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일본의 城


1. 城의 개요


■ 城의 정의
 

城이란 적이 쳐들어왔을 때 방어거점으로서 만들어진 구조물을 말한다. 전투거점임과 동시에, 식량・무기・자금의집적 장소이기도 하다. 주요한 城은 지휘관의 생활 터전이며, 정치나 정보의 거점이었다. 순수 방어용으로 산성을 건조하기도 하나, 주요 가도나 하천 등의 교통 요충지에 세우기도 하였다. 

유럽, 중국 등의 대륙에서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과 보루나 요새와 같은 무사의 전투 거점을 구별하여, 독일어는 Stadtmauer 과 Burg로, 영어에서는 city wall 과 castle 로 구별한다. 城이란 말은 중국에서는 전자의 성벽도시를 의미하는데, 일본에서는 성벽도시가 보급되지 않았기에 주로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 城의 기능

일반적으로 城은 다음과 같은 기능이 있다.


‣ 방어기능 

불의의 공격이나 전력이 약한 경우, 城에 들어가 방어를 한다.


‣ 지배의 거점

영지의 상징으로 건조하거나, 적지를 향한 지배지 확대의 전초기지로 활용한다.


‣ 군주의 주거

평상시에는 영주의 생활 터전이며 주민들의 생활 거점으로 사용한다.


2. 일본의 城


■ 개요

일본에서는 고대의 환호집락에서 근세의 돌담이나 天守城까지 다양하다. 막부 말기에 세워진 바다를 지키기 위한 포대도 城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중세 사회의 일본에서는 전투요원인 무사가 있었다. 다이묘大名가 거주하는 城에서는 가족도 내부에서 거주하였으며 시중드는 사람들도 같이 생활을 하였다. 

규모가 큰 城에서는 주위의 마을도 함께 둘러싼 외곽을 쌓기도 하였다. 일본 최대의 성은 에도江戸성으로, 1615년에 일국일성령이 발령되기 전에는 성은 각지에 다수가 존재하였으며, 요새와 같은 작은 규모의 성을 포함시키면 수만 개의 성이 있었다고 한다.


■ 역사
 

城이 문헌상에 처음 나오는 것은, 664년에 텐치天智 천황이 만든 水城으로, 이 시대에는 문헌에 나오지 않는 것을 포함해 다수의 성이 큐우슈우九州 북부에서 세토나이瀬戸内 해안에 만들어졌다. 또한 에미시蝦夷와의 전쟁이 이어진 동북지방에서는 7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타가多賀성, 아키타秋田성 등의 행정 거점을 겸한 성책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성들은 중국의 성벽도시를 본떠 만든 것으로 지방 거점 도시의 행정관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성벽 건축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울타리를 만드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하지만 율령제도가 무너지자 이런 성들도 함께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무사시대가 시작되면서 전투거점으로서의 협의의 성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중세의 일본에서는 평상시 거주지의 방어와, 전시의 방어용으로 험준한 산에 만든 요새로 성이 발달하였다. 전국시대 초기까지는 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압도적으로 후자의 산성이었으나, 야카타라고 불리는 전자도 실질적으로 성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전국시대 중기부터 성의 수는 비약적으로 증대해, 평지와 인접한 구릉에 만들어진 성과 평지에 만든 성이 주류가 되고, 방어에는 유리하나 정치적 거점으로서는 효율이 떨어진 산성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현재의 성을 이미지하는 天守의 형식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축조한 타몽多聞산성에서 유래되었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축조한 아즈찌安土성,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축조한 오오사까大坂성 등이 만들어지면서 일본의 성곽문화는 황금시대를 맞는다.

에도江戸시대에 들어서면서 일국일성령이 발령되어 많은 성들이 파괴되었다. 남은 성들도 天守 등이 화재 등으로 소실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부분의 藩이 재정난에 봉착하거나 막부의 눈치를 보아 재건된 예는 소수에 불과하였다.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가면, 1873년에 포고된 폐성령에 의해 파괴되거나 관리 자체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더욱이 일본 육군의 주둔지로 이용하기 위해 접수해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도시의 성곽은 대부분이 일본 육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 중에 미군의 표적이 되어, 공습이나 원자폭탄에 의해 나고야名古屋성, 와카야마和歌山성, 히로시마広島성 등, 많은 성곽이 소실되었다.

전쟁 후, 오래된 성(주로 天守)의 복원 공사가 많이 행해졌는데, 복원 목적은 대부분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것이었다. 그 중에는 외부만을 복원한 것, 또 고증 없이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라든지 天守가 없었던 성에 天守를 새로 새운 경우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현존하는 자료로 정확한 복원을 할 수 없는 경우는 건설을 허가하지 않고 있어, 더 이상의 모조 天守가 늘어나지는 않을 전망이다. 그리고 내부는 향토박물관이나 역사자료관으로 일반 공개가 늘어나고 있다.


3. 일본의 城의 구조


■ 쿠루와曲輪

해자나 토담, 돌담으로 둘러싸인 구획을 쿠루와曲輪라 하고, 성은 이 쿠루와曲輪를 여러 겹 겹쳐 세워 만들어진다. 방어의 중심이 되는 쿠루와曲輪는 혼마루本丸라 하고, 그 외에 니노마루二の丸・산노마루三の丸・야구라쿠루와櫓曲輪・미즈노테쿠루와水手曲輪・텐슈쿠루와天守曲輪・야마사토쿠루와山里曲輪・니시노마루西の丸 등이 만들어 졌다.

전국시대의 성의 대부분은 산꼭대기에 세워진 산성이어서, 쿠루와의 면적이 매우 협소하였다. 영주가 기거하는 야카타나 가신의 처소, 백성들의 마을은 산기슭에 지어져 외적이 

침공해 올 때에는 산성에 칩거하여 방어거점으로 이용하였다. 


‣ 혼마루本丸

성의 중심이 되는 쿠루와曲輪로서, 평상시에는 성주의 주거구역이었으며 전시에는 총사령부가 되는 구역이었다. 근세 성곽에서는 정사를 돌보는 관청인 고덴御殿이나 텐슈카쿠天守閣와 같은 건물이 세워진 구역이었다.


‣ 니노마루二の丸

혼마루本丸를 직접 방어하기 위해서 세워진 쿠루와. 무기, 탄약, 곡식이나 병사의 주둔지로 사용되었다. 평상시에는 혼마루本丸에 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고덴御殿 등도 지어졌다.

니노마루二の丸 이내를 우찌쿠루와内曲輪, 혹은 내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 산노마루三の丸

혼마루本丸를 간접적으로, 니노마루二の丸를 직접적으로 방어하는 쿠루와曲輪. 성의 외곽을 구성하는 광대한 영토를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평상시에는 가신들의 주택이나, 마구간 등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 야구라쿠루와櫓曲輪

이나 야카타의 문의 위, 혹은 성내에 설치한 감시, 방어를 위한 망루. 근세의 성곽에서는 1층에서 4층으로 된 흰색 칠을 한 건물이 많았고, 성내의 요소 혹은 성문의 위에 설치하였다.


‣ 미즈노테쿠루와水手曲輪

전시에 있어서 최대 문제는 음료수, 방화용수의 확보였다. 수원을 끊겨서는 성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여, 용수의 확보는 성곽 건설에 있어 최대의 관건이었다. 수원인 우물, 하천 등을 미즈노테水ノ手라 하고, 이것을 엄중히 방어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한 쿠루와曲輪를 미즈노테쿠루와水手曲輪라 한다.


‣ 텐슈쿠루와天守曲輪

텐슈카쿠天守閣는 혼마루本丸 내부에 설치하는 것이나, 텐슈카쿠天守閣가 다른 망루나 옹벽을 연결해서 독자적인 쿠루와曲輪를 구성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을 혼마루本丸와 구별하여 

 

텐슈쿠루와天守曲輪라 부른다. 


‣ 니시노마루西の丸

은퇴한 다이묘大名의 거처.


‣ 야마사토쿠루와山里曲輪

전국이 수습되고, 성곽이 전쟁목적보다는 성주의 궁전, 관청으로서의 역할이 중시되자, 전쟁과는 관계없는 정원, 연못, 차실 등을 만들어 풍류를 즐기기 위한 쿠루와曲輪가 만들어졌다. 이런 쿠루와曲輪를 야마사토쿠루와山里曲輪라 부른다. 일본 삼대 명원이라 하는 코오라쿠엔後楽園, 켄로쿠엔兼六園, 카이라쿠엔偕楽園은 야마사토쿠루와山里曲輪의 좋은 예이다. (각각 오카야마岡山城, 카나자와金沢城, 미토水戸城의 야마사토쿠루와山里曲輪)


 
 
 


■ 해자・토담・석담
 

성을 구성하는 방어시설의 기본은 해자・토담・석담의 3가지이다. 


‣ 해자

해자는 물로 채워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시설로, 물로 채운 해자 외에도 텅 빈 해자도 있다. 


‣ 토담

해자를 팔 때 생긴 흙으로 둑을 쌓아 외벽을 만든다. 토담의 상부에는 울타리를 만드는 경우도 있으며 경사면에는 가시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방지하였다. 

‣ 석담 

 
석담은 중세에 있어서도 성곽의 중요 부분에 일부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아즈찌安土 시대가 되면, 무거운 망루를 성곽의 가장자리에 세워야 하기에, 토담의 표면에 석재를 쌓아 강화한 석담이 발달하였다. 아즈찌安土성 이후는 토목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대규모의 석담 건조물이 건설되었다.


 야구라

비상시에 활로 응전할 수 있도록 몸을 감추고 활만 쏠 수 있게 만든 건물을 지칭한다. 문 위에 만든 것과 요새 위에 만든 것이 있다. 


 성문

성의 정면에는 남쪽에 오오테몽大手門, 반대편인 북쪽에
 
는 카라메테몽搦手門이 설치되고, 군사의 출입구로서는 코구찌虎口가 설치되었다. 오오테몽大手門이나 코구찌虎口의 바깥 편에는 해자나 울타리로 둘러싸인 작은 쿠루와曲輪를 만들어, 이를 우마다시馬出라 하였다.

우마다시馬出가 규모가 크면 우마다시쿠루와馬出曲輪, 데마루出丸라 하여, 하나의 독립된 쿠루와曲輪가 된다. 

적과 대면하는 코구찌虎口의 해자에는 필요에 따라 성내와 성외를 차단할 수 있게 설계된 다리가 설치되었다. 이동 방법으로서는 다리의 바닥에 바퀴를 달아, 주산과 같이 당기는 소로반바시算盤橋, 다리의 윗부분에 바퀴를 단 히끼바시引橋, 코구찌虎口의 기둥에 로프를 매어서 들어올리는 하네바시跳橋 등이 있다.


 텐슈天守

망루 야구라는 텐슈天守로 발전하였는데, 텐슈天守의 명칭은 불교에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성주의 야카타를 「殿主」「殿守」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텐슈天守가 가장 먼저 세워진 것은 1521년의 『호소카와료오케키』細川両家記에 기록된 이타미伊丹성의 텐슈天守이나, 본격적인 것은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久秀가 축조한 타몽多聞산성이라고 한다. 타몽多聞산성의 텐슈天守는 아즈찌安土성으로 이어지고, 이후 일본 각지에 텐슈天守가 지어지게 된다.

텐슈의 변천

 
 
 










 나와바리縄張

축성을 할 때의 기본 설계를 나와바리縄張 혹은 케이시径始라 하는데, 중심이 되는 것은 쿠루와曲輪의 배치였다. 나와바리縄張의 어원도 쿠루와曲輪의 배치를 실지로 나와(새끼줄)로 재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나와바리縄張의 기본적인 형식으로서는, 쿠루와曲輪를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の丸・산노마루三の丸 순으로 동심원상에 배치하는 방식과, 산이나 바다를 배후에 둔 형식 등이 있으나, 실지로는 복합적으로 지은 것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나와바리縄張는 크게 나누어 다음의 3종류로 분류된다.


‣ 린카쿠시키輪郭式

연못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어나는 모양을 연상시키는 형식. 혼마루本丸를 둘러싼 니노마루二の丸, 니노마루二の丸를 둘러싼 산노마루三の丸라는 식의 나와바리縄張. 사방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나, 성곽의 규모가 대형화될 수밖에 없는 형식이다. 야마가타山形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 렌카쿠시키連郭式

혼마루本丸와 니노마루二の丸를 병렬로 배치하는 나와바리縄張. 혼마루本丸의 측면이 노출되는 단점이 있다. 모리오까盛岡성 등이 이 형식이다.



‣ 테이카쿠시키梯郭式

혼마루本丸를 성곽의 한쪽에 배치해, 삼면을 다른 쿠루와曲輪로 둘러싼 나와바리縄張. 혼마루本丸의 뒷면은 보통 절벽이나 호수나 강 등의 천연의 방어설비가 존재하는 경우에 설치하는 나와바리縄張이다. 오카야마岡山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4. 대표적인 일본의 城


 일본의 名城


‣ 에도江戸
 

토쿠가와 장군가의 15대째 거성이었으며, 에도 막부의 최고 정치를 관장하는 관청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明治維新 때, 황실이 쿄오토京都에서 에도江戸성에 전거하여 에도江戸성 중심부의 서쪽이 皇居가 되었다. 평상시에는 皇居 부분에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나, 동쪽 편에 있는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の丸와 산노마루三の丸의 일부는 개방되어 있다. 남쪽의 皇居 外苑과 북쪽의 키타노마루北の丸공원은 상시 개방되어 있으며, 그 바깥쪽은 일반인이 이용할 수 있다. 

에도江戸에 처음으로 근거를 둔 무가는 헤이안平安말기부터 카마쿠라鎌倉 초기의 에도 시게쯔구江戸重継이었으며, 에도江戸氏가 15세기의 ‘관동의 소란’에 의해 몰락하자, 1457년에 우에스기上杉의 가신이었던 오오타 도오칸太田道灌이 에도江戸성을 축성하였다. 그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입성하고, 거성으로 사용하였다. 입성한 당초는 도오칸道灌이 축성할 당시의 모습 그대로의 비교적 소규모의 성이었으나, 1603년에 에도江戸막부를 열자, 에도江戸성 증축에 들어가,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の丸・산노마루三の丸 외에, 니시노마루西の丸 (현재의 皇居), 후키아게吹上, 키타노마루北の丸 등, 주위 16km에 이르는 구역을 본성으로 하고, 외곽 해자를 설치하여 대성곽으로 발전하였다. 공사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이 동원되었고, 완성을 한 것은 이에야스家康의 손자 이에미츠家光때인 1636년이었다. 이후, 200년 이상에 걸쳐 에도江戸막부의 중추로 기능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정치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 와카마츠若松
 

후쿠시마켄福島県 아이즈와카마츠시会津若松市에 있는 성. 관광 지명 또는 현지에서는 일반적으로 츠루가죠오鶴ヶ城라 하며, 문헌상에서는 쿠로카와죠오黒川城, 아이즈죠오会津城라는 명칭도 흔히 보인다. 전국적으로는 아이즈와카마츠会津若松城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와카마츠若松성은 구시가지의 남단에 위치하며, 성터는 츠루가죠오鶴ヶ城 공원이 되었고, 그 대부분이 나라의 사적지로 지정되어있다. 사적 외에 산노마루三の丸 터에는 육상경기장, 시영 수영장 및 박물관이 건립되었다. 

또 재건된 텐슈天守는 와카마츠若松성 향토박물관으로 운영중이다.

1384년 아시나蘆名 집안의 7대인 아시나 나오모리蘆名直盛가 쿠로카와黒川라는 야카타를 만든 것이 와카마츠
 
성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한편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는 아시나蘆名 집안과 끝없는 전쟁을 계속하였다. 1589년 마사무네政宗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제지를 무시하고 아시나 요시히로蘆名義広를 공격하여 쿠로카와黒川성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마사무네政宗는 1590년에 히데요시秀吉에 굴복하고 아이즈会津를 헌납하고 만다. 대신하여 쿠로카와黒川성에 입성한 것이 가모오 우지사토蒲生氏郷로 다이묘大名에 걸맞은 근세 성곽으로 개조하고, 마을을 정비하였다. 1593년에 7중의 텐슈天守가 완성되고, 이름을 츠루가죠오鶴ヶ城로 개명하였다. 이후 明治維新까지 이 성은 아이즈 마츠다이라会津松平氏의 거성이 되었다.


‣ 오다와라小田原

옛 지명 사가미노쿠니相模国, 현재 카나가와켄神奈川県 오다와라시小田原市에 있는 성.

원래 헤이안平安시대 말기, 사가미노쿠니相模国의 호족 도이土肥氏의 일족인 오바야카와 엔뻬이小早川遠平의 거성으로, 1416년의 우에스기 우지노리上杉氏憲의 난으로 도이土肥집안이 실각하고 오오모리大森氏가 쟁취하였다.

1495년, 호죠오 소오운北条早雲이 지배한 이래 5대에 걸쳐 남쪽 관동지방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59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천하통일의 마무리 작업으로 오다와라小田原를 정벌하여,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에게 하사한다. 

메이지明治 시대의 폐성령에 의해 성내의 건조물이 거의 다 파괴되고, 텐슈天守 자리에는 神社가 설치되었다. 그 후, 오다와라小田原 성지는 오다와라小田原 성지공원이 되었고, 텐슈天守는 1960년에 재건되었다.


‣ 나고야名古屋

옛 지명 오와리尾張, 현재 아이치켄愛知県 나고야시
 
古屋市
에 있는 토쿠가와 고산케徳川御三家필두의 거성.

오오사까성, 쿠마모트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의 하나로 지칭되는 성이다. 텐슈天守에 달려있는 킨노샤치호코金の鯱는 성뿐만 아니라 나고야시의 상징이기도 하다. 

제 2차 세계대전 전은 국보 31건을 포함해, 질과 양에서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는 히메지성을 능가하는 다수의 
 
건조물이 성내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1945년 5월 14일 미군의 B- 29 폭격에 의해 텐슈
天守를 포함해 거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오하리항尾張藩 시대의 건물은 6채뿐이다.

16세기 전반에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가 오하리尾張 진출을 위해 만든 야나기노마루柳ノ丸가 나고야성의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1532년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가 이마가와 우지토요今川氏豊로부터 쟁탈해서 한자가 다른 나고야那古野성으로 개명하였다.

노부히데信秀는 한때 이 성에서 거주하였고, 그의 아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이 성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뒤에 노부히데信秀는 후루와타리古渡성으로 옮기고 나고야성은 노부나가信長의 거성이 되었는데, 1555년 노부나가信長가 키요스清須성으로 본거지를 옮기게 되어 폐성이 되었다.

키요스清須성은 오랫동안 오하리尾張 지방의 중심지였으나, 세끼가하라関ヶ原전투 이후의 정세나, 수재에 약한 키요스清須의 지형 등의 문제로 이에야스家康는 1609년 9남 요시나오義直의 거성으로 나고야성을 축성하기로 하고 1610년 축성을 개시한다.

明治維新 후, 14대 藩主인 토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가 나고야성의 파괴와 킨노사치호코金の鯱의 헌상을 상소하였으나, 독일 공사 막스 폰 브란트와 육군 제4국장 대리 나카무라 시게토오中村重遠의 상소에 의해 성곽이 보존되었다. 그 후, 상기의 공습으로 나고야성은 소실되고 만다.

 

‣ 카나자와金沢

옛 지명 카가加賀, 현재의 이시카와켄石川県 카나자와시金沢市에 있는 성. 

1546년 해자, 울타리 등 성의 모양을 갖춘 사원, 오야마고보오尾山御坊가 건설되어, 카가노잇코오잇키加賀一向一揆로 지배권을 가지게 된, 혼간지本願寺의 거점이 되었다. 1580년에는 사쿠마 모리마사佐久間盛政가 이 지역을 쟁탈해, 카나자와金沢성이라 개칭하고 사용하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정권을 잡은 뒤,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에게 이 지역을 맡기고 오야마尾山성이라 개칭을 하였다. 1602년 텐슈天守가 낙뢰에 의해 소실되고, 대신 3층 야구라가 건조되었다. 이 무렵부터 카나자와金沢성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1898년 육군 제 9사단 사령부가 카나자와金沢 성지에 주둔하고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하였다. 1949년 신설된 카나자와金沢 대학의 캠퍼스로 사용되었으나 1995년 카나자와金沢 대학이 교외로 이전하면서, 카나자와金沢 공원이 되었다.


‣ 니죠오二条
 

수많은 사건의 무대가 된, 호화찬란한 장군의 성으로 유명한 쿄오토京都시에 있는 성.  성 전체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1994년에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일본 역사에 있어, 니죠오二条성이라 불리는 것은 다수가 있는데, 대대로 천하를 제패한 사람이 차지하였다. 

첫 번째는 무로마찌室町 막부 13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足利義輝의 거성이었고, 두 번째는 역시 무로마찌室町 막부의 15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끼足利義昭의 거성으로 오다 노부나

가가 만든 성. 세 번째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쿄오토京都에 체재할 때의 숙소로서 정비하고, 뒤에 황태자에게 헌상한 니죠오신고쇼二条新御所, 네 번째는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쿄오토京都에 체재할 때 숙소로 사용한 성을 모두 니죠오二条성이라 지칭한다. 그 중 현존하는 성은 네 번째의 성으로, 보통 니죠오二条성이라고 하면 이 성을 말한다.


‣ 오오사까大阪

오오사까大阪에 위치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국시대에 세운 성. 석담을 세워 건설한 혼마루本丸는 교묘한 방어기능이 있었다고 한다. 텐슈天守는 그림 자료에 의하면 5층으로 기와 등에 금박을 입힌 화려한 모양이었다고 한다. 히데요시秀吉가 생존 중, 니노마루二の丸와 산노마루三の丸가 건설되어, 3중의 해자와 운하에 둘러싸인 견고한 성이 완성되었다. 

축성자인 히데요시秀吉 자신은, 쿄오토京都에 쥬라쿠다이聚楽第, 후시미伏見성을 차례로 건설하여, 오오사까大阪성 보다는 쿄오토京都 쪽에서 거주하였다. 히데요시秀吉의 사후인 1599년, 히데요시秀吉의 아들 토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가 후시미伏見성에서 오오사까大阪성 혼마루本丸로 옮기고, 또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도 오오사까大阪성 니시노마루二の丸에 들어가 정무를 보았다.  

1603년 토쿠가와徳川 막부가 성립한 후에도, 히데요리秀頼는 오오사까大阪성에 머물며 셋츠摂津(지금의 오오사까大阪, 사까이, 코오베神戸의 일부)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1614년 이에야스家康가 이끄는 대군의 공격에 농성전을 행하였다. 이윽고 강화를 하는데 조건으로 산노마루三の丸를 파괴하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데, 니노마루二の丸의 해자까지 매립해 버려 오오사까大阪성은 완전 무장해제 되어버린다. 히데요리秀頼는 해자의 재건을 시도하나 강화 조건 위약이라 간주되어, 4개월 후인 1615년 여름에 오오사까大阪성은 소실되고, 토요토미豊臣 집안은 멸망하였다.

재로 변한 오오사까성은, 이에야스家康의 외손자 마츠다이라 타다아키라松平忠明에게 주어져, 1619년에 막부직할령으로 편입되어 이듬해인 1620년부터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의해 재건이 시작되어 1629년에 완성하였다. 토쿠가와徳川의 오오사까大阪성은 토요토미豊臣의 오오사까大阪성의 석담과 해자를 전부 파괴하고, 전체적으로 몇 미터나 높게 땅을 정지한 후, 한층 더 높게 석담을 쌓아서 토요토미豊臣 오오사까大阪성을 밟고 세워진 결과가 되었다.

그 후, 明治維新 때 막부군은 신정부군에 쫓겨 오오사까성으로 도주하고 장군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배로 에도로 도주하여 오오사까大阪성은 신정부군에 넘어갔다. 이 전후의 

 

혼란에 화재가 나, 성내의 건물들은 거의 소실되고 말았다.

1928년, 당시의 오오사까大阪 시장인 세끼 하지메關一는 텐슈天守의 재건을 제안하여 시민의 모금으로 150만 엔을 모아, 육군 제4사사 청사 이전과 텐슈天守 건설이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31년 철골 콘크리트에 의한 복구 텐슈天守가 준공을 하여, 오오사까大阪의 심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와카야마和歌山
 

와카야마켄和歌山県 와카야마시和歌山市에 있는 성. 토쿠가와 고산케徳川御三家의 하나인 키슈토쿠가와케紀州徳川家의 거성으로, 8대 장군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14대 장군 토쿠가와이에모찌徳川家茂를 배출하였다. 한때 텐슈天守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전쟁 때 소실되었다.

토라후스虎伏산에 건조된 산성으로, 북쪽에는 키노가와紀の川가 흘러 천연의 해자역할을 한다. 

고산케御三家의 거성에 걸맞게 대규모의 성곽이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최성기의 4분의 1의 면적에 지나지 않는다. 옛날 성내였던 장소에는 시청, 재판소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학교, 상업시설 등이 들어서 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유일한 동생 히데나가秀長는 1585년 키슈紀州 공격의 부 장군으로 참전하여 평정하는데, 그 공을 인정받아 키이紀伊・이즈미和泉 두 나라를 분할 받았다. 당시는 다른 한자인 若山라 불렸던 이 지역에 히데요시秀吉가 축성을 명하고, 본인이 직접 토라후스虎伏산을 성지로 선정하기도 하여 불과 1년 만에 완성시켰다.

그 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잡은 후, 그의 10남 토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가 1619년에 이 성에 입성하여, 고산케御三家 키슈紀州토쿠가와케徳川家가 성립된다.

1846년 텐슈天守에 낙뢰를 맞아 혼마루本丸의 주요 건물들이 전소하였다. 당시의 법도로는 텐슈天守 재건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고산케御三家란 명목으로 특별히 재건이 허가되어 1850년에 텐슈天守가 재건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廃藩置県)령에 의해 폐성이 되어, 많은 건조물이 해체 내지는 이축되었다. 그중에서 니노마루고덴二の丸御殿은 오오사까大阪성에 이축되어 1931년부터 오오사까大阪시 영빈관으로 사용되었으나, 1947년 실화로 소실되었다. 혼마루本丸, 니노마루二の丸 일대는 1901년에 와카야마和歌山성 공원으로 일반에게 개방되었다.

1935년 텐슈天守가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45년 미군의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958

년 텐슈天守는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 히로시마성
 

히로시마켄広島県 히로시마시広島市에 있는 성곽. 1589년 모오리 테루모토毛利輝元가 교통의 요충지인 오오타太田家의 삼각주에 축성을 하였다. 그 전까지는 모오리毛利씨의 거성은 요시다코오리야마吉田郡山성으로, 몇 번이나 적의 공격을 격퇴한 견고한 산성이었으나, 세상이 안정되자 정무를 돌보는 데는 협소하고 불편하여 새로운 성을 짓게 된 것이었다. 1599년에 완성된 히로시마広島성은 당시의 오오사까大阪성에 필적할 정도의 대규모의 성이라고 전해지나 상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의 세끼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패한 모오리毛利씨는, 쵸오슈항長州藩으로 밀려나고 대신하여 히로시마広島성을 차지한 것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였다. 하지만 그도 홍수에 의한 수복을 막부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좌천되고, 그 후 250년간 아사노浅野 집안이 이 성을 차지하게 된다.

원래 히로시마広島성은 내곽해자와 중간해자, 외곽해자가 있는 사방 약 1km의 광대한 성이었으나, 1911년 외곽 해자가 매립되고, 또 원폭 때 중간해자도 매립되어 현재의 규모가 되었다.

텐슈天守 등이 1931년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의 강렬한 폭풍과 열에 의해 건물은 한 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그 후 1958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외부가 복원되고, 내부는 현재 히로시마広島성 자료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쿠마모토熊本
 

쿠마모토켄熊本県 쿠마모토시熊本市에 있는 일본 삼대 명성중의 하나.

현재의 쿠마모토熊本성은 토요토미豊臣 시대 때인 1601년 카토오키요마사加藤清正가 축성한 후, 1632년 카토오 타다히로加藤忠広가 쫓겨난 후,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가 입성하여 이후 明治維新까지 호소카와細川씨의 거성이 되었다. 

明治維新 후는 쿠마모토熊本 병영으로 정부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1877년에 원인

불명의 화재로 텐슈天守가 소실되었으나, 나머지 건물은 무사하여 아직 현존한다. 1960년에는 텐슈天守도 재건되었다.


 에도江戸시대 이전의 텐슈天守가 현존하는 성

현재, 에도江戸시대 이전의 텐슈天守가 현존하는 성은 히로사끼弘前성, 마츠모토松本성, 마루오까丸岡성, 이누야마犬山성, 히코네彦根성, 히메지姫路성, 마츠야마松山성(岡山県高梁市), 마츠에松江성, 마루가메丸亀성, 마츠야마松山성(愛媛県松山市), 우와지마宇和島성, 코오치高知성 이렇게 12城 뿐이다.


‣ 히로사끼弘前
 

아오모리켄青森県 히로사끼시弘前市에 있는 성. 츠가루津軽평야에 위치한 성으로,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の丸・산노마루三の丸・욘노마루四の丸・키타노쿠루와北の曲輪・니시노쿠루와西曲輪 의 6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해자, 석담, 토담 등 성곽의 전용이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귀중한 성이다. 텐슈天守는 3층으로 에도江戸시대 후기에 재건되어 현존하고 있다.

에도江戸시대에는 히로사끼한弘前藩 츠가루津軽氏의 성으로, 츠가루津軽 지방의 정치, 경제의 중심이 되었다. 현재는 히로사끼弘前 공원으로 관광명소가 되었고, 히로사끼弘前시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텐슈天守와 벚꽃이 어울려져, 벚꽃이 아름다운 명소로도 유명하다.


‣ 마츠모토松本
 

나가노켄長野県 마츠모토시松本市에 있는 성으로, 텐슈天守가 국보로 지정되어있다.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の丸・산노마루三の丸가 거의 사다리꼴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나와바리縄張는 梯郭式+輪郭式으로 형성되어 있다.

전국시대 오가사하라小笠原씨가 요새를 만든 것이 기원이라고 전해져 온다. 그 후, 타케다武田의 침공을 받아 타케다武田의 지배를 거쳐, 토쿠카와이에야스徳川家康가 지배하게 된다. 에도江戸시대에는 마츠모토한松本藩의 거성으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1900년 경, 텐슈天守가 많이 기울어져 대대적인 보수작업을 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마루오까丸岡

후쿠이켄福井県 사카이시坂井市 마루오까쵸오丸岡町에 있는 성. 성은 마루오까丸岡 시가지의 동쪽에 위치하는데, 조금 높은 언덕의 주위를 5각형의 해자가 둘러싸 있다. 에도江戸시대에는 마루오까항丸岡藩의 거성이었다. 

텐슈天守는 중요문화재로 현존하는 텐슈天守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 추정된다. 텐슈天守 외에는 석담이 남아있다. 5각형의 해자는 현재 매립되었으나, 복원할 계획이 부상하고 있다. 1934년에 텐슈天守는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후쿠이福井 지진에 의해 파괴되어, 1955년에 부서진 폐자재를 사용해 원래대로 수복하였다.

 

‣ 이누야마犬山

아이치켄愛知県 이누야마시犬山市에 있는 성. 텐슈天守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별명이 하쿠테이白帝성이라 하는데, 삼국지의 유비가 임종을 맞은 것으로 유명한 白帝城에 연유해 에도江戸시대의 국학자 오규우 소라이荻生徂徠가 명명하였다고 한다.

1469년 오다 히로치카織田広近가 이곳에 요새를 세운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1537년에 오다 노부야스織田信康가 거성이었던 키노시타木ノ下성을 페지하고 현재의 위치에 성곽을 조영하여 옮겼는데, 현존하는 2층까지는 이 무렵 만들어진 것이라 추정된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개인 소유의 성이었으나 2004년 4월부터 재단법인 「犬山城白帝文庫」에 이관되었다.


‣ 히코네彦根
 

시가켄滋賀県 히코네시彦根市에 있는 성. 국보로 지정된 4성의 하나. 성의 형식은 連郭式이며, 성의 북쪽에 겐큐우엔玄宮園・라쿠라쿠엔楽々園이란 명 정원이 있다.

많은 가로를 배출한 후신다이묘譜代大名의 명문, 히코네항彦根藩 이이井伊씨 14대의 거성이었다. 1873년의 폐성령으로 많은 성들이 파괴되어가는 상황에 일본의 8, 17대 총리대신을 지낸 오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의 상소로 파괴되어지는 것을 면했다. 국보인 

텐슈天守를 필두로 많은 야구라, 문이 현존하고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토쿠가와徳川 사천왕의 한 사람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는 1600년 세끼가하라関ヶ原전투에서 그 공적을 인정받아, 18만석의 봉록을 하사받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의 거성이었던 사와야마佐和山성에 입성했다. 그런데 미츠나리三成의 거성이란 점이 싫어, 성의 입지조건으로서는 사와야마佐和山 쪽이 훨씬 좋았으나, 호반에 가까운 이소야마磯山(현재의 마에바라前原시)로 거성을 옮기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세끼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1602년 사망하였다. 그 뒤 가신들이 유업을 이어받아, 현재의 위치에 히코네彦根성을 건설하였다.

 















‣ 히메지姫路
 

효오고켄兵庫県 히메지시姫路市에 있는 성. 축성이래 전화를 피해온 덕택에 텐슈天守를 비롯해 많은 건조물이 현존하여, 그중 8채가 국보, 74채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고, 1993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흰색의 외벽이 두드러진 아름다운 성으로, 시대극을 비롯한 영화의 로케지로서도 유명하다. 때로는 에도江戸성을 비롯한 다른 성의 대역으로서도 촬영되고 있다. 

히메지姫路성을 제일 처음 축조한 사람은 1346년에 아까마츠 사다노리赤松貞範란 설이 가장 유력하다. 단지 그 시대에는 요새라고 불릴 정도의 소규모의 것이어서, 16세기에 쿠로타 시게타카黒田重隆가 축성한 것이 최초라고 하는 이설도 존재한다.

그후, 1580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이었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뒤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금의 효오고켄兵庫県 서부에 해당하는 하리마播磨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중심 거점으로서 히메지姫路성을 선정해, 근세 성곽에 걸맞은 체재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성곽은 히데요시秀吉 시대의 것은 아니고,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사위인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가 1601년부터 8년에 걸쳐 축조한 것이다.


‣ 마츠야마松山
 

오카야마켄岡山県 타카하시시高梁市에 있는 성. 성의 형식은 산성으로 코마츠小松산에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の丸・산노마루三の丸가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있다. 에도江戸시대의 마츠야마항松山藩 시대에는 산성이어서 불편하였기에 산록에 오네코야御根小屋라는 고덴御殿을 지어, 번주의 기거, 정무용으로 사용되었다.


‣ 마츠에松江
 

시마네켄島根県 마츠에시松江市에 있는 성. 마츠에松江 시가의 북부에 위치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오오하시大橋강을 해자로 하는 輪郭 連郭 複合式 성이다. 높이 30m의 텐슈天守는 모모야마桃山 양식의 텐슈天守로 축성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보존 되어 있고,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1960년에 혼마루本丸의 이찌노몽一ノ門 등 일부가 복원되었고, 1994년에 산노마루三の丸와 니노마루二の丸를 연결하는 문이 복원되었다. 그 후에도 여러 곳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 마루가메丸亀

날의 사누끼노쿠니讃岐国, 현재 카가와켄香川県 마루가메시丸亀市에 있는 성. 성의 형식은 輪郭式으로, 카메야마亀山 시가지의 남부에 위치한 카메야마亀山(표고 66m)를 이용하여, 일본에서 최고 높은 60m의 석담이 부채 형태로 펼쳐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와바리縄張는 거의 
 
사각형으로 카메야마亀山의 주위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다.

성 전역은 카메야마亀山 공원이 되어 있다. 오오테이찌노몽大手一の門・오오테니노몽大手二の門・고덴오모테몽御殿表門・나가야長屋가 현존해 있으며, 오오테이찌노몽大手一の門・오오테니노몽大手二の門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2004년 4월1일부터 카메야마亀山시에서는 스미야구라隅櫓・타몽多聞의 복원을 계획하고 이 건물이 완전 복원할 수 있는 옛 사진을 1,000만 엔의 현상금을 걸고 수집하고 있다.


‣ 마츠야마松山
 

마츠야마松山성은 에히메켄愛媛県 마츠야마시松山市 중심부에 있는 카츠야마勝山 산정에 혼마루本丸를 설치한 성곽. 텐슈天守는 연립식 성곽으로 현존하는 텐슈天守로서는 가장 역사가 짧다. 

1602년 카토오 요시아끼라加藤嘉明에 의해 축성을 개시하고, 카토오加藤는 이때 이 지역을 마츠야마松山로 부르기로 하고, 마츠야마松山란 지명이 공식적으로 탄생하였다. 축성 당시의 텐슈天守는 5층이었으나, 뒤에 3층으로 개축되었다.

텐슈天守는 1784년 낙뢰를 맞아 소실되었으나, 1854년 당시의 藩主 마츠다이라 가츠요시松平勝善에 의해 재건되었다. 그 후 폐성령에 의해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방화와 공습에 의해 두 번이나 소실되었다. 1960년대에 복원되어 현재에 이른다.

 

‣ 우와지마宇和島

에히메켄愛媛県 우와지마시宇和島市에 위치한 나와바리縄張가 梯郭式인 성. 토오도오 타카토라藤堂高虎에 의해 현재의 오각형의 나와바리縄張의 성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동쪽은 해자, 서쪽은 바다에 의해 방어되었으나, 현재는 해자도 바다도 매립되었다. 텐슈天守와 대문, 석담이 현존하며, 에도江戸시대에는 우와지마항宇和島藩의 거성이기도 하였다.


‣ 코오치高知

코오치高知성은 옛 지명 토사노쿠니土佐国, 현재 코오치켄高知県 코오치시高知市에 있는 성. 
 
성곽의 형식은 梯郭式 平山城으로 코오치高知 평야의 거의 중심에 위치하며, 강을 외곽 해자로 이용하였다. 현재의 성은 에도江戸시대 초기에 토사항土佐藩 초대 번주인 야마우찌 카츠토요山内一豊에 의해 착공되어 2대 번주 야마우찌 타타요시山内忠義 때 완성되었다. 

폐성령이나 2차대전 때의 공습에서도 살아남아, 텐슈天守・고덴御殿・오이테몽追手門 등 15채의 건조물이 현존하고,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Ⅳ. 일본의 정원


정원이란, 보고 산책하기 위해 수목을 심고, 분수・화단을 만드는 등 인공적으로 만든 시설을 말하는데, 일본에서는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 강・연못・언덕 등을 만들어 나무나 화초를 심어 놓은 것도 있다.


1. 일본 정원의 역사


■ 아스카・나라시대

일본에서 정원이란 말이 처음 나오는 것은, 니혼쇼키日本
 
書紀
의 스이코推古 천황 34년(626) 항목에서이다. 이 책에서 이 해에 소가노 우마꼬蘇我馬子가 죽었는데, 아스카飛鳥강의 호반에 있었던 우마꼬馬子의 집의 마당에는 작은 연못을 만들고, 연못에는 작은 섬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다. 이 정원이 유명하였다고 하는데, 광장으로서 실용적으로 사용되던 마당에 연못을 만들고, 작은 섬을 만들어 관상의 대상으로서 정원을 만든 것이었다.

또,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해졌을 대, 숭불을 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논란이 일어났지만, 숭불측인 소가蘇我씨가 결국 우세해, 아스카데라飛鳥寺가 건립되었다. 정원이 소가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정원의 기술도 백제로부터 전래되었다고 추정된다. 또 다른 기록은, 텐무天武 천황의 태자, 쿠사카베草壁태자의 요절을 애도해 지어진 詩가 만요오슈우万葉集 2권에 실려져 있는데, 이 詩에서 쿠사카베草壁 태자의 정원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이 있어 그 정원을 미루어 짐작을 할 수가 있다. 이 정원에도 연못이 있고, 연못 주위에는 바위로 장식을 하고 그 바위사이에 철쭉이 피어있다고 한다. 또 연못에는 작은 섬이 있어, 바다의 풍취를 자아내고자 했다. 이런 방식은 후대의 일본 정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한편 아스카飛鳥궁이나, 헤이제이쿄오平城京 터의 정원 발굴이 진척되어, 문헌에서는 얻을 수 없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헤이제이쿄오平城京에서는 길이 55m, 최대 폭5m의 길게 구비진 바닥에 자갈을 깐 연못이 발굴되어, 공적인 연회가 개최된 정원으로 주목되었다.

■ 신덴즈쿠리寝殿造의 정원

8세기말 수도가 헤이안쿄오平安京로 천도되는데, 쿄
 
오토京都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맑은 물이 풍부한 경승지였다. 가는 곳마다 숲이나 연못, 샘물이 있었으며, 삼면의 산들은 고생대에 속해 완만한 기복이 이어졌고, 또 분지에도 작은 구릉이 점재하였다. 이 고생대의 산하에서는, 아름다운 정원석과 흰 모래를 얻을 수가 있었다. 지형이나 재료 면에서, 정원을 만들기에는 최적지라 할 수가 있었다. 9세기는 천황의 이궁, 퇴위를 하여 훌륭한 정원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쿄오토京都의 북서쪽에 있는 오오사와大沢 연못은 사가嵯峨천황의 이궁으로서 만들어진 것으로, 북쪽 편에 작은 섬이 2개가 있고, 이 부근에 지금도 정원석이 산재한다.

10세기 중반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가 광대한 장원을 바탕으로 영화를 누렸다. 이 무렵은 ‘오래된 것’보다는 ‘현대의 것’을 찾기 시작하는 전환기로, 생활 자체가 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전래된 회화도 이윽고 일본화되어, 소위 말하는 ‘야마토에大和’가 성립된 것도 이 시기였으며, 한시와 더불어, 가나仮名로 적힌 문학작품이 적혀진 것도 이 시기였다. 귀족의 주택이나 정원에도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귀족의 주택은 신덴즈쿠리寝殿造라 불려졌는데, 넓은 것은 사방이 100m가 넘는 것도 있었다. 문은 동편이나 서편에 있었고, 남쪽은 넓은 정원이 만들어졌다. 즉 주택은 남향으로, 앞이 정원으로 구성되는 형태로 남문이 없었던 점은 중국의 형식과 다른 형식이었다. 정원에는 흰 모래가 깔리고 연중행사 의식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운데 문의 남쪽은 연못을 바라보고 츠리도노釣殿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납량, 달구경 시의 연회 등에 사용되기도 하고, 뱃놀이 때에는 출발지로 사용되었다. 


정토교 (浄土教)정원의 형성
 
헤이안平安 시대 중기(10세기) 이후, 불교는 국
 
가적인 것에서 사적인 것으로 변하고, 귀족의 개인 사찰이 증가하였다. 주택 안에도 불당을 세우고, 또 불당이 별장으로서의 기능도 겸했다. 후지와라노 미찌나가藤原道長의 호오죠오지法成寺, 후지와라노 요리미찌藤原頼通의 뵤오도오인平等院을 
비롯해 11세기에서 12세기를 통해 바로 눈앞에 극락정토의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시대의 풍조가 반영된 정원이 형성되었다. 
이 형식의 가람배치에는 연못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참배자는 남문을 지나 연못에 걸쳐있는 다리를 건너, 섬을 거쳐 사당이나 불당에 도착하도록 설계되었다. 화려한 사당의 탑이 연못에 비친 모습은 바로 극락정토를 연상시킨다고 믿었다. 
11세기 말부터 거의 80년간에 걸쳐 시라카와인白河院의 토바리큐우鳥羽離宮가 조성되었다. 토바는 헤이안쿄오平安京의 남단인 카모강에 인접한 풍광이 좋은 지역으로, 종래부터 별장지로 애용되었다. 이 지역에 동서 1.5㎞, 남북 1㎞에 이르는 이궁이 만들어졌다. 연못은 동서 600m, 남북 800m나 되었고, 여러 개의 섬이 배치되었다. 이는 시라카와인白河院이 자부심을 
 
가지고 만든 정원으로, 연못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주택과 안라쿠쥬우인安楽寿院 등의 당탑(堂塔; 예배의 대상을 모시는 사당)이 공존하는 정토형식의 구성되어 있다. 이런 정토형식의 건축과 정원은 12세기 초기에는 쿄오토京都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지방의 히라이즈미平泉에서 만들어졌고, 현재도 이 정원의 유적을 찾아볼 수가 있다. 후지와라노 모토히라藤原基衡가 만든 모오츠우지毛越寺는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새로운 돌담도 발굴이 되었다. 또 모토히라基衡의 부인이 만든 관자재왕원, 딸이 만든 시라미즈白水 아미타당은, 정원을 발굴, 복원해서 일반 공개되고 있다. 

일본의 무가정치를 제일 처음 시작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도, 카마쿠라鎌倉에 정토식 정원의 형식인 에이후쿠지永福寺의 정원을 만들었다. 13세기 초기에는 쿄오토京都의 북서쪽에 사이온지 킨츠네西園寺公経가 사이온지西園寺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절이면서도 킨츠네公経의 별장이기도 하였다. 큰 연못을 중심으로 많은 사당과 주택이 배치되었는데, 14세기 

 

말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 장군의 것이 되면서 키타야마덴北山殿 또는 키타야마北山 산장이라 불리고, 유명한 금각이 건립되었다. 요시미츠義満의 사후, 그의 법명을 따라 로쿠온지鹿苑寺(통상 金閣寺)로 불리게 되었다.


선원禅院의 정원
 

12세기말 송나라로부터 선종이 전해졌는데, 선종사원의 양식이나 정원은 한 세기를 거쳐 겨우 일본식으로 소화되면서 정착되었다. 이 시대의 중심인물이 무소오夢窓 선승이었다. 무소오夢窓 스님은 자연을 사랑하여 가는 곳마다 명 정원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사이호오지西芳寺의 정원은 선종의 세계관으로 구성된 걸작이라 평해진다. 이 정원이 일본의 정원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절은 산의 기슭에 만들어지고, 연못과 그 위의 산의 사면을 이용한 선사의 정원으로 나누어진다. 또 이 선사에서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어, 정상에 슈쿠엔테이縮遠亭란 휴식을 위한 정자가 있었다. 연못에는 3개의 섬이 있고, 섬에는 흰 모래가 깔리고 소나무가 심겨졌으며, 정자가 있었다. 


료오안지龍安寺의 정원

14세기 말부터, 5산을 중심으로 선승들 사이에 문학
 
이 성행하고 또 송나라로부터 수묵산수화가 전래하여, 귀족들을 포함하여 시모임을 위한 서클이 만들어졌다. 이 서클 모임의 장소로 선사의 서원이 사용되는 일이 많았고, 따라서 서원의 정원이 자연스럽게 발달하게 되었다. 이 작은 서원의 앞뜰의 작은 공간에, 자연의 산수를 응축한 정원을 만들었는데, 이는 수묵산수화의 기본과 같은 성격이었다. 바위를 2, 3개 겹쳐 산 또는 폭포를 나타내고, 모래로 강이나 바다를 상징하고자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쿄오토京都의 다이토쿠지大徳寺 다이센인大仙院의 정원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이 이상 생략할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재료를 단순화한 료오안지龍安寺의 정원과 같은 걸작도 탄생하였다. 

다이센인大仙院의 정원은 서원의 동편에 위치하며, 100㎡ 정도의 넓이의 정원에 중앙 부분에 잔디를 심고, 바위산을 연상시키는 2단의 돌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흰 모래로 표현하고 있는 강에는 돌다리를 걸쳐 바위섬을 만들었다. 이는 모두 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구성이라 하겠다.

다이센인이나 료오안지의 정원은 모두 카레산스이枯山水라 부르는 기법으로, 물을 사용하지 않고 물의 느낌을 가지게 하는 데 특징이 있다. 이는 정원에는 물이 불가결한 것이란 사고가 근저에 있다. 일본에서는 정원을 山水라고 부르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다도 정원의 발생

15세기 후반부터 쿄오토京都, 사까이의 서민들 사이에 다도가 유행했다. 차를 마시고, 또 다기를 감상하며 주객의 사교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센노리큐우千利休의 말년에 이르러 초암풍의 다도는 완성되었는데, 전원・산간의 정취를 내는 것을 주제로 하여 차실은 농가를, 정원은 산사의 오솔길의 정취를 표현하고자 했다. 

수목은 산에 있는 상록수를 심었으며, 인공적 가미를 가장 금기시하였다. 마을에 있는 나무도 사용하지 않고, 인공을 피하고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표현하고자 했다. 다도 정원의 가장 핵심이며 기본 골격은 징검다리와 쵸오즈바찌手水鉢 이며, 나중에 석등이 밤의 다도 모임을 밝히는 조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쵸오즈바찌手水鉢나 석등은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옛것을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리고 다도 정원은 오랜 기간 비바람을 맞아 풍화되어 이끼가 생기는 그런 고풍의 취미를 즐기는 공간이었다. 다도 정원은 로지露地라고 하여, 다실로 가는 ‘길’을 의미한다. 로지는 다실에 가는 길이여서, 징검다리를 따라 걷게 만들어져 있다. 어디까지나 걷기 위한 정원이지, 감상하는 요소는 아니었다. 서민들에 의해 육성된 다도는, 센노리큐우의 제자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나 코보리 엔슈우小堀遠州와 같은 무사들에 전해질 무렵에는 내용이 적잖이 변용되었다. 로지는 넓은 다이묘의 저택 안에 만들어졌기에 한층 넓어졌다. 넓은 로지는 도중에 울타리를 하나, 둘 만들어 변화를 주었고, 또 감상의 소지도 충분히 많아졌다. 평지에 가까운 로지가 언덕, 개울이나 연못까지 만들고, 또 석등이 중요한 볼거리로 된 것도 이 시기였다. 여기에 신덴즈쿠리식 정원의 전통이나 서원 정원의 흐름이 합류하여 만든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 코보리 엔슈우小堀遠州였고, 정원으로는 카츠라리큐우桂離宮의 정원이 현존한다.
 
 


회유식 정원의 유행 -  다이묘大名 정원

17세기 초,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 전국의 다이묘大名를 통제하기 위해 산킨코오타이参勤交代라는 제도를 고안하였다. 이는 1년은 에도江戸에서 장군을 보필하고(参勤), 그 후 1년은 자신의 영지에 돌아가는(交代) 것으로 다이묘들의 모반 등을 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를 위해서 다이묘들은 에도江戸와 영지, 양쪽에 정원을 가진 저택을 만들었다. 에도江戸에 만들어진 정원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코이시가와 코오라쿠엔小石川後楽園이 있다. 이 정원은 토쿠가와 미츠쿠니徳川光圀가 명나라의 朱舜水를 초빙하여 설계하는데 참가시키기도 하여, 중국 ‧ 유교적인 취향이 농후하다. 이 정원은 연못을 회유하면서 감상하게 만들어져 있고, 정원 내의 경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경승지를 모티브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경관을 한층 더 즐기기 위해서 휴게소로서의 다실이나 사당을 세우고, 순로에 따라 회유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17세기 중기에 들어가면 쵸오닌町人의 문화가 꽃피고, 화려한 풍조가 유행하는 시기를 맞이해, 넓게 잔디를 깐 밝은 정원이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와 같이 연못이나 개울에도 석담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바위를 사용할 때에도 스테이시捨石라고 하여, 요소에 1개만을 버려둔 것처럼 보이게 배치하였다. 둥근 형태의 바위가 애호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세기 초, 오카야마 항슈岡山 藩主 이케다 츠나마사池田綱政가 14년의 세월에 걸쳐 만든 오카야마岡山시의 코오라쿠엔後楽園은, 잔디와 연못을 주축으로 한 개방적인 공간이 편한 느낌을 주는 정원으로, 현재 일본의 3대 명원으로 손꼽히고 있는 명원이다. 

 
 









시코쿠四国 타카마츠시高松市의 현재 리츠린栗林 공원인 리츠린소오栗林荘도 역시 다이묘大名의 별장으로 만들어진 정원이었다. 이 리츠린소오를 조성한 마츠타이라松平씨가 미토水戸의 토쿠가와케徳川家를 계승하였을 때, 코이시카와 코오라쿠엔小石川後楽園을 현대풍으로 개조를 한 것도 같은 18세기 초기 무렵이었다. 같은 시기에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가 만든 에도의 리쿠기엔六義園은 와카和歌 취향이 물씬 풍기는 밝은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2가지의 특징이 나타난다. 첫 번째는 원예의 유행이 두드러졌다. 에도
 
에서는 한 지역이 화원으로 가득 차, 에도 시민의 명소가 되었다. 이런 풍조는 다이묘의 
정원에도 파급되어, 코이시가와 코오라쿠엔小石川後楽園이 다시 개조되고 정원 내에 화초가 무성하게 되었다. 또, 에도의 스미다가와隅田川의 동편인 무코오지마向島에는 쵸오닌町人들이 만든 햣카엔百花園은 화초로만 구성된 상업적 영업을 하는 정원이었다.
둘째는, 다이묘 정원으로 서민들에게 개방된 정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미토水戸의 카이라쿠엔偕楽園이나 시라카와白河의 난코南湖가 대표적인 정원으로 들 수가 있다. 서민이라고 해도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의 공원으로 향하는 효시가 된 점에서 의의가 있다.


메이지明治 ‧ 타이쇼오大正 ‧ 쇼오와昭和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가면 서양의 영향으로 생활양식이나 건축이 변하고, 따라서 정원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옛 다이묘나 정부의 고관, 신흥 실업가들이 잔디에서 연회모임을 갖기 위해 대규모의 정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896년 야마가타 아리토모
 
県有朋
에 의해 쿄오토京都의 난젠지南禅寺의 서편에 만들어진 무리안無鄰庵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정원을 시공한 오가와 지헤이小川治兵衛는 그 후, 헤이안 진구우 신엔平安神宮神苑, 오오사까大阪의 스키토모케住友家정원, 나가하마長浜의 케이운칸慶雲館 정원 등의 명원을 만들었다.

타이쇼오大正에서 쇼오와昭和에 걸쳐서는 소정원 시대로 접어든다. 소정원은 자연주의의 정원으로 꾸미기는 곤란하여, 만든 이의 주관이 뚜렷한 조형적, 장식적인 정원이 만들어졌다. 화가인 야마모토 슌쿄山元春挙와 조원가 모토이 마사고로本位政五郎가 만든 오오츠시大津市의 로오카 센스이소오蘆花浅水荘는 문인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고 말해질 정도로 풍류가 있는 정원을 만들었다.

타이쇼오大正 시대에는 조원학이 일어나, 정원협회를 중심으로 옛 정원을 연구하고, 새로
 
운 정원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쇼오와昭和에 들어와서는 2가지의 두드러진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첫 번째는 사원에 많은 카레산스이枯山水를 만든 시게모리 미레이重森三玲로, 
 
자연주의적인 정원을 비판하면서 상징적인 정원을 건설하였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쇼오와昭和의 초기에 이이다 토오키飯田十基가 추진한 잡목의 정원으로, 그 후 오가타 켄조오小形研三에 계승되어, 도시의 인공화와 함께 급성장하였다. 2차 대전 이후, 건축의 근대화에 따라 공공 건축의 정원이 더욱 발달하였다. 나까지마 켄中島健의 일본예술협회 회관의 정원, 이케하라 켄이찌로오池原謙一郎의 이리야마찌入谷町 미나미南 공원 등이 대표적인 정원으로 손꼽힌다.


2. 일본의 유명한 정원

 

■ 지쇼오지慈照寺 정원

지쇼오지慈照寺는 쿄오토京都시에 있는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를 대표하는 임제종의 사원이다. 통칭으로는 긴카쿠지銀閣寺라 칭하는 이 사원은, 무로마찌室町막부 8대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에 의해 창립되었다고 한다. 요시마사義政가 조성한 누각 건축인 관음전을 긴카쿠銀閣라 하는 데서, 관음전을 포함한 절 전체를 긴카쿠지銀閣寺라 하게 되었는데, 보통 이 이름이 통용되고 있다. 킨카쿠지金閣寺가 금박을 입힌 것에 반해 이 절은 금박이나 은박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사원의 정원은 긴쿄오錦鏡 연못을 중심으로 한 회유식 정원이다. 사이호오지西芳寺 정원을 모방해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에도江戸시대
 
에 개조, 수리를 하여 창건 당시의 흔적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고 한다. 긴샤단銀沙灘, 코오게츠다이向月台라고 불리는 2개의 모래 더미도, 지금의 형태가 된 것은 에도江戸시대 후기라고 한다. 

한편 히가시야마東山 산기슭의 카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은 1931년에 발굴된 것으로, 무로마찌室町 시대의 면모가 남아 있다고 한다.


■ 난젠지南禅寺 킨지인金地院 정원

난젠지는 쿄오토京都에 있는 임제종 남선종파의 대본산의 사원이다. 카메야마亀山 법황이 창건하고, 초대 주지는 타이메이大明 국사라 한다. 황실의 발원에 의한 선사로서는 일본에서 최초의 사원이며, 일본 선사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격식을 자랑하던 절이다.

킨지인金地院 정원은 일명 츠루가메鶴亀 정원이라고도 하며, 스우덴崇伝이 토쿠가와 이에미츠徳川家光를 위해 지은 정원이다.  조성한 이는 코보리 엔슈우小堀遠州인데, 전국적으로 엔슈우 작품이라고 하는 정원은 많으나, 자료가 남아 있는 것은 이 정원이 유일하다. 모모야마桃山 시대의 풍격을 지닌 에도江戸 초기의 대표적인 카레산스이枯山水 정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카이라쿠엔偕楽園
 

카이라쿠엔偕楽園은 이바라키켄茨城県 미토시水戸市에 있는 일본 정원으로, 오카야마岡山의 코오라쿠엔後楽園, 카나자와金沢의 켄로쿠엔兼六園과 함께, 일본 3대 명원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99년 7월 인접한 센바千波공원과 합쳐, 명칭을 카이라쿠엔偕楽園 공원으로 통일하여, 시가지 인접 공원으로서는 면적이 300헥타르로, 뉴욕시의 센트럴 파크에 이어 세계 2위의 면적을 자랑하는 공원이다.

이 정원은 1842년 7월, 미토항水戸藩 제9대 한슈藩主 토쿠가와 나리아끼徳川斉昭에 의해 조원되었다. 나리아끼斉昭는 센바千波 호수에 인접한 산을 깎아 코오도오칸弘道館에서 문무 수행을 하는 무사들의 휴양지로, 또 백성들과 함께(偕) 즐기는(楽) 장소로 만들고자 偕楽園으로 

명명하였다. 그 이름의 정신에 걸맞게, 매월 3, 8일에는 백성들에게도 개방이 되었다. 그 정신을 이어받아, 현재도 카이라쿠엔偕楽園은 다른 유적지와는 달리 무료로 개방을 하고 있다.

카이라쿠엔偕楽園은 원내에 100종, 3000그루의 매화나무가 있는데, 매년 2월 하순부터 3월 하순에 걸쳐 매화축제가 열리고 있다. 또 원내에는 코오분테이好文亭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 이름 또한 매화의 이명인 ‘好文木’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 켄로쿠엔兼六園

이시카와켄石川県 카나자와시金沢市에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 정원. 넓이가 약 3만평의, 에도江戸시대를 대표하는 회유식 정원으로 그 특징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다. 

1676년 카가항加賀藩의 5대 藩主 마에다 츠나노리前田綱紀가 렌치테이蓮池亭를 만들고, 그 정원을 렌지테이蓮池庭라 부른 것이 시초라고 한다.

1837년 13대 藩主 마에다 나리야스前田斉泰는, 카스미가이케霞ヶ池를 더 넓히고 정원을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모양을 만들었으며, 이름도 켄로쿠엔兼六園으로 정했다. 명칭은 송나라의 시인 李格非의 『洛陽名園記』에서 유래한다고 한다.「宏大・幽邃・人力・蒼古・水泉・眺望의 6가지를 고루 갖춘 名園」이란 의미로, 당시의 가로 마츠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가 명명하였다고 한다.

춘하추동 제각기 다른 정취를 연출하는데, 특히 겨울의 설경은 과히 장관이라 하겠다. 또, 원내의 분수는 일본의 현존하는 분수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카스미가이케霞ヶ池로부터 석관으로 물을 끌어들여, 수위의 고저차를 이용하여 물을 뿜어내는 방식이다.

이 정원은 오랫동안 토노사마殿様의 개인정원으로 비공개되었으나, 1874년부터 정식으로 일반 공개되면서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개원 이래 무료로 24시간 개방을 하였으

나, 시설물이 파괴되는 일이 잦아, 1976년부터 유료화하고 정해진 시간만 개방하게 되었다.




■ 스이젠지水前寺 죠오쥬엔成趣園

스이젠지水前寺 죠오쥬엔成趣園은 쿠마모토켄熊本県 쿠마모토시熊本市에 있는 다이묘大名 정원. 흔히 스이젠지水前寺 공원이라 불린다. 풍부한 아소阿蘇산의 복류수가 분출되어 만들어진 연못을 중심으로, 축산, 바위, 잔디, 소나무 등의 식목으로 토오카이도오東海道 53 경승을 묘사하였다고 한다.

 


 죠오쥬엔成趣園은 쿠마모토항熊本의 초대 藩主,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가 1636년에 만든 스이젠지水前寺 차실이 시초였다고 한다. 타다토시忠利 때에 연못, 축산이 만들어져 현재

 
 

와 같은 형태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의 한 구절「園日渉以成趣」에서 「成趣園」이란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 나카즈中津 반쇼오엔万象園

나카즈中津 반쇼오엔万象園은 카가와켄香川県 마루가메시丸亀市에 있는 정원으로, 반쇼오엔万象園으로도 불리며, 마루가메丸亀 미술관이 병설되어 있다.

반쇼오엔 정원은 1688년 마루가메丸亀 藩主인 쿄오고쿠 타카토요京極高豊의 명에 의해, 마루가메丸亀에서 가까운 나카즈中津의 바다에 면한 곳에 만들어졌고, 이름의 유래는 森羅万象에 의한다. 쿄오고쿠京極씨의 고향인 오오미노쿠니近江国의 琵琶湖의 형상을 재현하여, 오오미近江 8경의 이름을 딴 섬들을 다리로 순회하게 만들어졌다.

마루가메丸亀 미술관은, 회화관 ‧ 도기관 ‧ 히나닌교오雛人形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정원과 함께 이용할 수 있다. 

 

■ 아다찌足立 미술관 정원

아다찌足立미술관은 시마네켄島根県 야스기시安来市에 있는 근대 일본화를 중심으로 한 사립미술관이다. 요코야마 타이칸横山大観을 비롯한 근대 일본화와 일본정원으로 유명한 이곳은, 지역 출신의 실업가 아다찌 젠코오足立全康가 1970년 71살 때 개관하였다. 질과 양에서 일본 최고라 칭하는 타이칸大観의 작품은 총수 130점을 소장하고 있고, 아다찌足立 컬렉션 중심이다. 그 외에도, 타케우찌 세이호오竹内栖鳳, 카와이 교쿠도오川合玉堂, 우에무라 쇼오엔上村松園 등 근대 일본 화단의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또 키타오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카와이 칸지로河井寛次郎의 도예작품, 목조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아다찌足立 미술관의 또 하나의 특색은 광대한 일본정원에 있다. 정원은 카레산스이枯山水 정원, 백사 청송 정원, 이끼 정원, 연못 정원 등 6개로 나뉘어져 총 면적이 1만 3천 평에 

 

이른다. ‘정원 또한 한 폭의 회화’라 한 젠코오全康씨의 말 그대로,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정원은 해외에서도 유명하다. 미국의 일본정원 전문잡지「Journal of Japanese Gardening」에서, ‘정원 그 자체의 질’ ‘건물과의 조화’ ‘이용자에 대한 대응’ 등을 총합적으로 판단한 평가에서 첫해인 2003년부터 2006년까지 4년 연속으로 일본 최고의 정원으로 선출되었다. 참고로 2위는 쿄오토京都의 카츠라리큐우桂離宮.


 















Ⅶ. 일본의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이란 눈의 잔상현상(殘像現象)을 이용하여 그림이나 인형 등이 움직이는 것처럼 조작하는 기법을 쓴 영화를 말한다. 일반영화 필름의 영상에 해당하는 1초간 24컷의 움직이는 분해도를 차례에 따라 촬영한다. 어원은 애니미즘이다. 애니메이션은 ‘영혼이 없는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꼭두각시·망석중이 등 인형극을 카메라에 담은 영화도 애니메이션에 포함된다고 할 수도 있지만, 원래는 컷 촬영영화를 가리키는 기술용어이므로, 피사체 자체를 조작하면서 촬영한 영화는 제외된다. 일본에서는 줄여서 ‘아니메’アニメ라고 부른다.


1. 애니메이션의 역사


■ 애니메이션의 기원

애니메이션의 기원은 영화의 발명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7세기에 독일의 수도사 
 
A. 키르허가 환등기를 발명하였다. 종교 포교의 도구로 만들어진 환등기는 그 장치가 소박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원리로 되어 있었다. 쏘마트로프(Thaumatrope, 1826년)가 발명된 이후, 
 
스트로보스코(Stroboscope, 1833년), 조트로프(Zoetrope, 1834년)등의 보다 진보된 원판의 회전으로 생기는 잔상효과를 이용한 움직임 재현 장치가 개발되기 시작했고, 1877년에는 프랑스의 에밀 레이노(Emile Reynaud)가 프락시노코프(Praxinoscope)를 발명해 최초로 대중에게 움직이는 그림을 영사할 수 있게 되었다. 회전하는 통의 안쪽에 일련의 동작을 나타내는 그림을 붙이고, 그것이 통 중앙의 면이 많은 기둥모양의 거울에 비치게 하는 방식이었다. 다시 그것을 투영식으로 개량하여 1889년에 파리에서 영사회를 열었다. 600컷 이상의 천연색 그림을 사용하였으며, 상영시간은 15분 정도였다. 필름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현재의 애니메이션과 똑같은 원리이다. 뤼미에르(Lumiere)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의 발명으로 이어지면서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가 탄생하게 된다. 애니메이션은 이러한 
영화적 장치들과 실험적인 기법들의 도입을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20세기 들어 1908년 프랑스에서 에밀콜에 의해 팡타스마고리(Fantasmagorie)' 가 만들어져 대중에게 상영되었고 1909년 미국의 윈져 맥케이는 '공룡거티 (Gertie the Trained Dinosaur)'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영화의 상영에 앞서 보여주었다. 그 후 약 10년간 애니메이션은 상업용 코믹오락물로서 인식되었다.

1920 ~ 1930년 후반에 이르러, 월트 디즈니는 '미키 마우
 
스(Mickey mouse)', '도날드덕' 등을 제작하여 애니메이션의 오락 매체로서의 입지를 다지면서 1937년 기술적인 면과 작품의 질에서 모두 뛰어난 평가를 받은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를 완성했다. 이시기부터 애니메이션은 독립적인 극장용 오락 영화로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는 디즈니로 대표되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적응한 셀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다른 제작기법 
 
내지는 추상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러한 유럽의 전통은 오늘날 유럽뿐 아니라 캐나다 일본등지에 영향을 끼쳐 소위 작가주의 애니메이션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애니메이션은 점점 그 영역을 넓혀감과 동시에 상업적 이용가치의 증대로 기존의 전통적인 애니메이션(주로 디즈니로 대표되는 셀 애니메이션) 스타일
 
과 디자인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등장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디즈니 스튜디오 출신 애니메이터들이 설립한 UPA의 작품들이 그러했다. UPA의 대표적 작품으론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제럴드 맥보잉 보잉<(Gerald McBoing Boing),1951>'이 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텔레비전의 보급량이 크게 늘면서 
 
점차 극장이 사양길을 걷게 되자 본격적인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저비용 고효율을 요했고 거기에 부합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1초에 들어가는 프레임수를 줄이는 방식)기법이 사용되는 작품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잠시 주춤했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은 1988년 디즈니의 장편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Who Framed Roger Rabbit)'이 성공을 거두면서 다시금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의 잠재력을 인식하게 함으로써 1990년대에 디즈니의 연이은 장편 애니메이션의 제작과 흥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90년대 들어 기존의 셀 애니메이션뿐 아니라 '토이스토리(Toy Story)'와 같은 컴퓨터 애니메이션, '윌리스와 그로밋(Wallace & Gromit)'과 같은 클레이 애니메이션이 성공을 거두면서 더욱 다양한 상업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있고 작가주의 애니메이션 또한 캐나다를 위시한 여러 국가에서 많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있다.


■ 일본 애니메이션의 역사 


‣ 초기의  애니메이션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시작된 것은 타이쇼大正 시대로, 외국에서 수입된 애니메이션 영화의 인기에 자극받아 제작되었다. 시모카와 헤코텐下川凹天, 코오우찌 쥰이치幸内純一, 키타야마 세이타로오北山清太郎 세 명이 제각기 다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는데, 시기적으로도 동시기였기 때문에 세 명 모두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창시자로 위치부여를 한다. 다른 외국과 같이 당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은 수분 정도 길이의 단편영화가 많았다. 제작 담당자도 개인이나 소수 인원의 공방에서 제작된 가내 수공업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생산 편수도 적었고, 생산의 효율화를 가능하게 하는 셀화의 도입도 늦어져, 1927년에 오오후지 노부로오大藤信郎에 의해 「쿠지라」鯨(고래)의 일부에 사용된 것이 일본 최초의 셀화 애니메이션이라 전해진다.
 
1930년 전후에 셀화가 사용되기 전까지는 일본에서는 키리에切り絵에 의한 애니메이션이 
주류였다. 2차 대전이 시작되자, 일본 군부는 사기고양을 목적으로 애니메이션 작품을 기획하며, 막대한 제작비를 제공한다. 이는 곧 기술력의 향상으로 연결되어, 세오 미츠요瀬尾光世에 의해『모모타로오의 바다독수리』桃太郎の海鷲라는 일본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영화가 탄생하였다.
 
2차 대전 후는, 영화회사 토오에이東映가 1956년 니혼도아가샤日本動画社를 흡수 합병하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토오에이도아가東映動画를 발족하고 극장용 애니메이션영화의 제작을 착수하였다. 최초의 극장 장편영화는 『백사전』白蛇伝(1958년, 79分)으로, 동양의 디즈니를 목표로 한 설립 의도대로 해외로 수출도 하였다. 그 후, 매년 한편의 페이스로 신작을 제작하였지만, 고품질의 애니메이션을 소량 제작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작품 수는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매년 계속적으로 한편을 제작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일본밖에 없었고, 이것이 애니메이션 대국으로 가는 첫 걸음이 되었다.


‣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의 시작

1958년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자 애니메이션을 사용한 프로그램도 만들어졌으나, 1회 방송 분량이 수 분정도의 것이 대부분이었다. 텔레비전 CM에서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광고가 자주 등장하였다. 이 시대에 시작된 짧은 애니메이션을 이용한 프로그램은 『모두의 노래』みんなのうた(1961년 방송개시)가 있다. 같은 해, 일본 최초의 연속 TV 애니메이션

『인스턴트 역사』インスタント・ヒストリー가 후지 TV에서 방송되었다. 애니메이션은 오랜 제작기간과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점이 당시의 영상업계의 상식이었고, 해외의 애니메이션이 성황리에 방송되는 상황에서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하고자 하는 텔레비전 방송국은 없었다.


‣ 『철인아톰』鉄腕アトム의 등장

최초의 본격적 연속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은 『철인아톰』鉄腕アトム(1963년 방송개시)이었
 
다. 『인스턴트 역사』インスタント・ヒストリー는 3분 편성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1분이었는데 반해, 주 1회, 30분 방송이란 프로그램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원작자인 테즈카오사무手塚治虫가 무시프로덕션虫プロダクション을 설립해서 제작을 지휘했다. 테즈카手塚는 매주 방영할 수 있는 분량의 애니메이션의 제작이 일본에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선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
 
해, 턱없이 부족한 방영권료임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을 맡아서는, 부족한 제작비는 자신의 만화 원고료로 충당했다고 한다.

『철인아톰』에 대해, 후지 TV로부터 방영권료란 명목으로 무시프로덕션에 제공된 금액은 자료에 따라 다르나, 대략 한 회당 50만 엔에서 75만 엔이었으나, 실제 제작에 든 경비는 150만 엔에서 260만 엔이 들었다고 한다. 이 가격이 업계에서 표준이 되었기 때문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애니메이션 업계는 저예산에 허덕이고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뱅크시스템이나 토메에止め絵 기법의 사용이란, 단순히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을 넘어선 독자적인 방법이 탄생하였다. 또한 방송편수의 증가, 저가격으로 인한 국제 경쟁력, 그리고 돈이 목적이 아닌 작가의 양성, 그림의 질을 보충할 수 있는 탄탄한 각본 등, 저예산이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이익도 많았다.


‣ 재방송과 해외로의 수출

저예산으로 인해, 한번 방송만으로는 제작비를 회수할 수가 없어서, 1970년 무렵부터 해외수출이 중요한 자금 회수의 수단이 되었다. 최초로 수출된 TV 애니메이션은 1963년, 미국의 NBC FILMS에 판매한『철인아톰』이었다. 한 회당 만 달러, 총 104회 분량을 수출해 당시 금액으로 3억 엔을 벌었다. 후지TV의 방송에서 입었던 적자를 이 수출에 의해 충족할 수가 있었다. 1995년의 토오에이도아가東映動画의 해외 판매는 전 세계에 약 10억 엔이라 하는데, 금액별 내역으로는 유럽이 전체의 85%를 차지하고, 동남아시아가 9%, 중근동이 3%, 미국은 3%였다. 가격은 30분 방영분 1회가 4천 달러에서 5천 달러로 설정되어, 오히려『철인아톰』판매당시의 반액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다. 이는 곧 자국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보다는 수입하는 편이 싸다고 하는 점에서, 세계 각국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방영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외에도, 장난감, 과자, 문구 메이커들로부터 받아들이는 판권비지니스도 수입원의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 1970년대 

1970년대에 들어가자, 토오에이東映, 무시프로덕션 외에도 애니메이션 회사가 설립되어 애니메이션 영화의 편수는 증가하지만 TV 애니메이션을 단순히 재편집한 것이 많았다. 

그런데 비디오가 전혀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열렬 팬들은 TV의 명장면을 다시 극장의 대형 화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꺼이 극장으로 향했다. 비교적 유명한 재편집 영화로는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戦艦ヤマト(1977년)가 있다. 이 작품과 이듬해 공개되었던 『안녕 우주전함 야마토 - 사랑의 전사들- 』さらば宇宙戦艦ヤマト- 愛の戦士たち- 이 대성공을 거두어 일대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애니메이션이 일반사회에서 인정받게 되었고, 이후 일본에서도 애니메이션 영화가 다수 만들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에는『루팡3세 카리오스토로의 성』ルパン三世 カリオストロの城,『은하철도 999』銀河鉄道999가 공개되는 등, 많은 작품이 탄생하였다.

 
 
 




‣ 1980년대 

1980년대는 재편집 애니메이션과 함께 『AKIRA』등 신작영화도 다수 제작되었다. 1981년부터 1982에 걸쳐 3부작으로 공개된『기동전사 건담』機動戦士ガンダム은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당초, 기동전사 건담은 1979년에 TV시리즈로 방영되었으나, 인기를 얻지 못해 중단되었다. 그러나 재방송으로 인기를 얻자, 극장용으로 제작되고, 또한 1985년에는 속편이『기동전사Z 건담』機動戦士Zガンダム이란 이름으로 방영되었다.

또한 토오에이東映 만화 축제로 대표되는, TV 애니메이션의 인기작품을 신작으로 영화화해 여러 편을 동시 상영하는 형태가 항례화 되었다. 이런 작품들은 애니메이션 애호가들 보다는 가족단위의 입장객을 타깃으로 제작되었다. 

90년대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감독의 작품으로 『바람계곡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1984),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 (1986),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1988), 『마녀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1989) 가 발표된 것도 80년대의 커다란 성과라 하겠다.



 
 









‣ 1990년대 이후

1990년대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편수는 증가하였지만, 주로 아동이나 가족을 위한 영화가 대부분으로 어른들을 위한 작품은 적었다. 따라서 관객층이 편중하여 자본의 회수가 곤란한 경우가 많았으며, 또 고연령층의 애니메이션 애호가는 극장에 가기보다는 자택에서 비디오로 보는 것을 선호하기에, 제작자 입장에서는 자연이 TV 애니메이션이나 OVA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또한 TV 애니메이션의 영화화가 상당히 많았던 것도 이 시대의 특징이다. 1992년부터 아사히朝日 TV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크레용 신짱クレヨンしんちゃん(한국에서는 짱구는 못말려) 시리즈가 극장용『짱구는 못말려 액션가면 VS 하이레그마왕』クレヨンしんちゃんアクション仮面VSハイグレ魔王이 공개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을 하고, 1997년에는 『명탐정 코난』名探偵コナン시리즈 제 1탄이 공개되었다.

 
 










 
참고로 1990년대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매년 일본영화의 흥행성적의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1989년의『마녀 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를 시작으로, 1991년에『추억은 방울방울』おもひでぽろぽろ, 1992년에『붉은 돼지』紅の豚, 1994년은『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戦ぽんぽこ, 1995년은『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 1997년은『원령공주』もののけ姫, 1999년은『극장판 포켓몬스타』劇場版ポケットモンスター 가 그해의 일본영화흥행성적의 최상위를 기록하고 있다.

2000년대가 되면, 애니메이션 없이는 일본영화는 존재할 수 없다고까지 말해질 정도로, 애니메이션 작품의 비중이 증가하였다. 키네마순보에 의하면, 2002년도의 일본영화의 흥행수입의 10위중, 6편이 애니메이션으로, 1,2,4,5위는 전부 애니메이션이었다. 다만 2003년도는 애니메이션의 편수는 5편으로 줄고, 1위도 애니메이션이 아니었다. 또한 이런 애니메이션 영화의 대부분이 『포켓몬스타』ポケットモンスター를 비롯하여 TV 애니메이션의 신작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2.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


■  ‘아니메’ 란 말의 성립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아니메アニメ란 말은 당초에는 그다지 사용되지 않고, ‘만화영화’ 또는 ‘동화’(動画) 라 불렸다. 애니메이션이란 말은 영상업계의 전문용어로, 줄임말인 아니메란 말도 일반적으로는 보급되지 않았다. TV에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방송되면서, ‘TV만화’란 말이 사용되었다. 최초의 TV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인 「철인 아톰」에서는 ‘TV만화’란 표기를 사용하였다. 이 영향에서인지 중 고년 층을 중심으로 현재에도 애니메이션을 ‘만화’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아니메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잡지 『小型映画』의 1965년 7월호에서였다. 그런데, 이 잡지도 영상제작자 대상의 전문잡지였다. 『小型映画』는 전월호까지는 주로 애니메이션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무렵부터 영상업계에서는 아니메란 말이 일반적이 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외에서 아니메란 말이 사용되게 된 것은, 1991년 미국에서 The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Japanese Animation 이란 모임이 발족하고, 이듬해인 1992년부터 매년 

「Anime Expo」란 행사가 개최되면서 anime란 말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

일본 애니메이션의 특징은 성립과정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 대부분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1초에 24장이라는 원화를 사용하는데 반해, 일본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경우는 1초에 12장의 동화를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다. 다만 이것은 움직일 경우에 한해서 그렇고, 항상 8장의 동화를 사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좌우로 긴 정지화면을 팬시키는 연출을 다용한다. 이것도 동화매수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주로 경기장의 관객석이나 파티장 등, 인물이 많이 출연하고 복잡한 상태를 연출하기 위해 사용된다. 또 정지화면 그 자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이전에 사용된 장면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뱅크시스템이란 기법도 다용된다. 주로, 연속 TV 애니메이션의 전회의 줄거리 설명, 로봇의 합체 장면, 변신 장면 등에서 사용한다. 

또한 제작비가 적게 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비가 싸게 된 배경을 설명했지만,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 감독은, 무시프로덕션의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의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이바지한 공적을 인정하면서도, TV 애니메이션 초창기에 테즈카手塚가 시장우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작품을 원가에도 못 미치는 저가격으로 판매한 것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며 신랄하게 비판을 했다.


3.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감독


■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

 

‣ 만화가 테즈카의 탄생 

일본 만화의 신,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는 1928년11월3일 오오사까大阪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4학년 때에는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란 펜네임을 생각했다고 한다.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선생님 몰래 만화를 그려 친구들에게 돌려, 호평을 얻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후, 나니와浪速고등학교에 수험하였으나 실패, 오오사까大阪 제국대학 부속 의학 전문부(패전 전에 군의 양성을 위해 임시로 부설된 의학 전문학교)에 입학. 재학 중 『아마추어의 일기장』マアチャンの日記帳으로 데뷔. 이듬해는 『신타카라지마』新宝島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는다. 1951년 1년 유년한 끝에 대학을 졸업. 1952년, 의사면허 취득. 『아톰 대사』アトム大使에서 스핀 어프(spin- off)하여 『철인 아톰』鉄腕アトム을 「少年」잡지에 연재한다. 이 시기, 만화가와 의사라는 직업을 병행할 생각도 하나, 어머니의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에 힘입어 전업만화가의 길을 택한다. 
 


‣ 애니메이션 사업 

테즈카가 토오쿄오東京에 정착해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 우연히 본 動画 프로덕션의 구인광고를 보고 응모하나, 프로덕션의 사장은 ‘출판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가 힘드니까 들어오지 않는 것이 좋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테즈카手塚 자신은 일년에 365편을 본 적도 있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 영화를 좋아했고, 특히 디즈니 작품은 밤비를 80회, 백설 공주를 50회 봤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을 좋아한 사람이었다.

그가 실지로 애니메이션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자신의 작품『나의 손오공』ぼくのそんごくう이 토오에이東映에서 애니메이션 영화화 할 때, 스텝으로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 전문의 「테즈카 동화프로덕션」手塚動画プロダクション(뒤의 무시프로덕션)을 설립한다. 1963년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무시프로덕션을 이끌고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철인 아톰』을 제작하여 후지
 
TV에서 1월1일부터 방송하였다.

19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 애니메이션 시리즈 『밀림의 왕자 레오』ジャングル大帝가 후지TV에서 10월6일부터 방송되었다. 이 외에도『오공의 대모험』悟空の大冒険,『신타카라지마』新宝島,『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뱀파이어』バンパイヤ 등이 있다.


‣ 테즈카의 공과 죄

만화의 신이라 불렸던 테즈카인 만큼, 만화에 대한 그의 공적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 대한 그의 공적은 일부는 시인하면서도 비판의 화살을 돌리지 않는다. 『철인아톰』鉄腕アトム의 등장 항에서 언급했지만, 그의 회사인 무시프로덕션이 『철인아톰』을 제작하면서, 후지TV로부터 제작비에도 못 미치는방영권료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를 비난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이 사실에 대해서는 테즈카 

본인도 ‘제작비를 싸게 책정한 것은 실패’였다고 뒤에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도 일본 TV애니메이션의 시조가 테즈카였던 점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있어서는 비극의 시초였다고 하면서, ‘프로가 아니었다. 부잣집 도련님의 도락’이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저예산 외에도 그의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미야자키는 ‘테즈카씨는 드라마전개에 억지라고 할 만큼 비극을 연출하는 경향이 있다’고 논평하였다. 토오에이東映動画의 애니메이션 영화『서유기』西遊記를 제작할 때의 에피소드를 예로 들어, ‘필연성이 없는데도 억지로 비극적 결말을 유도’했다며, 일종의 습관적인 수법이라며 질책하였다. 물론 저예산이었기에 얻을 수 있는 이익, 방송편수의 증가, 저가격으로 인한 국제 경쟁력, 그리고 돈이 목적이 아닌 작가의 양성, 그림의 질을 보충할 수 있는 탄탄한 각본 등이 있었다고 하나, 여기에 대해서도 애니메이션 작가인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씨는 자신의 저서 『작화 땀투성이의 증보개정판』作画汗まみれ 増補改訂版에서 ‘연기 설계나 애니메이션 작가들에게 무관심해서는 훌륭한 애니메이션이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테즈카씨는 풀애니메이션의 기초 기술을 디즈니 등지에서 배운 형적도 없고, 제대로 애니메이션 작가도 양성하지 않고 만화적인 리미티드부터 출발한 점도 실로 의문입니다’라며 비판적인 의견을 서술하고 있다.

비판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신랄하게 비판한 미야자키도 ‘테즈카씨는 어느 시점에서 나에게 바통을 터치해 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넘겨받지 못한 바통도 엄청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라며 테즈카가 이룬 공적을 인정하는 말을 남기고 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일에 대한 집착을 보이며 또 많은 업적을 남긴 그이지만, 최후에 ‘일을 할련다. 일하게 해달라’라며 숨을 거두었다.


■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 초기 시절
 

미야자키하야오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실력이 뛰어났으며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虫나 스기우라 시게루杉浦茂의 만화를 보며 만화가의 꿈을 키워나갔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백사전』白蛇伝을 보고 감동받아, 애니메이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가쿠슈우인学習院 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진학해, 만화동아리를 찾았으나 없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아동문학 동아리에 들어간다. 만화가를 지망해 여기저기

의 잡지편집부에 자작 만화를 들고 찾아가나 채용되지 않고, 졸업 후는 애니메이션 작가로 토오에이東映動画에 입사한다. 한동안 만화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중, 러시아의 장편 애니메이션 영화『눈의 여왕』雪の女王을 보고 감동을 받아, 애니메이션이야말로 평생 자기가 가야할 길이라 결심하게 된다.


‣ 미래소년코난의 탄생
 

원화, 장면설계, 화면구성, 레이아웃 등 업계의 일을 모두 섭렵하며 기회를 기다려왔던 미야자키는 NHK의『미래소년코난』未来少年コナン으로 타고난 작가성을 발휘해 호평을 얻으며, 연출가 데뷔를 한다. 

그 후, 텔레콤・애니메이션필름으로 이적하고 『루팡3세 카리오즈트로의 성』ルパン三世 カリオストロの城으로 영화감독 데뷔를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업계 관계자나 애니메이션 팬으로부터는 열광적인 찬사를 받지만, SF 에이메이션이란 낯선 장르를 외면한 관객 탓에 흥행에서는 실패를 하고 만다. 미국에 건너간 미야자키는 루팡3세부터 같이 작업하여온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와 타카하타 이사오高畑勲와 함께 미일 합작 영화인 『리틀 리모』의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기획에 의문을 가지고 도중하차한다. 이 시기에 
『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원령공주』もののけ姫『바람
 
계곡의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 등의 원형이 되는 기획을 구상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실의에 빠진 미야자키를 구원해 준 이가 토쿠마徳間 서점의 토쿠마 야스요시徳間康快 사장이었다. 그는 동 회사의 『아니메 쥬』アニメージュ 잡지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또 애니메이션으로서 제작하여 1984년에 공개를 하였다. 마침, 『루팡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이 TV에 방영되어 미야자키는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 스튜디오지브리 설립

미야자키는, 토쿠마徳間서점의 출자로 스튜디오지브리란 회사를 설립한다. 설립 후 거의 2,3년 간격으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데, 1986년에는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

ピュタ, 1988년에는『이웃집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 1989년에는『마녀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 1992년에『붉은 돼지』紅の豚를 제작하여, 세대나 장르를 초월한 국민적 영상 작가로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1997년에 공개된 『원령공주』もののけ姫는 토쿠마徳間서점과 디
 
즈니사의 업무제휴로 지브리 작품의 세계진출을 모색한 것과, 지브리 사상 최고의 제작비, 미야자키감독의 은퇴설(미야자키는 은퇴할 의향이었지만,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콘도오 요시후미近藤喜文의 사망으로 은퇴할 수 없었다는 설이 있다. ) 등이 화제가 되었고, 『E.T.』가 가지고 있던 일본영화 흥행기록을 갱신하는 대 히트작이 되었다.
2001년에 발표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은 『타이타닉』에 빼앗긴 일본영화 흥행기록을 탈환하는 304억 엔의 흥행수입을 달성하는 쾌거를 이루며, 2002년에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2003년에는 아카데미상 
 
장편애니메이션 영화상을 수상하는 등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2004년에 발표한『하울의 움직이는 성』ハウルの動く城은 인기그룹 SMAP의 키무라 타쿠야木村拓哉를 성우로 기용하여, 애니메이션을 별로 즐기지 않는 여성들도 극장으로 모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 미야자키의 작품세계

‘냉엄한 현실세계로부터, 아이들의 도피처가 필요하다’ 며 일관되게 판타지 세계를 주장하며 제작하였다. 아동문학을 애독하고,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것’이라 공언했듯, 그의 작품은 거의 일관되게 아이들의 시선에서, 악역은 전부 어른으로 설정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작품은 단순한 권선징악이 아니고, 악역도 중층적이고 복잡한 캐릭터로 설정한 것이 많다. 

또한 환경보호, 반전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미야자키는 미국정부의 방침에 반대의 입장을 표명한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 대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하였고, 토오에이東映에 입사한 후는 노동조합의 서기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미야자키의 사회주의에 대한 입장은 미래소년 코난에 있어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 스탈린의 관리형 사회주의를 표상하는 인더스터리아, 그 대치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원시 공산주의 또는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표상하는 하이하바로 묘사되는 사회구조에서 엿볼 수 있다.

2002년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수상시 기자회견에서 ‘지금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막다른 골목에 봉착했다’고 말하면서, 단시간・저예산으로 양산되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 위기감을 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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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일본의 스포츠


Ⅰ. 스모


 


거구들이 샅바만 두르고 나와 혼신의 힘을 다해 힘과 기술을 겨루는 스모는 경기의 승패 결과도 흥미 있지만, 그 진행 과정이나 경기장의 장식 또한 매우 흥미롭다. 샅바만 두른 두 장사가 나와 상대방을 쓰러뜨려 승패를 가른다는 기본적인 양식은 우리의 씨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일본의 스모의 형식에는 일본의 문화적 전통이 반영되어 있으며, 스모를 진행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마치 종교의식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절제된 표현으로 나타난다. 

스모의 시작은 민간에서 행해지던 자연발생적인 힘겨루기 놀이었다. 그 후 궁중의례가 되었고, 한때에는 실전무술로도 인식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스모는 흥행과 결탁이 되어 스포츠로서의 길을 가게 되었다. 지금 스모는 일본에서 프로야구, 프로축구와 함께 일본에서 인기스포츠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최근에는 외국선수뿐만이 아니라 외국의 팬들까지 많이 생겨 미국, 영국, 프랑스까지 원정경기를 벌이기도 한다. 이렇게 스모가 인기가 있는 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많은 기술이 있으며, 체중제한이 없으며, 순식간에 승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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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되며, 또한 의외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기의 본래적인 재미 외에도 종교의례적인 요소와 엄격한 예의범절이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닌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런 묘미를 잘 엮어서 발전시켜 온 스모는 오늘날 인기 스포츠이자 '일본의 국기(國技)'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1. 스모의 역사 


기원

스모의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어, 古墳時代에 하니와埴輪・스에키須恵器・도구우土偶 등에도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기록에 나타난 스모의 기원을 논할 때는 한국의 씨름과 같이 몽골이 원류라는 설이 있는데 8세기 초에 편찬된 「코지키」古事記나 「니혼쇼키」日本書紀의 신화를 인용한다. 신들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과정에 등장된 스모이기에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고대인들의 스모에 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코지키」古事記의 다케미카즈치建御雷와 다케미나카타建御名方 두 神이 벌인 힘겨루기 내기에 관한 문구나, 「니혼쇼키」日本書紀의 노미노스쿠네野見宿禰와 다이마노케하야當麻蹴速의 격투에 관한 문구는 일본의 스모에 관한 역사를 말할 때면 반드시 등장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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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見宿禰와 當麻蹴速의 격투



흥미롭게도 일본의 스모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실(史實)은 우리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서기 642년에 왕이 백제에서 온 사신을 환대하기 위하여 궁정에서 병사들 가운데 장사를 뽑아 스모를 하게 했다는 기록이 「니혼쇼키」日本書紀에 전해지고 있다. 


조정행사
 

그 후에 스모는 정기적인 궁정의례의 하나로 오랫동안 행해졌다.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왕은 신하들을 불러서 여러 가지 형식으로 여는 잔치인 세치에節會를 개최했다. 

세치에節會 중에는 스모세치에도 있어서, 440년간이나 지속되면서 스모의 역사와 성격과 방향을 결정짓게 했다. 

이런 스모세치에를 개최하는 목적은 중앙정부의 권력을 과시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권력이 지방까지 미치는 시기에는 스모세치에가 잘 되었지만, 왕권의 쇠퇴와 더불어서 쇠퇴하게 되었다. 이처럼 나라시대에는 조정의 행사 때나 볼 수 있었다.


막부시대

중세에 권력이 조정으로부터 무사들의 손으로 넘어가자, 스모는 무사들 사이에 전쟁을 위한 연습이나 일상의 신체 단련 등, 이른바 실전용의 무술로서의 실용적 의미가 강조되었다. 카마쿠라鎌倉막부 설립 후 1189년에 장군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카마쿠라鎌倉의 츠루오카 하치만구우鶴岡八幡宮에서 스모 대회를 열어 친히 관람하며 즐겼고, 그 후에도 자주 스모 대회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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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戦国시대가 되자 각 영주들도 무사들에게 스모를 장려하여 필수적인 무술로 유행하며 정착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0년부터 1581년 사이에 아즈찌安土城에서 여러 차례 스모 대회를 열어 관람했는데, 이때 참가한 리키시力士의 수가 1500여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스모가 장려되면서, 직업적으로 스모를 하려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락적 스모의 등장

한편, 스모는 경기 진행방법에 여러 가지 제한을 두게 되자 실전적인 기능이 약화되었다. 실용이 아니라 경기로서의 의미가 강조되자, 이윽고 대중오락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등장하는 것이 칸진勧進 스모相撲 이다. 칸진勧進은 원래 불교용어로 신사나 절의 건립이나 수리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여는 행사를 말한다.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며 전란이 사라지자, 일자리를 잃은 많은 떠돌이 무사들을 중심으로 직업적인 스모 집단이 생겨났다. 이들은 오오사까大阪, 쿄오토京都, 에도江戸 등지에서 칸진스모 간판을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1645년 쿄오토京都에서 관청의 허가를 받고 행했던 칸진스모가 최초의 것이었다. 이후 각지의 영주들의 비호를 받으며 칸진스모 흥행 집단들은 각지를 순회하게 되었다. 칸진스모는 종교행사로 출발했지만, 차츰 그 목적을 벗어나서 리키시 자신들의 생계 수단으로서 상업성을 띤 흥행물로 바뀌어 갔다. 이 무렵에 형성된 스모 대회의 흥행적인 성격은 오늘날에도 잘 전승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일본 스모 협회의 기원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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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이다. 요즘에도 매년 6차례씩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는 본대회인 오오즈모大相撲의 형식은 칸진스모의 형식을 이어받은 것이다. 


스모의 침체기

칸진스모는 처음에는 오오사까大阪, 쿄오토京都를 중심
 
으로 흥했으나, 1750년을 전후하여 에도江戸로 주도권이 옮겨졌다. 이에 따라 스모를 운영하는 조직도 효과적인 흥행을 할 수 있도록 변화되었다. 서민문화의 대두라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스모 집단의 인적 구성과 경기진행, 제도 등이 정비된 것도 이 시기였다. 

토쿠가와德川 막부가 붕괴되고 메이지明治유신에 의한 새로운 정부의 제도는 지금까지의 영주의 비호 아래서 활동하고 있던 리키시力士들에게 한동안 큰 타격을 주었다. 문명개화의 풍조에 따라서 젊은 관리들로부터 ‘스모란 벌거숭이로 사람들 앞에서 추는 미개한 춤’이라며 비하되었다. 설상가상, 1871년에는 단발령이 발표되어 리키시들도 일반인들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라는 명령이 있었다. 리키시들의 독특한 모양의 상투머리를 금지한다는 일은 리키시들로서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자 스모를 모독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마침 몇몇 고관들 가운데는 스모 애호가가 있었다. 이들의 힘으로 리키시들에게는 단발령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두어, 리키시들은 전통적인 머리 모양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리키시들은 전통적인 리키시 상투를 틀고 스모에 임하고 있다. 


스모의 부흥기
 

스모가 다시 인기 회복의 기미를 보였던 것은 1889년 천황이 친히 스모를 관람하던 때부터였다. 그 후 1909년에는 스모 전용 경기장인 코쿠기칸國技館이 토오쿄오東京시내에 위치하는 료오고쿠兩國에 건립되어 13,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게 되자 스모 관람은 이윽고 대중성을 띠게 되었다. 1925년 무렵부터는 매스미디어의 발달에 힘입어 전 국민의 관심을 불러 모으게 되었고, 그 여파는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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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모의 구성


스모 선수


‣ 자격 

스모선수가 되려는 사람은 의무교육(중학교교육)을 마친 남자로 스모베
 
相撲部屋의 오야카타親方의 추천을 거쳐서 스모협회의 심사를 받는다. 기본적으로 체중 75Kg이상, 신장 173cm이상인 사람 중에서 의사의 엄밀한 검진결과 이상이 없는 자만이 스모선수가 될 수 있다. 나이는 일반인일 경우 23세미만이고, 일본 스모 협회가 지정하고 있는 사회인이나 대학의 아마추어 대회에서 일정한 성적을 거둔 사람에 한해서는 25세미만인 사람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스모선수는 일본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없어 1993년에는 하와이 출신인 아케보노가 외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스모의 최고의 자리인 요코즈나横綱에 오르기도 했다.


‣ 선수이름 

스모선수가 되면 본명 대신에 새로 이름을 짓는데, 이를 시코나醜名라고 한다. 이 시코나는 자기가 직접 짓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스승이나 후원단체가 지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시코나는 산이나 바다를 나타내거나 힘센 것, 경사스러운 의미의 글자를 많이 사용한다. 특히 산과 바다처럼 듬직하고 강한 이미지를 많이 사용한다. (例: 후타바야마雙葉山, 치요노후지千代の富士, 타카미야마高見山, 아사시오朝潮, 키타노우미北の湖, 오오노쿠니大の國, 히노류우火の龍, 코니시키小錦, 타카노하나貴の花, 와카노하나若の花, 우시와카마루牛若丸 등) 

그리고 스승의 이름에서 한 글자 따서 만들기도 한다. (例:아사히쿠니旭國라는 스승 밑의 스모선수는 아사히후지旭富士, 쿄쿠도오잔旭道山, 쿄쿠고오잔旭豪山등)


‣ 선수의 지위 

선수는 혼바쇼本場所의 성적에 따라 자신의 랭킹이 정해지는데, 이 표를 반즈케番付라고 한다. 쥬우료우十両에는최고의 자리인 요코즈나横綱밑으로 오오제키大関,세키와케関脇,코무스비小結,마에가시라前頭순으로 계급이 있으며, 밑의 등급에는 마쿠시타幕下,산단메三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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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니단序二段,죠노구치序の口순으로 자리매김을 한다. 코무스비小結 이상이 되어야지만 반즈케番付에 큰 글씨의 이름이 오르고, 인기도 많아진다.

반즈케番付는 성적이 좋은 리키시의 이름을 위쪽에 큰 글씨로 쓰고, 성적순에 따라 점점 아래쪽으로, 점점 작은 글씨로 써나간다.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는 리키시는 반즈케에 이름이 오르지도 못한다. 리키시들은 열심히 훈련을 거듭하여 실력이 향상됨과 동시에 반즈케에 자신의 이름이 점점 위로, 점점 큰 글씨로 적히게 되므로 반즈케의 변화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은퇴한 선수는 오야카타親方가 될 수 있는데, 모든 선수가 오야카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은퇴한 선수 가운데 특별히 인정을 받은 사람만이 오야카타가 될 수 있다. 오야카타는 독자적으로 스모 베야相撲部屋를 개설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승의 스모베야를 물려받아 운영한다. 선수의 지위를 외형에서도 알아낼 수 있는데, 선수의 지위는 그들의 긴 머리 스타일을 결정한다. 쥬우료우와 마쿠노우치의 스타일은 오오이쵸오大銀杏(마게의 앞 끝이 은행잎과 비슷하다하여 지어짐)라고 불리고 더 정교하다. 그 이하의 등급에서는 에도시대부터의 일반적인 형태인 촌마게丁髷(일본식 상투)다. 패션과 보호의 의미가 있다. 

 
 










교오지行司(심판)


‣ 자격 

스모에서 약 600년 전의 카마쿠라鎌倉시대의 사무라이가 입었던 예복을 입고, 군바이軍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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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를 들고 올라와서 선수들의 시합을 진행시키고 승패를 판단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교오지行司라고 한다. 이 교오지를 담당할 수 있는 사람은 키무라木村 가문과  시키모리式守 가문 출신만 할 수 있고 엄격한 서열이 정해져 있다. 교오지行司의 가문과 서열에 따라서 복장의 장식과 색깔이 다르다. 


‣ 교오지의 지위 

교오지의 등급(5등급)은 군바이軍配에 달린 노리개의 색깔에 의해 구분되어진다.  교오지의 최고계급은 타테교오지立行司이고 이 계급에 오르면 칼을 차고 도효土俵에 오를 수 있다.

*자주색 , 자백색 : 타테교오지立行司(최고위의 심판) 

*빨간색 : 상에키三役(오오제키大關, 세키와케關脇, 코무스비小結)의 심판, 

*홍백색 : 마쿠우치幕內의 심판, 

*청백색 : 주료十兩의 심판, 

*검청색 : 그 이하 등급의 심판, 


‣ 교오지의 역할

심판은 도효土俵 위에서 경기를 진행하는 주심과 도효 둘레의 사방으
 
로 정면에 두 명 반대쪽과 좌우로 각각 한 명씩 모두 여섯 명으로 심판원이 구성이 되어 입체적으로 심사를 하게 된다. 

여기서 승패에 대한 판결은 주심인 교오지行司가 군바이軍配를 승자 쪽으로 향하여 올리면 결정된다. 그 판정에 대하여 부심들 사이에 이의가 없을 때는 그대로 끝나지만, 씨름장 둘레에 앉아있는 부심들 중 한사람이라도 이의를 제기하면 그 판정에 대하여 심의하기 위해 심판 전원이 도효 중앙에 모여 논의하며, 판정이 어려운 경우에는 재대결을 할 수도 있다.

도효 위에서 리키시力士들이 겨루고 있을 때, 스모의 심판은「카마에테構えて(대비하고, 준비하고)」「미아와세떼見合わせて(서로 마주보고)」「유단나꾸 미앗떼油斷なく見合って(방심하지 말고 상대를 보고)」「마다마다まだまだ(아직, 아직)」라고 소리 지르고, 제한시간이 되면, 「지칸데스. 테오쯔이떼時間です. 手をついて(시간입니다. 손을 짚고)」「맛타나시待ったなし(기다림 없음)」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경기에 임하는 리키시들의 정신을 집중시킨다. 양 리키시가 일어서는 것과 동시에 스모의 심판이 군바이軍配를 뽑는다. 이 때 스모의 심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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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키요이ハッキヨイ(發氣揚揚)! 」라고 기합을 넣는다. 이 「핫키요이ハッキヨイ」란, 「전력을 다해 승부하라」는 의미이다. 그 이후에「노콧따殘った」라는 말을 하며 이 말은「남았다」란 의미로, 양 리키시가 도효에 남아 있다. 즉, 승부는 아직 나지 않았다고 알리는 것이다.

스모 경기에서 심판의 판정에 대해 항의하거나 무례한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즉 심판 판정으로 승자가 가려지더라도 항의할 수 없으며, 찡그림이나 웃음 이상의 항의는 할 수 없다.


요비다시呼び出し

스모에서 또 하나 필수불가결한 이들 중 하나가 바로 
 
요비다시呼び出し라고 하는 장내 아나운서들이다. 이들은 매 경기 전 씨름판에 올라와서 독특한 음조로 다음에 겨루게 될 두 리키시를 소개한다. 그러나 이 소개 아나운서는 요비다시가 스모 경기 진행을 담당하는 수많은 분야들 중, 실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요비다시는 점토의 선택에서부터 경기가 시작될 때 양 리키시가 위치하는 백색선의 설치, 도효土俵의 설치에 필요한 모든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그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도효의 상태를 점검하고 유지하는 임무를 띤다. 또 휴식시간마다 요비다시는 씨름판에 물을 뿌리고 표면의 모래를 손질하며, 상위 두개 등급의 리키시들이 사용하는 치카라미즈力水(물)와 치카라카미力紙(종이), 소금이 충분한지 확인한다. 또한 최고 등급 대회에서 경기를 전후하여 종종 등장하는 켄쇼마쿠懸賞幕와 상금이 담긴 봉투인 켄쇼킨懸賞金을 관리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요비다시는 경기 진행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요비다시의 다른 주요 임무는 스모경기에 쓰이는 북을 연주하는 일이다. 그들은 대회 시작 하루 전에 각 훈련장을 돌아다니며 북을 연주해 다음날 대회가 시작함을 알린다. 또한 대회기간 중에는 오전에는 입장하는 관객을 환영하고 오후에는 환송하기 위한 연주를 하기도 한다. 연중 여섯 차례에 걸쳐 열리는 주요 대회 사이사이에 개최되는 지방대회 기간동안 요비다시들은 대회가 열리는 도시로 리키시들을 인도하는 등의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다. 교오지와 마찬가지로 요비다시들도 능력과 연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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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 계급을 부여받는다.

요비다시들은 보통 16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로에 입문하는 것이 보통이다. 최근에는 그들의 비중에 대한 인식이 높아져서, 대회전에 스모 협회가 발행하는 반즈케에 최고 계급의 요비다시의 이름을 수록하게 되었다.


토코야마床山

교오지나 요비다시와는 달리 토코야마라고 불리는 스모 선수의 
 
이발사들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많지 않다. 그들은 리키시의 독특한 머리모양을 만드는 중요한 일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대 뒤에 숨어있는 주인공들 중 하나다. 대다수의 도코야마들은 16세에 처음 입문하며, 가장 간단한 촌마게丁髷를 만드는 법을 습득하는 데에 2년, 그리고 보다 복잡한 최상위 두 계급 리키시들만의 전유물인 오오이쵸오大銀杏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데에는 5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도효(土俵)

스모 경기장을 도효라고 한다. 높이는 34- 60cm, 한 변이 6m 70cm인 정방형으로 찰흙이 채워져 있고, 그 가운데 직경 4m 55cm의 원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도효를 장식하고 있는 네 방향의 색깔은 각각 동쪽의 푸른색은 봄과 청용신(靑龍神), 남쪽의 붉은 색은 여름과 주작신(朱雀神), 서쪽의 흰색은 가을과 백호신(白虎神), 북쪽의 검은 색은 겨울과 현무신(玄武神)을 상징한다.

 









도효 위에는 츠리야네吊り屋根가 있는데, 1952년 9월 바쇼場所에서, 그 전까지 있던 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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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을 철거하고 지붕만 남긴 것이다. 이세진구伊勢神宮의 구조와 같으며, 지붕의 뼈대는 알루미늄 경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외부는 느티나무, 노송나무, 삼나무를 사용하고, 가로세로 각 10미터, 높이 8.6미터로 되어 있다. 또한 문장(紋章)이나 중요 부분은 순금으로 도금이 되어 있으며, 총 중량은 6톤이다.

미즈히키마쿠水引幕는  츠리야네吊り屋根 밑에 쳐져있는 보라색의 막이다. 폭 120Cm로 일본 스모협회의「벚꽃(櫻)」흰 문양이 그려져 있다. 미즈히키마쿠는, 원래 동쪽과 서쪽의 리키시가 최선을 다해 승부를 펼치면 열기가 달아오르므로, 이 때 물을 상징하는 막(幕)을 펴 도효土俵를 진정시켰다는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도효에는 아라키다쯔찌荒木田土라고 하는 붉고 차진 흙을 딱딱하게 두드려 고정시킨 후 위에 모래를 뿌려서 만드는데, 높이는 관중들이 보기 편하도록 유동적으로 조절한다고 한다.


3. 경기 방식


스모는 예의의 스포츠이다. 그래서 다른 스포츠에 비해 의식을 중요시 할 뿐 아니라 엄격하다. 이런 다양하고 복잡한 의식을 보고 있으면 스모는 승부를 요구하는 경기가 아니라 의식을 치르기 위해 스포츠란 형식을 빌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든다.

스모는 상대편 선수와 일정거리를 두고 시합이 시작되면 넘어뜨리거나, 모래판 밖으로 밀어내면 이긴다. 스모는 한판에 승부를 내는 단판승부로 만회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으며, 순간의 패배를 그대로 인정하는 일본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경기시간은 4분 이내로, 경기장에 소금을 뿌리는 의식으로 시간을 조절한다. 소금을 뿌리는 횟수는 3회까지 가능하며 3번 째 선수가 소금을 쥘 때, 진행요원이 수건을 들고 일어서면, 더 이상 경기를 지체할 수 없으며, 곧 바로 경기를 하여야 한다. 

스모는 타치아이立ち合い(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는 것)의 여하에 따라 승부가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순발력이 요구되는 운동이다. 경기장 밖으로 밀려나거나, 발바닥외의 신체의 일부분이 바닥에 닿거나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패하게 된다. 허리높이보다 더 높게 들려,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도 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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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칙(주먹으로 때리는 행위,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행위, 급소를 공격하는 행위, 양손으로 귀를 동시에 잡아당기는 행위, 목을 조르는 행위, 가슴과 배를 발로 차는 행위, 손가락을 꺾는 행위)을 하는 경우에도 경기에 지게 되며 마와시まわし(샅바)가 풀려도 경기에 지게 된다.


도효이리土俵入り
 

매일 마쿠우치幕內 시합 직전에 도효이리土俵入り라는 의식이 행해진다. 그리고 리키시들은 자기경기 순번의 2경기 전에 도효土俵 아래로 와서 대기하고 있다가 요비다시呼び出し의 호명에 의해 도효에 오른다. 


치카라미즈力水

도효 옆에 놓여진 물로 일종의 정화수이다. 리키시가 치카라미즈力水로 목을 축임으로서 기력을 왕성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리키시는 경기장인 도효土俵에 오르기 전, 몸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옆에 놓인 물통에서 치카라미즈力水를 떠 입을 헹구고, 치카라카미力紙로 입가의 물을 닦아낸다. 또한, 바로 앞 게임에서 이긴 리키시는 다음에 싸울 리키시에게 물을 떠주고 종이를 건네주며 승리를 기원한다. 반면, 패한 리키시는 그냥 퇴장하고 진행요원이 물과 종이를 건네준다.


키요메노시오淸めの鹽

리키시 力士가 도효에 등장해서 뿌리는 소금을 키요메노시오라고 한다. 동양 3국에서는 예로부터 소금이 나쁜 것, 즉 액운을 막아준다고 생각했다. 씨름판에 리키시가 등장하자마자 소금을 뿌리는 것은 부정을 막고 씨름판을 맑은 기(氣)로 채운다는 의미와 함께 소금의 살균력으로 리키시들이 시합도중에 상처를 입었을 경우 소독효과도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시코四股

도효에 오른 리키시가 각각 자기 코너에서 두 팔을 벌리고, 좌우 양다리를 한 발씩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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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게 높이 들어 땅을 구르고는 쪼그려 앉아서 상대방을 노려보는 의식이 시코이다. 이것은 지신(地神)에 경기를 알리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시키리仕切り

원형의 도효에 들어가, 처음에는 조금 떨어져서 서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시키리선(바닥에 평행하게 그어진 흰색 선)에 주먹을 놓고 준비하는 동작을 시키리라 한다. 타치아이立ち合い가 성립될 때까지 몇 번이고 풀었다가 다시 취하면서 신경전을 벌이는데 이 같은 준비자세의 반복은 리키시의 등급에 따라 그 횟수와 시간에 제한이 있다고 한다. 제한 시간이 되면 치리쵸우즈塵手水라는 의식을 하고, 씨름판 중앙으로 나와 발꿈치를 들고 쪼그리고 앉아 상대와 맞붙을 자세를 취한다.

 
 









타치아이立ち合い

준비자세에서 힘차게 몸을 솟구치며 격돌하는 것을 타치아이
 
立ち合い
라고 한다. 상대를 넘어뜨리거나 도효 밖으로 밀어내면 이기는데, 이용하는 기술에는 약 70가지가 있다고 한다. 주먹으로 때리거나 급소를 찌르는 등 반칙을 하면 반칙패를 당할 수도 있다. 「스모」의 승패는 단번에 결정되므로 시합이 시작될 때 얼마나 기합과 호흡이 잘 맞는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시합의 제한시간은 4분이며, 제한시간이 되면 심판위원이 교오지를 불러 시간을 알리고, 교오지는「지칸데스時間です(시간 입니다)」라고 리키시에게 주의를 준다. 승부가 결정되면 교오지가 「쇼오부앗따勝負あった(승부났다)」라고 말하고, 이긴 리키시(力士)쪽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치켜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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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나면 양 리키시는 서로에게 예를 표하고 경기에 패한 리키시는 그냥 퇴장한다.


승패와 퇴장

승부는 상대방 몸의 일부분이 먼저 땅에 닿게 하거나 도효 바깥으로 밀어내는 쪽이 이긴다. 이때 심판은 군바이軍配를 이긴 리키시 쪽을 가리키면서 어떤 수를 써서 이겼는가를 힘차고 확실하게 선언한다. 이긴 리키시에게는 심판이 즉시 상금이 담긴 봉투인 켄쇼킨懸賞金을 준다. 심판은 군바이에 켄쇼킨을 얹어서 전해주는데 리키시는 오른손을 펴서 좌, 우, 중앙으로 흔든 다음에 집어 든다. 이런 동작은 이번 판에서 이기게 해준 신에게 감사한다는 뜻으로 한다. 스모에서는 승부에 집착하면서도 승부에 대한 감정 표현을 극도로 자제해야만 한다. 이긴 리키시도 들뜨지 않으며, 졌다고 해서 관중 앞에서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는다. 심판의 판정에 따르며 승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도 훈련으로 단련해 나간다. 

매우 드믄 일이기는 하지만 도효 위에서 허리에 두르고 있던 마와시가 풀어져 내리면 역시 심판이 패배를 선언한다. 마와시는 긴 천을 접어서 허리에 두르고 뒤에서 매듭을 지어 묶을 뿐, 풀어지지 않도록 실로 꿰매거나 다른 도구는 쓰지 않는다. 이밖에도 반칙을 해서 지는 경우가 있다. 주먹으로 상대방을 때리기, 마게(상투)를 휘어잡기, 손가락으로 급소를 찌르기, 양 손바닥으로 동시에 얼굴을 때리기, 마와시의 앞부분에 손 집어넣기, 목 조르기, 발끝으로 배차기, 꼬집기 등은 반칙패가 되어 심판은 군바이를 올려 상대 리키시의 승리를 선언한다. 

진 리키는 바로 퇴장하지만, 이긴 리키시는 다음 시합할 리키시에게 치카라미즈力水를 주고, 하나미치花道(도효에 드나드는 길)로 퇴장한다.

 

유미토리시키弓取り式

그날의 경기를 마무리하는 의식이다. 마지막경기가 끝나고 특별히 선발된 마쿠시타幕下의 리키시力士가, 이 의식을 수행하는 심판에 의해 전해진 활을 들고 도효에 오른다. 이 의식은 에도시대에 이긴 리키시가 상으로 활을 받아 그 만족감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춘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F. 일본의 스포츠  279

4. 스모의 기술


스모는 특별한 기술 없이도 그저 상대방을 넘어뜨리거나 씨름판 밖으로 내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스모에도 우리의 씨름처럼 70여 가지 이상의 기술과 룰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 츠키다시突き出し: 상대의 가슴을 양손으로 떠밀쳐 도효 밖으로 밀어내는 기술로 반드시 손을 아래에서 위로 회전시켜 상대의 몸이 휘도록 해야한다.

◎ 오시다시押し出し: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손을 Y자 모양으로 만들어 상대의 겨드랑이나 옆구리를 밀어 도효 밖으로 밀어내는 기술.

◎ 오시타오시押し倒し: 쯔키타오시突倒し와 마찬가지로 상대를 도효 안이나 밖에서 눌러 넘어뜨리는 기술.

◎ 요리키리寄り切り: 허리를 상대에게 꼭 붙이고, 몸 전체를 이용해서 앞으로 전진 하여 상대를 도효 밖으로 내모는 기술.

◎ 요리타오시寄り倒し: 도효 안이나 밖에서 쓰러지면 요리타오시寄り倒し라고 한다.

 
 

 







 


 







F. 일본의 스포츠  280

5.  혼바쇼本場所


일년에 여섯 차례씩 열리는 큰 스모대회를 가리켜 혼바쇼本場所라 하는데, 혼바쇼를 통해서 오늘날 일본 스모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매번 15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는 혼바쇼는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서 전국에 중계 방송되며, 신문과 잡지에서도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소개함은 물론, 스모 세계의 숨겨진 이야기까지 구석구석 찾아내어 상세하게 보도한다. 

혼바쇼는 신년을 맞이하여 1월에 토오쿄오東京 료오고쿠 
 
코쿠기칸両国国技館에서 열리는 하츠바쇼初場所를 필두로, 3월에 오오사까大阪의 하루바쇼春場所, 5월에 료오고쿠 코쿠기칸両国国技館의 나츠바쇼夏場所, 7월 나고야名古屋에서 열리는 나고야바쇼名古屋場所, 9월 코쿠기칸의 아키바쇼秋場所, 11월 큐우슈우九州의 후쿠오까福岡에서 열리는 큐우슈우바쇼九州場所 등의 여섯 차례의 정규대회가 열린다. 리키시力士들은 하루에 한 경기씩 연간 총 90일간의 대장정을 치러야 한다. 혼바쇼가 열리지 않는 날에는 맹훈련을 해야 할뿐만 아니라 각 지방이나 외국을 순회하며 하는 스모대회, 후원 단체나 팬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 등 일년 내내 바쁜 나날을 보낸다. 

혼바쇼 15일 동안의 대진 일정표 가운데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일정표는 미리 짜 두지만, 셋 째 날 이후의 대진 일정은 리키시들의 성적에 따라 바로 전날에 대진표를 짜서 발표한다. 이런 대진 일정표 혹은 대진을 토리쿠미取組라고 한다. 

매일 매일의 대진 즉,토리쿠미取組는 하루 종일 진행된다. 한가한 관중은 아침부터 입장하여 첫 대진부터 관전하기도 하지만, 점심때가 지나서부터 서서히 관중이 모여들어, 저녁 무렵에는 초만원을 이룬다. 오전에 하급 리키시들의 스모의 시작으로, 점차 높은 등급 순서대로 진행되어 한낮에는 중간 정도의 리키시들의 스모가 이어진다. 저녁에는 마쿠노우찌幕内 리키시들의 대전이 있고, 당일 경기가 끝나기 직전에 산야쿠三役 리키시의 경기가 열리도록 토리쿠미를 짠다. 하위의 리키시라 해도 혼바쇼가 진행되는 동안 예상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얻는 경우에는 상위 리키시와 대전할 기회가 주어지며 관중들의 흥미를 고조시킬 겸 토리쿠미를 유연하게 짜는 것이다. 

F. 일본의 스포츠  281

6. 스모 선수들의 일생


견습선수들은 주로 고등학교 재학 중에 모집된
 
다. 선수들의 가족이 동의하면 오야카타親方(선수들에게 스모기술을 가르치고 생활을 보살펴주며, 감독하는 사람)는 그를 견습생으로 받아들이며, 스모 선수생활은 시작된다. 이들 견습생들은 헤야部屋 내에서 훈련하고 먹고 자며 생활의 통제를 받는다. 참고로 오야카타는 은퇴한 스모선수 출신으로 헤야를 경영한다.

견습생들은 많은 노력이 요구되며, 유능한 견습생이라도 세키토리關取(十兩이상의 리키시)의 봉급을 받기까지는 5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최고의 선수들은 결혼을 하여 헤야 밖에서 생활하기도 하지만 견습생 및 결혼 전의 스모선수들은 헤야를 유일한 집으로 생각한다. 견습생들의 생활은 엄격하다. 그들은 새벽 4시경에 일어나 마와시まわし를 메고, 케이꼬稽古(훈련)를 시작한다. 또한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리키시力士들의 심부름도 해야 한다. 훈련은 3가지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코四股(리키시가 발을 높이 들어 힘있게 땅을 구르는 동작), 텟포鐵砲(상대방을 떠밀어내는 동작으로 나무기둥을 손바닥으로 끊임없이 때려야한다), 마타와리股割り(가능한 한 다리를 넓게 벌리는 동작)가 그것이다.

일상적인 훈련은 정오경에 끝나며 선수들은 창코나베ちゃんこ鍋(스모선수들이 먹는 요리로서 큰 냄비에 굵직하게 토막 낸 생선이나 고기, 채소 등을 넣고 끓인 고 칼로리의 모듬 찌게)라고 하는 독특한 음식과 양념장, 오이지, 많은 양의 밥 등을 아침 겸 점심식사로 먹으며, 간혹 맥주 한 두병을 마시기도 한다. 이 엄청난 양의 식사가 끝나면 주로 낮잠을 자는데 많은 식사량과 식후 수면으로 체중이 급격히 증가한다. 이러한 훈련은 많은 선수들에게 질병과 부상 등을 유발시켜 중도 하차하는 선수가 많으며, 30세 이상의 선수가 선수생활을 계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F. 일본의 스포츠  282

7. 일본 문화가 깃든 스모


■ 사무라이문화

한국의 씨름은 3판 2승(결승전 제외)으로 승자를 가리는 데 비해 일본의 스모는 단판 승부이다. 한국의 씨름은 한번의 실수를 인정하는 반면 일본의 스모는 패자에게 더 이상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과는 달리 일본의 역사적으로 전쟁이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전쟁에서 한번의 실수는 죽음과 연결이 된다. 이것이 결승도 예선과 같이 단판으로 이어진 것이다. 


■ 복종

스모에서 심판은 절대적인 존재이다. 혹 심판이 잘못된 판정을 내리더라도 선수는 그 판정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한국의 씨름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양국간 차이를 볼 수 있다. 한국인은 자기주장이 강한 반면 일본인은 절대자의 한마디에 복종하는 편이다. 


■ 스모의 종교성과 흥행성의 관계

실제로 오늘날 오오즈모大相撲에서 연출되는 여러 가지 의식, 리키시의 동작 하나하나, 경기장의 장식 등에는 종교적인 색체가 짙게 깔려 있다. 천장에 드리운 네 기둥으로 구획되는 스모장, 즉 도효는 신성한 구역이어서 속세와 구별된 공간으로 인식된다. 

경기 전후에 손바닥을 치고 손을 모았다가 벌리고,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바닥을 힘 있게 밟는 일, 이긴 리키시가 다음에 싸울 자기편 리키시에게 물을 떠주는 일, 소금을 쥐었다가 힘껏 뿌리는 일, 상금을 받을 때 손을 좌우로 흔드는 일 등등 스모에는 의례적인 색채와 예절이 매우 중시되고 있다. 현대 스포츠의 하나인 스모 가운데서 스모의 흥행성과 종교적 성격을 동시에 발견하게 된다. 


■ 일본 스모의 성공

일본의 스모는 한국의 씨름과 비교된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스모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반면에 씨름은 어려움을 격고 있다. 어떻게 스모가 인기 있는 스포츠가 되었는가?

스모는 씨름이 변형된 것이다. 백제 왕족을 환영하는 행사로 시작해 일본 황실의 상징적인 제의(祭儀)로 발전했다. 스모 선수들의 싸움은 선과 악을 대표하는 신들의 전투라고 해석한

F. 일본의 스포츠  283

다. 즉 스모 선수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천황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따라서 천황의 절대적인 믿음 때문에 스모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불안한 건 사실이었다. 천황에 대한 대중의 인기도가 내려가면 스모 관람객 수가 줄어들었다. 변수가 많았다. 게다가 점점 개인적으로 변해가는 현대인의 구미에 스모가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결과 스모의 인기는 점점 하락해갔다. 1990년대 초부터 스모는 극심한 침체기를 맞았다. 반면 1990년대 초에 등장한 K- 1과 프라이드 등 종합격투기는 빠르게 성장했다. 스모의 위기는 심화되었다. 선수들이 이탈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씨름과 비슷한 처지였다. 

하지만 이때부터 스모협회는 방향을 전환했다. 아무런 이벤트 없이 ‘고유의 전통’이라는 프리미엄만으로 관중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신’으로 추앙되던 선수들은 스스로의 지위를 포기했다. 만화복장을 흉내 내는 ‘코스프레’를 하며 경기장에 등장했다. 충격이었다. 그리고 신선했다. ‘고리타분한 신’이었던 스모 선수들이 ‘보통 사람’이 되자 많은 일본인이 새로운 눈으로 스모를 바라봤다. 

그뿐 아니었다. 자극적인 것보다 기발한 이벤트로 가족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에 집중했다. ‘아기 울리기 대회’가 대표적인 것이었다. ‘아기를 울리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속설 때문에 스모 선수들은 경기장을 찾은 갓난아기를 안고 험상궂은 표정으로 울리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위로 올려보며 경외시하는 스모가 아니라 인간미가 숨어있는 동등한 시선에서 바라보는 스모가 된 것이다. 가족 중심의 관중이 급증했다. 예전의 인기가 부럽지 않았다. 대중에게 스모가 친근하게 다가오자 마케팅도 활발해졌다. 스모선수의 모습이 새겨진 미니어처, 티셔츠 등 용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2004년 6월에 한국에 개봉한 스모부를 살리기 위한 해프닝을 다룬 코미디 영화 ‘으랏차차 스모부’  역시 스모의 이런 변화가 반영된 작품이었다. 

그러자 이종격투기에서도 스모는 다른 차원의 종목으로 인식했다. 스모의 신성함과 대중화는 이종격투기와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 즉 대립하는 라이벌 관계가 아니라 공생관계로 서로에게 도움과 자극을 주고 있다. 우리처럼 무차별적인 선수 빼내기도 없다. 일본 스모의 최고봉 요코즈나横綱에 올랐던 아케보노는 2003년 K- 1으로 전향했다. 그러나 아케보노는 특수한 경우다. 하와이 출신의 아케보노는 혼혈 선수이기 때문에 K- 1 진출이 가능했다. 결국 아케보노의 파이터 전향은 일본 스모계에 그다지 큰 파장을 미치지 못했다. 스모협회는 연간 111억 엔 정도의 수입을 올리는 알짜단체가 됐다. 연간 20억 원 정도인 한국씨름협회 수입과는 비교가 안 된다. 씨름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상급 스모선수로 성장한 김 성택은 130만 엔 정도의 월급을 스모협회로부터 받는다. 그리고 연간 스폰서비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원 받는다. 윈·윈 게임이다. 협회도 살고 선수도 살았다. 자존심을 버리고 팬의 눈높이에 맞는 이벤트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국민의 사랑을 얻었다. 갖가지 악재가 겹쳐 있는 씨름계에서 시금석으로 삼아야 할 일본 스모의 변화다.

F. 일본의 스포츠  284

Ⅱ. 프로야구


1. 일본인과 프로야구プロ野球

 

일본은 야구의 나라다. 야구로 날이 밝고 야구로 날이 샌다. 스포츠 분야에서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톱뉴스도 야구고, 한해를 마감하는 톱뉴스 역시 야구다. 가판대의 스포츠신문은 예외 없이 프로야구를 톱기사로 다루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는 일본인 자신들이 옛날부터 국기로 자랑해 오던 스모를 제치고 최고인기 스포츠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순수 서양식 운동경기인 야구가 토양이 판이한 일본에 이식돼서 단단히 뿌리를 박고 크게 성장한 데는 그럴만한 연유가 있을 것인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일본에는 처음부터 프로야구가 튼튼하게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추어 야구가 꾸준히 인기를 유지해 줌으로써 우수선수가 많이 배출되고, 그 선수가 팬을 몰고 프로야구에 투신하면 프로야구 인기는 자연히 그만큼 더 올라가게 된다. 인기가 높아질수록 프로야구를 지망하는 우수선수가 더 많이 커 올라와서 프로의 전력을 보충하면서 인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이상적 순환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둘째는 모방과 변형을 절묘하게 조화시켜 전혀 새로운 형질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장기로 하는 일본인 특유의 국민성이다. 문호개방 후 산업사회를 추구하던 메이지 시대 초엽부터 그들은 서구문물을 들여다가 오직 모방과 변형으로 자신의 풍토에 알맞도록 개조하여 마침내 그 원본을 창조한 서구 열강을 따라잡는 데 성공했다. 야구도 근본은 모방하되 일본인 취향에 맞게끔 오밀조밀한 기술을 고안하여 이를 적절하게 가미해서 잔재미가 넘치는 동양적 야구로 살짝 변형해 놓았다.

셋째는 타 종목에 앞서서 일찍 프로화한 점이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30년대 중반 무렵에는 현대 스포츠가 모두 일본에 들어와 있었지만 프로화 된 종목은 복싱뿐이었다. 이런 프로 스포츠 불모시대에 탄생하였지만 전시 하에서도 프로야구는 용케 버티어 냈고 전후 혼란기에는 재빨리 부활하여 경제도약기에 접어들면서 프로야구는 일약 여가 선용의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다. 어느 종목보다 짜릿한 재미와 극적 장면을 많이 보여 주는 프로야구는 극히 자연스럽게 최고 인기스포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F. 일본의 스포츠  285

2. 고교야구의 상징 ‘코오시엔甲子園

 

일본 프로야구 성장의 토대이자 원동력인 고교야구는 우리에게 ‘갑자원’이란 말로 익숙하다. 일본의 고교야구팀 수는 99년 통계로 4200여 팀에 달하고 등록된 선수 수는 약 15만 명에 이른다. 코오시엔이라는 것은 오오사카大阪에 소재한 한신코오시엔阪神甲子園 구장에서 전국 규모의 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대회의 공식 명칭은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와「선발고교야구대회」이다. 전자는 7~8월중에 벌어지는 관계로「여름코오시엔甲子園」이라 부르고, 후자는 3~4월중에 열려「봄코오시엔甲子園」또는「센바츠選拔」라 부른다.

대회방식은 전국 49개 지구에서 지역대회를 거친 최정예 팀이 참가한다. 홋카이도北海道 등 10개 지역의 추계대회에서 선발된 36개교가 다음해 봄에 코오시엔에 모여 결전을 치르는 방식이다. 흔히 일본의 고교야구선수들의 목표는 '코오시엔' 땅을 밟아 보는 것. 따라서 3년 내내 코오시엔 그림자도 밟아보지 못한 선수들이 허다한 실정이다. 고교선수들에 있어 코오시엔 무대는 바로 '꿈의 무대'인 셈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일단 코오시엔 무대에 서면 언론이며 각 프로팀들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프로선수 프로필에도 일단 코오시엔 출장 경험 유무가 중요한 경력으로 등재된다. 코오시엔 출전 자체가 중요한 경력일진대 그 무대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면 '코오시엔의 영원한 스타'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프로 진출 시 상당한 몸값을 보장받는다. 


3.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


일본의 야구의 역사는 대략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에 야구가 처음 보급된 것은 1870년 호레이스 윌슨이라는 미국인에 의해서이다. 그 뒤 1913년 시카고 화이트 삭스와 뉴욕 자이언츠 팀이 일본대학팀과 3차례 시범경기를 벌였고, 1922년 이미 일본 최초의 프로팀인 NUK(일본체육협회)가 창단 되었으나 별다른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F. 일본의 스포츠  286

 
1934년 일본프로야구 초대 커미셔너인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가 사주로 있던 요미우리신문사는 MLB(미국 메이저리그) 혼성팀을 초청하여 친선경기를 벌였는데, 이 경기서 일본팀의 사와무라 에이지沢村栄治투수(당시 고교생)는 이들을 철저히 농락하여 9탈삼진을 뽑아냈으나 루게릭에게 홈런을 맞아 1대0으로 패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일본에 프로야구가 공식 출범한 것은 1936년. 두해전인 1934년 「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토오쿄오 쿄진군東京巨人軍: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설립을 시작으로, 1935년「大阪野球倶楽部」(오오사까 타이가스大阪タイガース:한신 타이거즈)이 설립되었으며, 1936년에「日本職業野球連盟」이 설립되고,「大日本野球連盟名古屋協会」(나고야군名古屋軍:주니치 드래곤즈)「東京野球協会」(토오쿄오 세네타스東京セネタース)「名古屋野球倶楽部」(나고야 킨코군名古屋金鯱軍)「大阪阪急野球協会」(한큐우군阪急軍:오릭스 블루웨이브)「大日本野球連盟東京協会」(다이토오쿄오군大東京軍)등 7팀이 현재와 같은 페넌트 레이스를 펼쳤다.

직업야구가 출범한 후부터 9년 뒤인 1944년, 일본 군부의 프로야구 중지 명령과 함께, 사와무라沢村 선수를 비롯하여 많은 선수들이 군의 소집을 받아 전선에 배치되어 전사하는 등, 일본에서의 프로야구는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한 후 10년 전 프로야구 출범 당시에도 중심적 역할을 했던 요미우리 신문사주인 쇼리키 마츠타로正力松太郎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같은 해 11월 23일, 진구우神宮 구장에서 ‘프로야구 부활 제1회 동서대항 경기’를 열었다. 1949년 시즌이 마감되자 본격적인 프로야구는 분리작업에 들어가고, 양 리그제를 결성하면서 명칭도 직업야구에서 프로야구로 바꾸었다. 즉, 오늘날과 같은 양대 리그는 1950년에 발족한 것이다. 요미우리를 위시하여 쇼오치쿠・츄우니치・한신・타이요・니혼햄・코쿠테츠・히로시마 등이 소속된 센트럴리그(CL)와 마이니치・난카이・토오큐우・니시테츠・타이에이・긴테츠・한큐 등 이 소속된 퍼시픽리그(PL)가 그것이다. 이에 1950년부터 양대 리그 챔피언이 MLB(미국 메이저리그)처럼 재팬시리즈(JS)를 벌여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후 각 팀들의 열띤 경기와 야구팬들의 뜨거운 호응으로 일본의 프로야구는 명실 공히 일본 최고의 프로 스포츠로 자리 잡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F. 일본의 스포츠  287

4. 일본 프로야구 시스템


 


■ 일본야구는 센트럴리그(6개 구단) 와 퍼시픽리그 (6개 구단) 의 2리그로 구성되어있다.

■ 각 리그에서 우승한 팀이 일본시리즈를 열어서 그 해의 일본 챔피언을 가린다. 

■ 센트럴리그는 퍼시픽리그보다 더 열광적이며 유명한 팀들이 많다. 또한 센트럴리그는 팬들이 많다. 그래서 야구장이 언제나 꽉꽉 찬다. 반면에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보다 팬들이 적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구장이 한산하다. 또한 관중이 많고 적음에 따라 구단 수입에도 차이가 나서 같은 레벨의 선수라도 센트럴리그의 선수들의 연봉이 높다.


 



■ 센트럴리그

 




구단명

연고지역

본거지구장

수용인원

평균관객수

요미우리자이언츠

東京

東京돔

45,600

39,626

야쿠르트스왈로즈

東京

明治神宮野球場

37,933

18,019

요코하마베이스타즈

神奈川県

요코하마스타지움

30,730

15,158

츄우니치드라곤즈

愛知県

나고야돔

38,414

32,859

한신타이거즈

大阪府・兵庫県

甲子園球場

50,454

43,218

히로시마카프

広島県

広島市民球場

31,984

13,829

F. 일본의 스포츠  288

■ 퍼시픽리그

 




구단명

연고지역

본거지구장

수용인원

평균관객수

니혼햄파이터즈

北海道

札幌돔

43,473

23,581

라쿠텐골던이글즈

宮城県

宮城球場

23,000

13,996

세이부라이온즈

埼玉県

西武돔

35,879

17,597

오릭스버펄로즈

大阪府

大阪돔

36,477

20,445

兵庫県

神戸野球場

35,000

치바롯데마린즈

千葉県

마린스타지움

30,200

19,848

소프트뱅크호크스

福岡県

福岡돔

35,695

29,964


5. 일본 프로 야구의 상징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명과 암


■ 자이언츠 중심의 구조

일본의 프로야구는 프로라고 불리지만, 실태는 다른 아마추어 스포츠와 같은 일본형 기업스포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너 기업에 의해 보유되어지는 구단이 기업 내의 일체감의 양성과 외부 선전효과를 기대하는 점에서 프로야구는 축구의 J리그를 제외한 타 경기의 리그와 본질적으로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프로야구는 한 가지 다른 스포츠리그와 크게 다른 부분이 있다. 다름 아닌 요미우
 
리 자이언츠의 존재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모회사인 요미우리신문이나 니혼TV 등 요미우리 그룹의 전국적인 대량보도에 의해, 다른 구단과는 다른 차원의 인기를 누리어왔다. 1950년대 말기, 텔레비전에서 야구 중계가 본격화되자, 많은 프로야구 시합 중에서 니혼TV 계열의 자이언츠전만이 매일 전국 중계되는 시기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이 시기는 1951년부터 3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이 고도경제성장을 시작하던 1950년대에만 8번의 일본시리즈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1960년대 전반에 2번의 우승을 더 

F. 일본의 스포츠  289

추가하고, 진정한 일본의 경제성장이 빛을 발하던 1965년부터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결국, 일본이 전후경제성장과 요미우리자이언츠의 활약상이 맞물려 시너지효과를 거두어, 일본인의 약 8할이 자이언츠 팬이라고도 말해질 만큼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히 최근까지도 야구중계가 자이언츠전 밖에 방영되지 않는 지방도 많았고, 좋아하는 구단을 말해라면 거의 100%가 자이언츠라고 할 정도로 팬이 편중되었다.

이런 구조에 의해, 프로야구는 극단적인 자이언츠 중심으로 운영되는 폐단도 있었으나, 다른 스포츠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대중이 야구를 접할 기회가 많아, 프로야구 구단을 보유하는 것에 의한 선전효과는 다른 스포츠에 비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엄청난 적자에 허덕이는 구단을 모회사가 지지하여, 현재도 역시 많은 신흥회사들이 프로야구 참가를 희망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자이언츠의 인기가 타구단의 경영도 지원하는 측면이 있어, 1990년대 중반까지는 안정되게 20% 전후의 고시청율을 확보해 온 자이언츠전의 방영권료는 현재에도 한 시합 당 1억 엔이라고 말해지며, 센트럴리그의 각 구단은 매년 다액의 수익을 자이언츠전에서 얻고 있다. 이런 연유로 자이언츠전과의 경기 감소는 그 자체가 센트럴리그 타 구단의 경영을 압박하는 것이 되어, 2005년부터 시작된 센터럴・퍼시픽리그 교류전이 2007년도에는 시합수가 삭감된 것은 이러한 사정에 의한 센트럴리그의 타 구단으로부터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프로야구 전체가 자이언츠에 과도하게 의존해 운영되기에, 자이언츠는 구계에 있어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특히 1990년대 중반부터는 FA제도나 드래프트 역지명 제도를 이용해, 풍부한 자금력으로 유력선수들을 독점하는 강력한 보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것이 리그 전체의 전력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자이언츠 나아가서는 프로야구 전체의 인기 저하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가 없다.


■ 자이언츠 인기의 저하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일본인 선수의 메이저리그에의 진출이 2000년대에 들어서 가속되고, 그전까지 국내 문제로만 해결되었던 일본프로야구의 존재가 커다란 전환국면을 맞이하였다. 한때 전력 집중화의 구도는 완전히 무너졌고, 사실 자이언츠는 2003년 이후 리그 우승조차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 또 최근 인터넷이나 위성방송 등 미디어의 급속한 

F. 일본의 스포츠  290

 
발달로 전국 어디에서나, 12구단 전 시합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의 시청도 가능하게 된 점, 또 퍼시픽리그 구단의 본거지 분산 및 지역 밀착형 경영에 힘입어 팬의 지지가 급속도로 다양화해져, 자이언츠 일변도에서 개인 기호에 따른 구단 선택하는 경향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요인에 의해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이언츠전의 시청률은 계속 하락해, 지상파 방송의 감소나 CM 수입의 감소는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최근 자이언츠전의 시청률이 저하된 것은 성적부진과 우승을 하지 못하는 이유이며, 자이언츠가 이기기 시작하면 시청률은 올라 갈 것이다’ 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2006년 4월은 자이언츠가 개막 대시에 성공해 호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이언츠전의 월간 평균 시청률이 12.6%로, 1989년 데이터를 취합한 이후 최저 기록을 경신했다. 즉 이겨도 시청률이 오르지 않는 심각한 인기저하 상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2007년 시즌은 니혼TV가 자이언츠전 중계의 대폭 삭감(위성방송으로 이전)을 결정했고, 이에 따른 고액의 방영권료 재검토 움직임이나, 미디어가 야구로부터 멀어짐에 의해 따른 인기 저하가 그대로 프로야구 전체의 침몰을 야기할 것이란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다. 


6. 데이터와 단체야구


일본의 야구 정보 분석력은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라고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분석은 다하는 게 일본야구라고 하겠다. 야구가 한 경기 끝날 때마다 생산하는 기록은 수백 가지인데, 이 기록을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해서 분석하고 도표화하며 앞으로의 경기를 전망한다. 그래서 한국에서 활약하다 일본으로 갔던 선수들이 자기도 모르는 버릇을 일본에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투수의 버릇은 물론이고, 타자의 경우에도 분석은 필수적인 것으로, 특히 이승엽 선수가 홈런 신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날씨에 따른 홈런 지수를 데이터화해서 신문에 실린 적도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데이터를 자료화해서 분석하고 또 그것을 활용하는, 즉 야구는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한다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그리고 일본은 단체행동에 관해 대단히 엄격하며, 규율이 철저하다. 

일본 프로야구를 다룬 영화 중에 Mr. Baseball 이란 미국영화가 있다. 뉴욕 양키즈의 스타선수 (Tom Selleck이 주연)가 팀의 루키와의 경쟁에 밀려 일본의 츄우니치드래곤즈에 

F. 일본의 스포츠  291

 
트레이드되고 만다. 일본에서도 개인주의적인 경향 때문에 슬럼프에 빠지나, 일본 감독의 지도와 일본 여자 친구를 통한 일본 문화의 적응 후, 다시 자기 페이스를 찾고, 그러다 메이저리그의 한 구단이 그를 다시 발탁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일본의 야구를 대변하는 영화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즉 일본 야구는 감독과 단체행동에 의한 야구라는 것이다. 개성이 강한 선수일지라도 개인적인 생각에 의한 플레이는 할 수가 없다. 오직 감독의 지시에 의한 플레이를 요구한다. 실제로 이종범 선수가 팀에 적응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경기 중에 감독이 작전을 너무 많이 걸고, 감독의 지시에만 따르는 수동적인 자세를 요구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이종범 선수 특유의 개인적인 센스를 전혀 발휘할 수 없게 되어 성적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야구를 “감독의 야구”라는 말까지 나온다. 미국의 메이저리그는 팀이 선수 중심의 선수의 개인적인 생각을 존중해주는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7. 취소된 홈런


2006년 6월 11일, 롯데와의 교류전에서 이승엽 선수의 홈런이 취소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3회 초, 2사 1- 1의 동점 장면에서 오제키 타츠야小関竜也를 1루에 두고, 이승엽이 와타나베 슌스케渡辺俊介 투수로부터 우중간 홈런을 쳐 역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자와 타자가 들어오고 난 뒤, 이마에 토시아끼今江敏晃 3루수가, ‘1루 주자 오제키小関가 3루를 돌 때, 3루 베이스를 밟지 않고 돌았다’고 주장, 니시모토 킨지西本欣司 3루심이 이를 받아들여 오제키선수는 아웃이 되었다. (일본 야구규칙 7.10) 홈에 생환하기 전에 3아웃이 되었기 때문에 이승엽 선수의 득점은 인정되지 않고, 싱글 히트로 기록되었다. (일본 야구규칙 7.12) 홈런을 친 선수가 베이스를 밟지 않아 아웃이 된 경우는 있었지만, 주자가 베이스를 밟지 않아 싱글 히트가 된 경우는 프로야구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라 타츠노리原辰徳감독은 이 판정에 대해 항의를 했지만, 니시모토 3루심이 ‘밟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이 있다’라는 말에 더 이상 항의를 하지 않았다.

다음날, 자이언츠는 해당 장면의 비디오테이프(방송국의 촬영영상)를 공개하고, 판정은 오심이었다며 영상을 DVD에 담아, 센트럴 야구연맹에 제소를 하였다.

6월 19일 연맹으로부터 ‘심판의 판단에 따른 판정은 최종적이다’(일본 야구규칙 9.02(a)) 라는 점과, 야구규칙에 영상판정의 규정이 없기 때문에 ‘검정 결과를 논평할 수가 없다’란 

F. 일본의 스포츠  292

 
회답이 돌아왔다. 즉 오심인가 아닌가에 대한 코멘트는 회피한 회답이었다. 또 ‘영상으로 확인한 바, 해당 판정이 다를 수도 있는 것은 유감이지만 사실’ 이긴 하지만, ‘야구는 육안에 의해 판정되는 경기이고, 그 원칙은 지켜져야만 한다, 그래서 비디오 판정의 도입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구단은 다시 항의서를 제출했고, 똑같은 회답이 회신되어, 그 이상의 항의는 보류되었다.

한편.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는지, 2007년부터 시범경기에서 홈런에 한해서 비디오 판정을 도입하기로 결정되었다. 

























F. 일본의 스포츠  293

Ⅲ. 일본 프로축구


1. 일본 프로축구의 역사


■ 축구의 역사


‣ 유래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에서 발을 이용한 공놀이를 찾아볼 수 있으며, 어느 것이 기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 고대 그리스 : BC 7∼6세기 무렵에 고대 그리스시대에 에피스키로스(επισκυρος)라는 공을 차고 던지는 간단한 형식의 놀이가 있었다. 

• 고대 중국 : 츄슈(蹴鞠 또는 蹴踘)라는 놀이가 있었다. 

• 고대 한국 : 삼국시대에 축국이라는 이름의 놀이가 있었으며,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다. 

• 고대 일본 : 케마리(蹴鞠)라는 놀이가 있었으며, 역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 근대 축구의 확립

축구를 레크레이션으로 수용해, 근대적인 스포츠로 성립시킨 것은 영국의 퍼블릭 스쿨 (Public school) 영국의 교육제도로, 중세부터의 전통을 가진 사립의 전원 기숙사 제도의 중등학교. 유복한 계층(주로 젠틀맨 계층)의 자녀들이 들어갔다.

퍼블릭 스쿨에서도 처음에는 놀이에 가까운 형태로 행해졌지만, 점차 자녀교육의 일환인 스포츠로서 체재가 잡혀져 갔다. 이때의 축구는 학교마다 규칙이 달랐고, 다른 학교와 시합할 경우는 서로 조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규칙의 통일을 위한 협의가 행해졌으나, 1850년대까지는 이튼 칼리지를 중심으로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규칙과, 럭비 스쿨을 중심이 된 손을 사용하는 규칙의 두 세력 사이는 좀체 통일의 여지가 보이지가 않았다. 오랜 대립을 해소하고자 1963년에 런던에서 최종적인 규칙 통일을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 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결렬이 축구 탄생의 시작이었다. 손을 사용하지 못하는 규칙을 주장한 측의 대표자들이 모여 풋볼 어소시에이션(Football Association)이 설립되어, 풋볼을 

F. 일본의 스포츠  294

협회식 풋볼(Football)로 부르게 되고, Association에서 soc를 따와, ‘사람’을 의미하는 - er을 붙인 것이 soccer의 어원이고 1880년대부터 사용하였다고 한다.


■ J 리그의 역사


‣ J리그의 발족

J리그가 발족되기 전까지 일본 축구의 전체적인 환경은 빈약하였다. 이미 일본리그(JSL)가 있었으나 한 시합 당 관객동원 수는 1000~3000 명 정도였다. 천황배 일본축구선수권대회 등을 포함한다면 연간 20~30만 정도가 되었다. 국가대표 시합도 지방의 소규모 경기장에서 개최되었고, 게다가 관객석도 텅 빈 상태였었다. 사회인 톱클래스 팀도 연습 설비가 부족하고 경기장의 잔디도 겨울이 되면 노랗게 변하고, 비가 오면 웅덩이가 여기저기 생기는 상황이었다. 선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아마추어였고, 대부분 회사원으로 일 때문에 축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 당시 FIFA회장이었던 아베란제가 아시아 최초로 월드컵 개최를 일본 축구협회에 타진하자, 단숨에 프로리그의 구상이 추진되었다. 이윽고 일본축구협회의 주도에 의해 일본프로축구리그(J리그)의 발족이 결정되고, 첫 해에는 10개 팀이 참가하여 1992년에 J리그 야마자키 나비스코컵 대회가 열렸다.


‣ J리그의 태동과 버블(1993년 -  1995년)
 

1993년 5월 15일, 화려하게 개막한 J리그는 여태까지 인기있는 프로스포츠라고는 프로 야구, 골프, 스모 정도밖에 없었던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시합은 매일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으며, 경기장에는 많은 관객이 방문했다. 관련 상품들도 많이 팔려나갔고, 클럽에는 막대한 수입을 안겨다 주었다. 1993년에는 신조어・유행어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개막 초기에는 ‘세계 유명선수의 양로원’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계의 올드 스타가 모여들었으나, 1994년 월드컵 후에는 전례가 없던 높은 가격을 제시하여 세계의 현역 톱 플레이어들이 모여들었다. 그 해의 한 시합 당 평균 관객 동원 수는 19,598명으로 그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경기장의 정비 상태도 현재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했지만, 평일임에도 관객이 모여들어, 당시의 높은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개막 당시, J리그의 ‘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경영’, ‘지역주민과 자치체와의 연대’라는 방침은 일본에 있어서 극히 이색적이며 강한 독자성을 보였으나, 초기에는 ‘프로야구의 

F. 일본의 스포츠  295

축구판’이라고 보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또한, 초기에는 선수의 연봉이 국제 시장가격과 비교하여 너무 높이 책정되어, 이후의 J리그 각 클럽이 경영 압박받는 요인이 되었다.

이 시기는 현재 시점에서는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축구의 인지도가 거의 상상도 못할 만큼 향상되어 일본 축구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많은 거물 외국인 선수와 유명감독과의 우호적인 관계도 대부분은 이 시기에 쌓아졌다.

1994년에는 팀의 정식 명칭으로부터 모회사의 이름을 빼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로 인하여 클럽의 오너와 J리그 협회 간에 마찰이 시작되어 J리그 경영에 큰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 J리그의 버블 종식과 클럽 경영의 위기(1996년 -  2000년)

순조롭게 발전하던 J리그였으나 그 이후부터 인기가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관객 동원수도 격감해 1994년에 19,598명을 기록한 평균 관중수도 1997년에는 10,131명으로 불과 3년 만에 반으로 줄었다. 

J리그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던 1996년, J리그는 ‘J리그 백년구상’을 발표하였다. 그것은 기업의 스폰서에서 벗어나서 지역에 연고를 둔 스포츠의 존재방식을 모색하자는 취지의 이념으로, 적극적으로 클럽수를 확대하여, 최종적으로는 전국에 100개의 클럽을 만들자는 목표였다.
 

그리고 1998년에는, 요코하마 마리노스와 요코하마 후류겔스와의 합병이 발표되었다. 요코하마 후류겔스는 당시의 J리그 클럽 중에서는 비교적 인기가 있었고, 성적도 상위에 정착하고 있었던 클럽의 퇴출은 J리그의 이념과 일본 사회의 스포츠에 대한 사고방식의 괴리가 낳은 비극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요코하마 후류겔스의 사실상의 후계자로 요코하마FC가 발족했는데, 대부분의 팬틀은 이 사건에 실망해서 관객석을 외면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심각한 위기를 맞은 J리그도 프랑스 월드컵에 일본이 출장하게 되고, 한일 공동으로 월드컵이 개최가 결정되자 서서히 관객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9년에는 J리그 참가를 희망하는 클럽이 증가해, 2부제를 도입한다. 이를 계기로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J클럽이 전국 각지에 탄생하게 되었다.


‣ J리그의 부활과 지역밀착형 경영(2001년 - 2005년)

월드컵 개최가 결정되고, 2001년부터 장기간 침체되어 있던 J리그가 크게 호전되었다. 특히 아루비렉스 니이가타アルビレックス新潟로 대표되는 지방도시 클럽이 활기를 뛰며 J리그를 

F. 일본의 스포츠  296

 
활성화시켰다. 미디어가 주도한 발족 당시의 인기에 반해, 2001년 이후의 인기회복은 지역과 지방도시의 활약이 컸다. 본거지를 프랜차이즈(독점적 상업지)가 아닌 홈타운이라고 부르게 한 것은, 지역주민이 자기 마을의 클럽이라는 인식을 강력히 가지게 하여, 서포터라고 불리는 열광적인 팬을 늘려 리피터 효과에 의해 관중수를 늘렸다. 또한 과거에는 소수의 기업 등이 클럽을 보유하였으나, 현재에는 대형 스폰서뿐 아니라 지자체와 지역의 시민들이 오너가 되어 클럽을 운영하는 시민구단도 다수 생겨났다.

또한 2002년 월드컵 때 전국 각지에 세운 대형 경기장은, 이때까지 경기장에 들어가고 싶어도 관람석이 부족해 관람을 포기한 관객도 관전이 가능하게 하였다. 또, 종래에는 대도시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프로스포츠의 경영도 지방에서도 된다는 것을 증명하여, J리그에 입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클럽이 지방도시를 중심으로 증가되었다.

2부 리그의 도입에 의해 J1과 J2로 바뀌어 진행되어, J1하위 팀의 동향에도 주목이 집중되는 것과 함께 J2에도 대표선수가 소속되어, 일본국가대표의 시합이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이 현상은 J리그 발족 당시부터 지향하여 왔던 것으로, 10년 이상이 걸려 겨우 정착되고 있다고 각 미디어들은 분석하고 있다.


‣ J리그의 현재와 미래(2006년- )

J리그는 06년 현재, J1, J2 합해 31 클럽이 소속해 있다. J리그의 장래 구상 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2010년까지 36 클럽(J2를 18 클럽)에 확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또한, 리그 전체의 경기 레벨을 유지하기 위해, 당초 예정되어 있던 JFL와의 교체는 당분간 실시하지 않고, 서서히 J2의 확대를 해나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J리그 공백 지대인 동북지방 북부 · 중부지방 서부 · 남부지방 서부 · 큐우슈우 남부 · 오키나와 등의 지방에도 팀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또 팀의 증가에 따른 레벨 저하의 우려와 외국인 제한수도 더 늘려야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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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 리그의 구성


■ J 리그의 시합방식

18팀이 2번씩 홈엔 어웨이 방식으로 대전해, 1시즌(34시합)의 성적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승점은, 승 3점, 무승부 1점, 패 0점으로 산정한다. 최종적으로 승점이 많은 팀이 우승. 동점의 경우는, 득실점차 →총 득점수 →직접대결성적 →추첨으로 정한다. 단, 우승결정의 경우에는 추첨을 하지 않고 두 팀을 공동우승으로 한다.

17, 18위의 팀은 자동적으로 J2로 탈락하고, 16위 팀은 J2의 3위 팀과 플레이오프전을 해서 이긴 팀이  J리그에 올라간다. 


■ J 리그 참가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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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1 (18클럽)

카시마 안토라즈

(鹿島アントラーズ)

우라와 렛즈(浦和レッズ)

오오미야 아루디쟈

(大宮アルディージャ) 

제프유나이텟드 치바

(ジェフユナイテッド千葉)

카시와 레이소루(柏レイソル) 

FC 토요쿄오(FC東京) 

카와사끼 후론타레

(川崎フロンターレ)

요코하마 F 마리노스

(横浜 F・マリノス) 

요코하마 FC(横浜FC) 

봔포레 코오후(ヴァンフォーレ甲府) 

아루비렉스 니이가타(アルビレックス新潟) 

시미즈 에스파루스(清水エスパルス) 

쥬비로 이와타(ジュビロ磐田)

나고야 그란파스에이토

(名古屋グランパスエイト)

간바 오오사까(ガンバ大阪) 

빗세루 코오베(ヴィッセル神戸)

산후렛체 히로시마

(サンフレッチェ広島) 

오오이타 토리니타(大分トリニータ) 


J 2 (13클럽)

콘사도레 삿포로(コンサドーレ札幌) 

베가루타 센다이(ベガルタ仙台)

몬테디오 야마가타

(モンテディオ山形) 

미토 호리홋쿠(水戸ホーリーホック) 

자스파 쿠사츠(ザスパ草津)

토오쿄오 베루디 1969

(東京ヴェルディ1969) 

소오난 베루마레(湘南ベルマーレ)

쿄오토오 산가 FC

(京都サンガF.C.)

세렛소 오오사까(セレッソ大阪)

토쿠시마 보루티스

(徳島ヴォルティス)

에히메 FC(愛媛FC)

아비스파 후쿠오카(アビスパ福岡) 

사강 토스

(サガン鳥栖)


■ J 리그의 대표적인 스타디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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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 리그의 정신


■ J 리그의 이념

J리그의 이념이자 기본 정신은 한마디로 말해 페어플레이이다. 페이플레이란 스포츠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중요한 이 정신을 축구를 통해 육성하고자 하는데, 다음의 4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 규칙을 정확히 이해하고 지킨다.

‣ 규칙의 정신을 이해한다.

‣ 심판에게 경의를 표한다.

‣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한다.


■ J 리그의 백년 구상

‣ 여러분의 마을에, 푸른 잔디가 깔린 광장이나 스포츠 시설을 만드는 일.

‣ 축구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경기를 할 수 있는 스포츠 클럽을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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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하며’ ‘참가한다’. 스포츠를 통해 세대를 초월한 화합의 장을 만드는 일.


4. 스포츠 마케팅


일본은 J 리그의 출범 당시부터 스포츠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성이 있는 부분은 모두 다 상업화하여, J리그라는 명칭 자체도 캐릭터(Character)화 하고 있다. J 리그의 경우 '산뜻함, 젊음, 건강, 참신함, 국제성, 화제성'을 연상시키는 캐릭터를 개발하여 스폰서의 다양화 및 독점권의 부여, TV 방영권 수입의 극대화를 이루고 있다. 

J 리그 마케팅은 크게 '스폰서'와 'TV 방영권'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스폰서(sponsor)에는 '시즌 스폰서(season sponsor)', '공식 스폰서(official sponsor)', '광고‧홍보 라이센스 스폰서(license sponsor)', '캐릭터 후원업체(Character sponsor)', '공식공급업체(official supplier)'의 5가지 종류가 있다. 스폰서를 통한 수입(93년 기준)이 총 34억 1천만 엔, TV 방영권을 통한 수입이 11억 3천만 엔으로 J- 리그가 벌어들이는 연간 수입은 약 45억 5천만 엔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도 프로리그(K- 리그) 출범당시부터 스포츠마케팅에 박차를 가했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우리나라의 프로 스포츠구단은 만년적자에 시달리며 구단의 운영을 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구단운영이나 홍보에 소홀히 하게 되면서 프로축구의 질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월드컵을 통해 축구 인프라가 확보된 만큼 이것을 잘 이용하여 영국이나 스페인, 이탈리아의 유명한 명문 클럽처럼 프로팀을 육성하여 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축구발전에도 이바지 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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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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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用語の基礎知識』自由国民社 2000年度版

『日本を知る辞典』社会思想社 1980年

『昭和の歴史』別巻昭和の世相 小学館 原田勝正

『創られた伝統 』 E・ホブズボウム, T・レンジャー編 

              前川啓治, 梶原景昭他訳  東京 : 紀伊國屋書店 1992年

『일본영화의 이해』 (요모타 이누히코 /현암사)

『일본영화 일본문화』 (김영심 /보고사)

『씨네 21』 (2005.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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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그 문화와 사회』 (이광준 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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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문화의 이해』 ( 최관 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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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주거형태와 생활문화』, 황달기, 일본연구학회, 2000. 8


















현대 일본사회와 문화 

초판1쇄 인쇄  2008년 2월 20일 

초판1쇄 발행  2008년 2월 28일

저자이진후 | 발행  제이앤씨 | 등록  제7- 2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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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인제대학교 학술 연구 조성비에 의한 것임.