ‘유서’와 같은 소설이라고 여겨졌다. 그렇지만 1998년5월23일에 유족이 발견한 200자 원고지 157매의 초고를 공개함으로 이 소설은 픽션으로 창조된 것을 알게 되었다.

참고로 이 소설은 新潮 문고판만으로도 누계 발행부수가 670만부를 돌파해, 夏目漱石の『こころ』와 몇 십 년 동안 1,2 등을 다투는 베스트셀러이다.


3. 전후파문학


전쟁의 암울한 세월들을 통렬한 체험으로서, 기성문학과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문학적 출발을 이룩한 자들이 전후파 문학이다. 1946년 창간된 동인지 『近代文学』킨다이분가쿠를 거점으로, 동인 荒正人아라마사토・平野謙히라노켄・本多秋五혼다슈우고・加藤周一카토오슈우이찌・小田切秀雄오다키리히데오 등의 평론활동에 유지되어 왔었다. 그들은 문학자의 전쟁책임의 문제에서, 전향문제, 정치와 문학, 주체성론, 세대론 등을 통해 근대개인주의의 확립을 설명하였다.

작품으로서는 다른 전후파 작가 앞서 데뷔한 野間宏노마히로시의『暗い絵』쿠라이에가 있다. 이 작품은 심리적 추구와 상징적 효과의 신선함으로 호평을 얻었다. 그 외에도 中村真一郎나까무라신이찌로오의『死の影の下に』시노카게노시타니, 椎名麟三시이나린조오의『深夜の酒宴』신야노슈우엔・『永遠なる序章』에이엔나루죠쇼오, 梅崎春生우메자끼하루오의 『桜島』사꾸라지마, 武田泰淳타케다타이쥰의『蝮のすゑ』마무시노스에등이 있다. 

또 전후파의 지반에서 三島由紀夫미시마유끼요의『仮面の告白』카멘노코쿠하쿠, 大岡昇平오오오까쇼오헤이의『俘虜記』후료오키『野火』노비등은 전후문학을 화려하게 채색할 결정체였고, 

혼돈과 고뇌를 반영하고 있다. 서양문학의 영향도 강했고, 묘사의 면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실험이 시도되었던 점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三島由紀夫는 그 후 다채한 재능을 발휘하는 활동을 했다. 『金閣寺』킨카쿠지가 대표작이다.


1)三島由紀夫미시마유끼요


1925년1월14일 東京 四谷요츠야에서 부친 平岡梓와 모친 倭文重시즈에의 장남으로 출생. 소설가・극작가・수필가・평론가・정치활동가・황국주의자. 전후의 일본문학계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사람인 동시에 노벨문학상후보가 되는 등 해외에서 널리 인정받는 작가.『Esquire』지의 ‘세계의 100인’에 선정된 최초의 일본인.

나이와 昭和의 연수가 일치하고, 인생의 고비와 활약이 昭和시대의 성쇠와 역사적 사건과 동일하기에 「昭和」시대가 내포한 문제점을 예리하게 조명한 인물로 말해지는 경우가 많다.

대표작は소설に『仮面の告白』카멘노코
 
쿠하쿠
『潮騒』시오사이『金閣寺』킨카쿠지『鏡子の家』쿄오꼬노이에『憂国』유우코쿠『豊饒の海』호오죠오노우미등, 희곡으로는『鹿鳴館』로쿠메이칸『サド侯爵夫人』사도코오샤쿠후진 등이 있다. 미려한 문체, 인공적 구축성이 넘치는 유미한 작풍이 특징이다.

말년에는 정치적인 경향이 강해져, 자위대에 체험 입대한다든지, 민병조직「楯の会」타테노카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1970년11월25일 楯の会 대원 4명과 함께 자위대 市ヶ谷이찌가야 주둔지를 방

문해 동부방면 총감을 감금하고 발코니에서 쿠데타를 촉진하는 연설을 한 후, 할복자살을 하였다. 이 사건은 세상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신우익이 탄생하는 등, 국내의 정치운동이나 문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金閣寺』】장편소설. 三島의 가장 성공한 대표작일뿐 아니라 근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의 하나.

金閣寺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학승이, 金閣寺를 방화하기까지의 경위를 1인칭 고백의 형태로 서술해 나가는 소설. 전쟁 중 · 후의 시대를 배경으로, 심한 말더듬이의 숙명, 자신의 삶 앞에 벽과 같이 우뚝 선 金閣의 미에 대한 저주와 집착의 상반된 심리와 관념이 치밀한 문체로 점철되어 있다.

그때까지 三島에 대해서 회의적이고 부정적이었던 문단의 주류파도 또 좌익계의 작가들도 칭찬 일색이었고, 명실상부하게 三島가 일본문학의 대표작가로서의 지위를 구축한 작품이었다.
 

『金閣寺』의 제재는, 1950년 7월2일 새벽에 실제로 일어난「金閣寺 방화사건」에서 취재한 것이었으나, 三島 독자적으로 인물조형, 관념을 구축해 문학작품으로 구성하였다.

1955년 9월부터 보디빌딩을 시작한 三島(당시 30세)는 ‘행위’의 의미를 모색하기 시작해 5년 전에 일어난 「金閣寺 방화사건」의 범인 林養賢하야시요오켄의 범죄행위를(미에 대한 반감) 미에 대한 행위로 간주함으로 三島 자신의 문제성, 문

학적 모티브를 담아 새로운 시도를 해 보았다. 창작 노트에는

林養賢는 ‘창작하지 않는 예술가, 범죄의 천재’라는 기술도 보이는데 이는 전후사회의 풍조에 위화감을 느낀 三島가 ‘범죄의 형태로 표출된 젊은이의 저항’에 친근감을 느꼈다고 佐藤秀明사토오히데아끼는 해설하였다.


4. 제3의 신인


일본에 1953년부터 1955년 무렵에 문단에 등장한 신인소설가를 제1차 전후파 작가・제2차 전후파 작가를 잇는 세대로 평론가 山本健吉야마모토켄키찌가 명명하였다. 安岡章太郎야스오까쇼오타로오・吉行淳之介요시유끼쥬노스께・遠藤周作엔도슈우사쿠 등을 대표적인 작가로, 제1차・제2차 전후파가 본격적인 유럽풍의 장편소설을 지향함에 대해, 전쟁 전의 일본의 주류였던 사소설・단편소설을 지향한 점이 특색이다.


山本는 1953년에 평론「第三の新人」다이산노신진을 발표하고, 당시순문학을 적었던 安岡야스오까・吉行요시유끼들의 동세대 작가를 총칭해서「제3의 신인」이라 호칭하였다. 安岡・吉行에 이어 庄野潤三쇼오노쥰조오・遠藤周作엔도슈우사쿠등이 차례로 芥川賞아쿠타가와쇼오을 수상하고 문단에서도「제3의 신인」을 하나의 세력으로 보게 되었다.


「제3의 신인」은 山本健吉에 의해 제창되었던 개념이고「제3의 신인」에 포함된 작가 개인의 작풍에 일관된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소설적인 작품이 많았고, 비정치적이란 공통적 경향이 때로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제3의 신인」의 작품은 일상 속에서 인간성을 

그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고,  사소설 계보를 잇고 있다. 제1차・제2차 전후파 작가(野間宏노마히로시, 大岡昇平오오오까쇼오헤이 등)은 험란한 전쟁체험을 직접 겪고, 극한상태에 있어서의 인간을 응시하는 시점에서 작품발표를 시작해,

1. ‘정치’와 ‘문학’ 에 대한 문제의식

2. 실존주의적 경향

3. 리얼리즘과 사소설부정


란 특징이 보이는데 반해, 「제3의 신인」들은 위의 특징이 전무하였다.

「제3의 신인」에 속한 작가들이 차례로 芥川賞을 수상하였는데, 芥川賞이 지금과 같은 최고 권위의 상이 되었던 것은, 1955년 후기에 수상한 石原慎太郎이시하라신타로오 이후이다. (遠藤周作엔도슈우사쿠는  전기 수상). 「제3의 신인」은 문단에서 거의 기대를 하지 않았고, 石原를 비롯한 大江健三郎오오에켄자부로・開高健카이코오타케시・北杜夫키타모리오등의 유력한 신인들이 뒤를 이어 계속 출현하였기에 「제3의 신인」은 전후파와 石原들의 사이에 끼어 매몰되어진 존재라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제3이란 말 자체도 가볍게 보는 어감이 없진 않다.)

吉行들도 이런 평가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도 않고, 자신들의 문학을 꾸준히 구축해 갔다. 사이덴스티커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그의 이름을 빗대어 「サイザンスカ」(그렇습니까?)라고 가볍게 흘러 넘기는 등 주변의 

관심을 오히려 부담을 느끼는 편이었다.

그 후 세상도 변했는지, 점차 제3의 신인의 작풍도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문예잡지『群像』군조오의 편집장 大久保房男오오쿠보후사오의 활약도 있었는데, 단편소설만 적었던 吉行・安岡에게 장편을 강권하기도 한 좋은 조력자였다.





















부 록


1. 大逆事件 


1910, 1911년 사회주의자 幸徳秋水코오토쿠슈우스이등이 명치천황 암살계획을 기도했다고 명치정부가 날조를 해서, 幸徳을 비롯한 전국의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를 체포, 기소, 사형판결을 내린 사건을 말한다. 또 幸徳秋水 사건이라고도 한다.

堺利彦사까이토시히꼬, 片山潜카타야마센 등이 「平民新聞」에서, 노동자중심의 정치를 요구하고, 민중들도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1910년5월25일, 信州신슈우의 사회주의자 宮下太吉미야시타타키찌 외 4명에 의한 명치천황암살계획이 발각되고 체포되었다. 

이후, 이 사건을 구실로 모든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에 대해 조사나 가택수사가 행해지고, 끊임없는 탄압을 정부가 주도, 날조한 사건. 패전후 관계자료가 발견되어, 암살계획에 조금이라도 관여・ 동조한 사람은 宮下太吉미야시타타키찌, 管野スガ칸노스가, 森近運平모리찌카운페이, 新村忠雄니이무라타타오, 古河力作후루카와리키사쿠 5명뿐이었으나 검찰은 명치천황 암살계획 용의자로 26명을 기소하였다.

1911년1월18일에 사형24명, 유기형2명 판결. 1월24일에 幸徳秋水, 森近運平, 宮下太吉, 新村忠雄, 古河力作, 奥宮健之, 大石誠之助, 成石平四郎, 松尾卯一太, 新美卯一郎, 内山愚童 11명이, 1월25일에 管野スガ 1명이 처형되었다. 특사무기형으로 옥사한 자는, 高木顕明, 峯尾節堂, 岡本穎一郎, 三浦安太

郎, 佐々木道元 5명. 가출옥한 자는 坂本清馬, 成石勘三郎, 崎久保誓一, 武田九平, 飛松与次郎, 岡林寅松, 小松丑治.

적기사건으로 有罪를 받고 獄中에 있었던 大杉栄, 荒畑寒村, 堺利彦, 山川均는 화를 면했다.


대역사건이후


사회주의운동은 이 사건으로 수많은 동지들을 잃었고, 한 동안은 운동이 침체되었다. 소위 말하는 겨울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徳冨蘆花는 秋水들의 사형을 저지하기 위해 형인 徳富蘇峰를 통해 桂太郎 수상에 탄원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고, 1911년1월 秋水가 처형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월에 1고의 웅변부 학생들의 강연회에 「謀叛論」을 강연해 커다란 소동이 있었다.

대역사건은 문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어, 石川啄木은 사건전후에 공판기록을 입수・연구하여「時代閉塞の状況」「A LETTER FROM PRISON」등을 집필하였다. 永井荷風는『花火』속에서「나는 내 자신이 문학자란 사실에 너무나도 심한 수치를 느꼈다. 이후 나는 내 자신의 예술의 품위를 江戸戯作者 정도까지 낮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서술했다. 


2. 청일전쟁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조선정부의 청군개입 요청은 일본에게 침략동기를 제공했다.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

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철수를 거부한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성환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이홍장(李鴻章)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下關]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은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과 랴오둥·타이완·펑후의 할양, 쑤저우[蘇州] 등 4개 도시의 개항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대 강국이 산둥 반도[山東半島] 부근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랴오둥 반도 포기를 권고해왔으므로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랴오둥 반도 반환의 보상으로 일본은 3,000만 냥을 더 얻었다.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

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3. 러일전쟁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 청일전쟁 결과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이 체결됨으로써 일본이 요동반도 영유를 확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삼국간섭을 주도함으로써 이를 좌절시키고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러·청 비밀동맹을 체결을 하였다. 또 독일의 자오저우만 조차를 계기로 1898년 여순과 대련을 25년간 조차, 만주를 세력권화하려 하였다.한국에서도 을미사변 이후 4개월 만에 아관파천을 성공시켜 친러정권이 수립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성될 때까지는 일본과의 타협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폈다. 그러나 북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이 만주로 파급되자, 러시아는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만주를 무력 점령하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철수를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1902년 1월 영일동맹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1903년 8월부터 개전에 이르기까지 양국은 여러 차례 만주와 한국 문제에 관하여 공식적인 교섭을 가졌다. 일본의 기본입장은 한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하는 대신,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은 인정하되, 기회균등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자국의 만주독점권과 아울러 중립지대(한국의 39° 이북) 설정 및 한국령의 전략적 사용불가 입장을 고수하였다. 전쟁은 2월 8일 밤 여순에 대한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일본은 9일 인천 앞바다에 있던 두 척의 러시아군함을 격침시킨 다음날인 10일에야 선전을 포고하였다. 여순 봉쇄에 성공한 도고(東鄕平八郞)함대는 5월 5일 요동반도에 상륙하고, 4월 말 한국을 거쳐 북진한 제1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진입하였다. 6월 만주군총사령부를 설치하여 총병력이 15개 사단에 이른 일본군은 9월에 랴오양을 점령하였다. 노기(乃木希典) 대장 지휘하의 제3부대는 1905년 1월 1일 여순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이어 3월의 봉천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육전을 사실상 마무리 지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본 역시 지탱할 여력이 없어졌다. 봉천전투 이래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할 전력을 상실, 종전을 서둘러야만 할 입장이었다. 1905년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러시아 역시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양국 사이에는 이제 강화가 불가피한 형편이 되었다. 이에 일본은 결정적인 승기(勝機)를 잡은 뒤 미국에 중재를 의뢰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전투가 바로 리바우(Libau)항을 떠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오느라 전력과 전의가 극도로 떨어진 발틱함대와의 대마도해전이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4시 45분,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연합함대의 도고 사령관은 24시간 계속된 해전에서 발틱함대를 격파,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Rozhestvensky,Z.P.) 제독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당시까지도 러시아 육군은 완전히 손상되지 않았고, 보급도 비교적 원활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포츠머스강화회의에서 러시아 측 대표 위테가 패전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러시아와의 대결에 있어 일본을 적극 지원한 

세력은 영국과 미국이었다. 이 점에서 구 소련학자들은, 러시아를 상대로 한 영국과 미국의 전쟁을 일본이 대리로 수행했다고 주장하였다. 대마도해전 직후 일본은 미국에 중재를 의뢰했고, 국제정세도 전쟁을 끝낼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의 대항을 위해 러시아 군사력이 약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미국 역시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강자로 전면에 나서는 것을 위험시하였다. 여기에서 양국 사이에 4주 만에 성립된 것이 9월 5일의 포츠머스강화조약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남만주에서 일본이 지배권을 확립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을사조약을 강요한 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얻지 못한 것을 청나라로부터 보상받으려고 하였다. 영·미가 일본을 지원한 이유가 동북아시아에서 러·일 양국의 상호견제를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일본으로 하여금 막자는 데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진 직후 일본이 선택한 배타적인 만주 진출은 즉각 영·미의 제재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은 결국 동아시아정세를 크게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세계대전으로 가는 세력구도의 형성을 촉진시킨 셈이었다.



4. 松川 사건 피고구제운동


1949년8월17일에 福島県후쿠시마켄의 일본국유철도 동북본선에서 일어난 열차왕래 방해사건. 용의자가 체포되었지만, 그 뒤의 재판에서 전원이 무죄로 판결 받았고, 진범인을 특정・체포하지 못한 미해결사건. 

처음 20名의 조합원(주로 공산당원)이 기소되어, 제1심에
 
서는 사형을 포함한 판결이 내려졌지만, 広津는 그들이 무죄
라 확신하였다. 제2심을 방청하고, 재판기록을 검토하고 또 관계자를 만나면서 고찰을 하였다. 그리고『松川裁判』(筑摩書房 1955년), 『松川裁判』(中央公論社 1958년), 『松川裁判の問題点』(中央公論社 1959년)등, 재판의 진행 문제점과 피고들의 무죄를 세상에 알리고, 피고구원활동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961년 전원이 무죄확정.


진범에 관해


수사당국은 처음부터 노동조합원의 범행이란 시나리오를 짜고, 그에 맞게 주변에 있던 소년을 별건 체포하여, 협박과 고문을 통해 자백을 강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20명의 피고를 기소하였다. 또 진범에 관한 목격증언도 다수 있었지만, 경찰서의 담당자는 오히려 진범을 안전하게 도망가도록 협력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행동을 하였다.

이 사건은 인위적으로 열차를 전복시킨 것이고 틀림없이 범인이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수사당국이 죄없는 피고를 자백의 강요에 의해 체포, 기소하고 14년간의 재판으로 피고 전원이 무죄가 확정되었지만, 그 동안 진범은 체포되지 않은 채, 사건은 시효가 지났고, 진상은 풀리지 않았다.

진범과 사건의 진상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논해지고 있다. 유력한 설은 ‘일본 공산당 지지층이었던 東芝토오시바 사원들의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GHQ(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 General Headquarters의 앞부분)와 경찰이 획책한 모략’

이란 설도 있다. 사고 직전에 현장을 통과할 예정이었던 화물열차의 운행정지, 경찰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현장에 도착한 점, 사건 후에 현장부근에서 수상한 인물을 목격한 남성의 의문사 등의 의문투성이의 부분이 있고, 이런 점들을 종합해서 모략의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다.




참고 문헌


日本文学史の指導と実際 1982년刊 明治書院

新日本文学史 2017년刊 文英堂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